사춘기가 끝나고 철이 든다는 것은.
우리 모두 그럴 때가 있다. 지금 걷는 길이, 언젠가 내게 유토피아를 선물할 것이라 마냥 행복하게 상상할 때. 혹은 걷다가 도중에 재미없을 것 같아 때려치운 길이 세상 어떤 길 보다도 재미있어 보일 때. 적어도 난 그랬다. 중, 고등학교 때,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할 때였을까.
<레이디버드>는 크리스틴이라는 한 여학생의 고3 생활을 다룬 영화이다. 너무 현실적이라서 놀랐고, 너무 현실적이라서 좋았다. 고3. 고등학교라는 울타리를 넘어 미지의 세상에 발을 디딜 준비를 하는 시간.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후회를 하기도 하고, 현재와 다른 미래를 꿈꾸기도 한다. 그만큼 혼란스러운 시기이기도 하다. 크리스틴은 자기 자신을 '레이디버드'라고 부르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그렇게 부르길 강요한다. 왜 크리스틴은 자신을 '레이디버드'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불리길 원하는 걸까.
태어나기 전에 정해진 이름이 아닌, 스스로 정한 이름
대다수의 사춘기 소녀, 소년들이 그렇듯, 크리스틴은 어머니와 사이가 굉장히 나쁘다. 크리스틴과 그녀의 어머니가 싸우지 않는 장면이 없을 정도로, 그들의 싸움엔 끝이 없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가 충돌하는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크리스틴의 어머니가 딸에게 기대하는 이미지가 크리스틴에겐 부담과 간섭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크리스틴은 남이 정해준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걷고자 했다. 그래서 그녀는 부모님이 태어나자마자, 혹은 태어나기 전에 정해준 이름이 아닌, 자신이 스스로 정한 이름, '레이디 버드'로 불리길 원했던 것이다.
뜻대로 산다고 결말이 행복한 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뜻대로 살고 싶었지만,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살면 행복할 줄 알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크리스틴은 깨닫는다. 좋아하는 사람과 연애를 하게 됐지만, 결국 안 좋게 끝이 났다. 그렇게 떠나고 싶던 집을 떠나 뉴욕의 대학에 가게 되었지만, 자신을 챙겨줄 가족 하나 없이 홀로 외지에서 사는 것은 역시 그녀에게 쉽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자신을 당당하게 '레이디 버드'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던 크리스틴은 이를 그만둔다. 우린 그녀가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포기한 순간 그녀의 사춘기도 끝이 났음을 알아챌 수 있다. 사춘기 시절 항상 싸우던 자신의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리워하며 영화는 막이 내린다.
사실 사춘기를 통해 배우는 건 바로 세상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삶을 꿈꾼다. 내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그런 삶. 하지만 나는 내가 속해있는 집단 구성원 중 한 명에 불과할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 울타리 안에서 우린 우리의 역할에 충실하며 그 안에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즉, 현실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인 사람이 된다고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된다. 잔소리로만 들렸던 부모님의 말들이 다 나를 위한 말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고, 아무 걱정 없이 친구들과 놀던 시간의 소중함 역시 느낄 수 있다.
사춘기가 끝나는 순간, 우린 미래가 아닌 현재를 살게 된다
사춘기가 끝나고 철이 드는 순간, 우린 비로소 미래에 사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게 된다. 내가 지금 걷는 길이 유토피아로 혹은 낭떠러지로 몰고 갈진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오지도 않은 미래를 걱정하거나, 상상하며 현재를 망치는 것이 아니라, 길을 걷는 행위 자체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 내가 걷고 싶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감사하게 되는 것. 그게 철이 든다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