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 2007
인간은 변할 수 있을까? 참 흔한 소재다. 보통은 큰 충격을 받고 흑화 하거나 그 반대가 되는 식이다. 하지만 말처럼 그렇게 변화가 단순한 것은 아니다. 인물이 자신의 신념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이를 진심으로 받아들였을 때 변화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독일의 분단 시절이 배경인 <타인의 삶>은 그 과정을 조용하면서도 따뜻하게 담아냈다.
<타인의 삶>의 주인공, 비즐러는 동독의 비밀경찰이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그의 유일한 애인이자 친구는 국가다. 국가에 반하는 사람을 심문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비인간적인 방법도 서슴지 않았던 비즐러는 드라이만이라는 작가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게 된다. 드라이만의 집안 구석구석 도청 장치를 설치하고 그의 모든 행동을 감시하며 보고서로 남기는 작업을 한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드라이만을 체포할 만한 단서는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대신 비즐러는 드라이만과 그의 연인 크리스타의 삶에 깊게 매료된다. 국가만을 위해 잔인한 짓을 망설이지 않고 해온 그의 차가운 인생과는 달리 드라이만과 크리스타의 삶은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밀경찰의 직업 특성상 불신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시민처럼 보이는 사람도 반동분자일 수도 있기 때문에. 이렇게 자신과 완전히 동떨어진 드라이만의 삶, '타인의 삶'을 경험하며 비즐러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타인의 삶으로 자신의 삶이 변화하다
처음에는 아무 단서도 없었던 드라이만이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반체제적인 성향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동독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글을 몰래 서독에서 출판하기도 한다. 당연히 비즐러는 이 사실을 알지만 이미 드라이만의 삶에 동화된 그는 오히려 위험에 빠진 드라이만을 몰래 도와주기까지 한다. 비록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들키진 않았지만 비즐러는 모든 직위를 빼앗긴다.
비즐러는 드라이만을 만나기 전에도 사실 그렇게 잔인하고 악독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비밀경찰이라는 직무, 그리고 사회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 때문에 그런 짓을 당연하게 저질러 온 것일 뿐이다(그렇다고 그의 행동들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드라이만이라는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한 뒤 그의 사회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아무런 이유 없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문화인을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권력을 남용하는 모습에서 비즐러는 동독의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깨닫는다. 과연 그는 이 변화로 더 좋은 사람이 된 것일까? 사실 그건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이전보다 편해졌을 것이다.
신념이 부서지는 과정은 요란할 필요가 없다
신념이라는 건 항상 옳은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도 철석같이 믿고 있는 무언가가 실상은 바람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외부의 자극으로 그 신념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신념을 잃은 이후의 삶을 우리는 쉽게 두려워하니까. 그런 우리에게 <타인의 삶>은 말해준다. 옳지 않은 신념이 부서지는 과정은 굳이 요란할 필요가 없다고. 그 이후의 삶은 이전보다 좀 더 가볍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이다. 동독의 비밀경찰도 했는데 우리라고 못할 게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