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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의 윤슬 Nov 05. 2023

다행이다


바다가 시작되는 동쪽 끝 모래사장을 따뜻한 공기가 덮고 있었다.

능선 뒤로 넘어간 해가 하늘과 수면미련처럼 붉은빛을 남겨두었다.

기억이란 참 신기하다. 이미 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음에도 나는 별다른 노력 없이 그날 에 번지던 색과 농도를 선명히 떠올릴 수 있다.

파랗게 깊어가는 바다와 선홍으로 넓어지는 하늘. 서로를 잠식하던 파도와 모래. 오렌지빛으로 흩어지던 구름.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흐릿하게 물들이던 연노랑 대기. 짝 벌린 입술로 바다를 바라보며 웃던 그녀의 옆모습.

그러나 기억이란 참 신기하다. 나는 그날 느꼈던 을 정확히 묘사하기 위해 여러 번 시도해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날 내가 낀 감정은 나를 압도하는 풍경과 내게 기대고 있던 사람일으킨 무질서한 학작용이었다.

그것은 매우 특별한 모양을 가진 구름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것은 인적 없는 산속에서 장대한 폭포를 견했을 때 느끼는 감정이었다.

감정은 주 잠시 존재했다 사라지는 대상을 홀로 바라보는 안타까움이기도 했고, 연히 노출된 을 엿본 자의 탄이기도 했다.

그날은 드물게 찾아오 모든 것이 완벽한 순간이었고, 시간은 한쪽으로만 흘러간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슬퍼한 날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분류하기엔 아직 미완숙다. 약 누군가 내게 다가와 '십 년 후쯤에 넌 지금 이 순간글로 쓰게 될 거야'라고 알려줬어도 그날 내 하루가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 감정에 대해 고민하다가, 이것도 사랑이 부리는 마법인가 하고 조용히 혼란을 갈무리했다. 앞서 말했듯 나는 아직 미완숙했고 그런 고민에 잠겨 있기엔 내 곁에 있던 그녀가 마음을 모두 빼앗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래사장에 설치된 커다란 나무 그네 위에서 그녀는 내 무릎에 머리를 얹고 누워 바다를 보고 있었다. 몸에 찰싹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은 두 다리를 꼬고 깍지 낀 손을 배 위에 올려두었다. 기분이 좋은지 발을 까딱거리며 나직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네 밑에 벗어둔 하얀 운동화 속으로 조금씩 어스름이 스며들었다.


노래 불러줘.

너무 좋다, 는 내 말에 그녀는 그렇게 대답했다.

너무 좋지? 그러면 노래 불러줘.


저녁 맛있었지? 그러면

비가 오네? 그러면

오늘 내 머리 이쁘지? 그러면

그러면

그러면 노래 불러줘

세상 모든 일이 노래를 들을 이유가 되었다. 그녀가 노래를 불러달라고 할 때마다 나는 빙그레 웃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는 짧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도 그녀도 알고 있었다. 노래가 아니라 미소를 원했음을.

그 보조개 아무 데서나 보여주지 마요.

그녀는 깊들어 내 보조개를 좋아하면서도 탐탁지 않아 했었다.


빛이 물러간 자리에 투명한 어둠이 번지고 있었다.

등뒤에서 불어온 따스한 바람이 셔츠 속에 머물다 푸른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하늘과 바다가 경계를 잃어가는 수평선을 보았다. 

파도와 모래가 서로를 허무는 해변을 보았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녀 보았다.

옅은 오렌지색 머리카락이 그보다 더 노란 저녁노을을 탐스럽게 머금고 있었다. 봉긋한 가슴이 가만히 오르내리며 숨을 쉬고 있었다. 나른 속눈썹  반짝이는 눈동자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이 만족스러운 듯 분홍 입술 끝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대를 만나고


뒤로 뻗은 인도 위를 행인들이 오가고 있었다. 파도마저 잠든 날이라 해변엔 행인들 발자국 소리와 대화소리, 그녀의 콧노래 소리만 나직이 들렸다.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시간이 지나 계절도 날짜도 흐릿해질 그 장면을 기념해두고 싶었다.

환상 같은 빛으로 물들던 풍경과, 머릿속을 하얗게 비워내던 그녀와, 빈틈없이 과거로 변해가는 현재와,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을 내 방식대로 간직하고 싶었다. 결심은 늦가을 저녁 공기를 대할 때 느끼는 쓸쓸함처럼 이유도 목적도 없는 충동이었다.


"그대를 만나고"


어?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본 눈이 휘둥그레 커져 있었다. 

어? 노래하는 거예요?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마주 보며 숨을 쉴 수 있어서"


세상 모든 일이 노래를 들을 이유가 되었지만 실제로 노래를 불러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잠깐 나 녹음해야 돼


"그대를 안고서 힘이 들면 눈물 흘릴 수가 있어서"


아니 나 녹음


"다행이다"


스마트폰을 꺼내려는 손을 감싸 쥐었다.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을 기적 같은 순간 한가운데에 있 그녀가, 노래를 듣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내 마음이 전해졌는지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린 그녀 눈을 감았다. 입술 끝에 매달린 미소가 조금 더 깊어지는 모습을 나는 바라보았다.


거친 바람 속에도 젖은 지붕 밑에도

홀로 내팽개쳐져 있지 않다는 게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라는


그대를 만나고

그대와 나눠먹을 밥을 지을 수 있어서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저린 손을 잡아 줄 수 있어서


그대를 안고서

되지 않는 위로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그대라는 아름다운 세상이 여기 있어줘서


거친 바람 속에도 젖은 지붕 밑에도

홀로 내팽개쳐져 있지 않다는 게


지친 하루살이와 고된 살아남기가

행여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게


언제나 나의 곁을 지켜주던

그대라는 놀라운 사람 때문이라는


그대를 만나고

그대의 머릿결을 만질 수가 있어서



망각의 권세도 어쩌지 못하는 지난날들이 살아갈 날을 응원해 준다.

목적도 효용도 없 흘러가버린 시간들이 삶에 채색을 더해 준다.

잊고 싶었던  기억이 추억으로 변해 허망한 삶을 위로해 준다.



... 녹음할랬는데...


원할 때마다 불러줄 거야 녹음 안 해도 돼


회사 언니들한테 자랑하려고 했단 말이지요


회사 언니들한테도 불러지 뭐


다른 여자들 앞에서 이런 노래를 부르겠다고? 죽고 싶으세요?



바다가 시작되는 동쪽 끝 모래사장을 따뜻한 공기가 덮고 있었다.

능선 뒤로 넘어간 해가 하늘과 수면에 미련처럼 붉은빛을 남겨두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입술 끝에 매달린 미소가 조금 더 깊어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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