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 최장섭 할아버지 자서전 풀이 (2)
지난번에 이어 최장섭 할아버지의 자서전을 소개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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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 징용자 내역서>
소속 일본 누대 2중대 2소대
장소 사각형 APT9층 지하실
속번 6105번
성명 창씨명 야마모토 장섭 본명 최장섭
주민번호 291110~140****
<내역 발표>
1. 육군 대장
일자 1945년 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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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 태평양 전쟁에 미영국에 항복한 것은 여러 분은 같은 마음으로 같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러 분 각자는 각 대원은 고국으로 귀향하니까 안심해 주세요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발표했다.
2. 외국 포로 사항.
지나 사변이후 대동아전쟁으로 발발 당시 전쟁포로로 잡혀온 수십 명이 강제로 노역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중국군과 미국군인들이다. 이들도 역시 쓰라린 고통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3. 대동아 전쟁 당시의 상황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현장 탄광을 수호하기 위하여 주위의 옹벽에 약 100k(kg) 이상 되는 쇠뭉치를 수십 개를 옹벽 주위에 매달어 놓고 방어 태세을(를) 했지만 전쟁 당시 일본 해군함이 적재된 탄을 실어갈랴고(가려고) 했으나 적재가 끝날 무렵 미국잠수함으로부터 지뢰를 맛고(맞고) 군함 중간에 구멍이 나서 해수가 드러가(둘어가) 반은 물에 잠겨 버려서 군함이 자무러졌다(기울어졌다). 다행이 수심이 얕은 데서 수영을 했기 때문에 일본 해군함은 침몰의 위험을 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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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작업의 조건
해저 3000m의 수심의 지하에서 조개탄을 발굴하여 4시 4철 땀으로 범벅이가 되여 현장에서는 펜틔만(팬티만) 차고 더위에 시달리며 눈물로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나라를 이른(잃은) 슬픔에 잠겨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지금에 와서 국내 뉴-스를 들어보니 일본최대회사인 것이며 엄연 피해자의 보상이 있어야 할 것으로 사료되는 바이다. (일본 미쓰비시 회사임)
5. 웃지못할 에피스트(에피소드) 콩자루의 소개
1945년 8월 28일 우리 일행들은 원자폭탄 투하된 현지인 나가사키시내 소개받어 답사하기로 단도(하시마에서) 나가사키시를 소개 받었다. 일본 나가사키만 부두에 도착하니 항만에는 주둔한 미군 병원선을 비롯 각 군함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으며 방송을 보내고 있었다. 패군 일본함은 어기저기(여기저기) 헛터저(흩어져) 가둘저(기울어져) 있었다. 잠시 후 우리는 시내로 들어가 청소을 할라고 있는 찰라에 주둔한 미군들이 GMC 차로 래이숀(레이션, 전투식량)과 조크랫(초콜릿) 등 여러 과자을(를) 뿌리며 환영을 했다. 잠시후 분재된 시내를 다니며 청소를 하던중 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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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에 일본쪽 의 식량고에 콩자루 터진 가루가 산재해 있엇다(있었다). 2년 동안이나 굼주린(굶주린) 우리 작업인 등은 원자탄의 독기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어다가 물에 깨끝이(깨끗이) 닦아 튀겨 먹었으나 다행이도 생명에 하등 지장 없이 배 속도 오히려 편안했다.
6. 탈출하다 잡혀온 동지들의 고문당하는 것을 보고 도망하다 잡혀온 동지들은 전남 목포 출신으로 해수을(를) 이용해서 사용되는 갱목을 이용해서 뗏목을 만들러(어) 해염치여(헤엄쳐) 도망했으나 육지에 도달한 결과 일본 조사단에 의해서 잡혀와서 가진(갖은) 고문과 심지어는 고무가와 줄로 만들은(만든) 가와줄로 살이 뭇어나도록 고통을 당했다.
7. 원자폭탄이 투하되던 날
때는 일본의 국운이 쇠퇴해 일본공군하사 야마모토 *** 원사가 전투중 태평양에서 전사했고 그 다음 고** 사령관이 전사한 후 1945년 음력 7월 6일자 나가사키 시내에 원자탄이 투하(떨어져) 일본 나가사키 해상에서 고빈촌 하시마 해상에 비치는(비치는) 불꽃이 불바다를 연상케 했다. 한민족은 물론 일본인까지 그날 나가사키시내를 볼일 보러 간 사람은 개가죽 벼껴지듯(벗겨지듯) 벗껴지고(벗겨지고) 수십명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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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상으로 병원에 입원했으며 시내는 사방 3k(km) 지점까지 소실되여 나가사키 시내에 볼 일이 있어 간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사망 아니면 원상의 후유증으로 지금껏 고생함.
8. 고향에 도라오든(돌아오던) 날
일본측의 전쟁 종말의 책임은 국제법상 고향으로 보내야 할 책무가 있기 때문에 통통배 3척으로 침몰의 위험성을 무룸쓰고(무릅쓰고) 출발하게 되였다. 오는 도중 비바람이 심해서 오다가 일본대도섬에서 1박하고 출발해서 고국 마산항에 도착하여 한국 치안대의 환영을 받으며 기차를 타고 고국 익산군 낭산면 **리 본가로 귀국하였다.
9. 고향에 도라와서 부모 형제을 상봉할 때의 슬품(슬픔)
1945년 11월 25일 고향에 부모형제를 상봉할 때 도착 즉시 우선 아버지의 현상을 보니 참아(차마) 참혹해서 말할 수 없는 슬품이였습니다. 형제의 대리로 함경북도 아오지탄광에서 일하다가 왼쪽 손목이 절단되여서 농부의 아들로 태여나(태어나) 농사을(를) 지을 수가 없으니 온 가족은 눈물로 세월을 보냈으며 가정의 형편은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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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고향에서 지나온 일들
1947년 귀국 후 또다시 한문 사숙해 수업을 2년간 받던 중 익산군 여산 송산 문주사라는 사찰에서 불교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공부을(를) 열심 하던 중 우연하게 무슨 지상에 보도된 광고문에 건국실천원 양성소가 설립되였다고 조선일보 광고문이 되여 있는 것을 여산 문주사 주소지로 연락을 했더니 2개월 후에 오라는 통지문이 도착되였다(도착했다). 우선 대웅전에서 봉축을 드리는 문자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은 철학적인 구절로 구성됨을 기록합니다.
11. 구절문장(대웅전에 봉축)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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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나의 처세 여하히(어떻게) 되였는가
그후 1948년 8월 1일 서울 처음 가서 설** 생님으로부터 강의를 듣고 많은 호응을 했다. 양성소 인적 구성을 살펴봤든이(살펴봤더니) 초대 회장이 이승만 대통령 2대 회장은 김구 선생님이고 3대 회장님은 엄상섭씨였다. 그리고 사무처장에는 일본 와세대를 나온 아주 훌륭한 사람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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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2개월 양성소를 수료하고 재차 김** 선생의 도움을 받어서(받아서)학교에 입학서류을 제출하고 홍익대학교 법정대학부 제1학년에 입학하였다. 경제적으로 곤란해서 제3학년을 수료하고 중퇴하고 말었습니다(말았습니다). 6·25 동란의 직후라 학교 명칭을 전시 병합대학으로 개칭되여 소생은 고향이 가까운 대전 분교에 수료장을 받게 되자 4학년을 올라갈 무렵 광주 보병학교 간부 후보생 학생 연대에 입대해서 10주간 전반기 교육 마치고 후반기 교육을 포기했드니(했더니) 6개월 후에 제2훈련소에서 입대하라는 통지를 받고 훈련소에서 교육을 마치고 053 ASP 경비병으로 발령받고 난 후 다시 군사무동 051 ASP로 000독립중대에 3년 2개월만에 만기 재대되여(어) 병장으로 제대했다.
13. 1953년 충남여고 출신인 유**와 결혼해 4남 3녀의 부모가 되었다(되었다). 그후 나는 익산군 농협장으로부터 낭산 단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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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로 발령받고 2년 5개월간 열심히 근무했으나 가정 생활에 경제적 도움이 되지 않아 부득이 사표 제출하고 다시 대전으로 올라와서 모진 곤란 겨그며(겪으며) 고생을 하였다. 그저 희망을 일치(잃지) 않고 열심히 노력한 끝에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열심이 협력 했기 때문에 우선 식생활의 구에(구애)를 받지 안코(않고) 살고 있으나 한가지 한이 되는 아내의 병이 작구만 무거워지고 당뇨병으로 30년간 투병생활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몸둘 바를 모릅니다.
일주일에 3회씩 을지병원에서 투석중이올시다. 엇지할(어찌할) 바를 모를 곤란한 제움에 시민사회 상임위원장이신 이태수 선생님을 뵙게 되여 위로가 좀 됩니다.
(다음 번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