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1일 돌아가신 김성태 국군포로 생전 인터뷰
앞 글에서 말씀드린대로요.
김성태 국군포로 어르신은 2023년 10월 31일 돌아가셨어요.
11월 3일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식이 예정돼 있는데요.
본인이 원하신대로 매장을 할지, 아니면 화장을 할지 불투명합니다.
본인이 매장을 하고 싶다고 밝히셨는데도요. 넘어야 할 벽은 많아 보입니다.
정부는 관행을 이유로 화장을 권하고 있거든요.
저는 이분이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며 이 글을 씁니다.
이분을 4번밖에 만나지 않은 제가 이렇게 나서는 이유는 이분의 굴곡진 인생사 때문일 겁니다.
부디 마지막 가시는 길은 편안하시길 바랍니다.
이 글은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았다>라는 책에 담긴 부족한 점이 많은 인터뷰이지만요.
김성태 어르신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됩니다.
출판사 대표도 저이고, 글쓴 이도 저니까요. 이 글을 공개해도 될 것 같습니다.
김성태 어르신도 생전에 인터뷰를 여러 사람이 읽으면 좋겠다고 하셨으니까요.
다만 PDF로 변환되기 전 원고라 교열이 안 된 부분이 있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자, 그럼 김성태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어보실까요.
3장 교화소(교도소) 출신
7. 김성태
(2022년 9월 19일 취재)
“교화소에 있는 13년 동안
이 한 번 안 닦은 거 같네”
1934년 4월 4일 경기도 포천시 출생
1948년 3월 15일 입대, 7사단 1연대 3대대 대대장 연락병 배치
1950년 6월 29일 덕정계선에서 포로로 잡힘
13년 동안 교화소 생활 후 주원탄광, 수산탄광 노동
2001년 탈북
어르신은 2022년에 뵈었다. 몇 차례 인터뷰를 청했지만 그때마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인터뷰를 할 수 없다”고 하셨다. 어르신은 귀환 국군포로 가운데 교화소 생활을 증언해줄 수 있는 유일한 생존자다. 경기도 남양주시 호평동에 있는 어르신의 아파트를 찾았다. 어르신은 아파트 건물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인터뷰는 거실에서 진행했다. 거실 한쪽에 몸이 불편한 아내분이 누워 계셨다. 인터뷰를 한 지 5시간쯤 됐을 때 어르신은 “이제 힘든 이야기는 그만하자”고 하셨다. 그러고는 열쇠 꾸러미를 가져와 건넌방 문을 열고는 사과 다섯 알을 꺼내 나에게 건네시며 “가면서 잡숴”라고 하셨다. 13년 동안 ‘생지옥’을 경험한 어르신의 삶을 글로 옮겨본다.
“장남이라서 나만 학교에 다니고 그랬어요”
나는 얼굴이고 이름이고 공개해도 일없어요. 이제 (북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나는 1932년 경기도 포천시 군내면 하성북리에서 출생했습니다. 내 90이요 시방. 북에 있을 때도 생일을 그날로 해서 음력 4월 초나흗날이 내 출생일이야. 동생이 내가 북한에 갔을 때, 중국에 있을 때 와서 면회를 하고 데려왔단 말이에요. 근데 죽었어요, 폐암으로. 육남매가 그렇게 다 죽고 시방 남은 게 의정부에 사는 여동생 하나야. 내가 맏이예요.
내가 그래도 공부를 하고 초등학교 졸업도 하고…. 거기가 농촌이라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농업에 종사하셨어요. 내가 신읍학교 졸업생이에요. 33기인가 그래요. 엄마가 국문으로 학교 시간표를 다 적어주고 책보를 싸줘서 들고 가 공부했어요. 내가 아홉 살에 입학했고 열한 살에 대동아전쟁,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단 말이에요. 그때 조상말은 못 하고 일본말로 통역해서 회화를 했다고. 그렇게 4학년인가 5학년 때 해방이 됐지. 부모님이 농사지어서 벼도 심고, 밭도 있고 하니까 콩, 팥, 조 이런 거 심으면서 살았어요.
거기서 뭐야, 남로당이요 민주당이요 서로 싸우고 아주 소란했어요. 당파 전쟁이 나서 서로 비방하고. 그게 열네 살 때니까 알겠더라고. 서로 매질하면서 싸우고 그랬어요. 1948년 3월에 서북청년단이 나와 가지고 막 빨갱이라고 하면서. 결사대야, 결사대. 목숨 걸고 빨갱이라면서 그저 눈에 불을 켜고 계속 싸웠어요. 구경했지요 우리는. 그때만 해도 미군이 쌀, 밀 이런 거 공급해주고 그랬단 말이에요.
1948년에 이동백 한의원에서 급사로 일했어요. 거기서는 약도 지어주고 하는데 급사 노릇을 하면서 좀 배우려고…, 졸업한 다음에는 신읍에 와서 살았지요. (집에서) 한 5리, 3킬로 정도 돼요. 장남이라서 나만 학교에 다니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내가 열일곱 살이 됐단 말이에요. 신읍에 경비대들이 와 가지고 군복을 입고 모집을 했어요. 열일곱 살인데 나이 두 살을 늘려 가지고 국방경비대에 입대했지요. 군대가 멋있어 보이고 하니까. 친척 중에 전쟁으로 잘못된 사람은 없어요. 아버지 친척이 일본 군대에 갔다가 해방되니까 왔더라고요. 북해도에 갔다가 와서 결혼식도 하고 그런 걸 구경했어요.
이야기는 군 입대로 이어졌다. 어르신은 반말을 거의 하지 않으셨다. 겸손하고 공손하게 경어체로 말씀하셨다. 질문하면 이렇게 답하셨다. “네네, 그래요. 맞아요.” 무척이나 깍듯하게 대해주셔서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들었다.
“내가 목격했어요, 6월 25일 전쟁을”
그래 20명을 거기서 모집해 가지고 경기도 가평으로 갔어요. 부모님 몰래 입대한 거예요. 인사도 못 하고 그냥 왔지요. 그 말 듣고 엄마가 가평에 왔더라고요. 너무 반갑게 떡이랑 해서 가지고 왔어요. 그래서 소대원들 나눠주고. “훈련 잘 받으라”고 그러는 것밖에는 못 들었지요. (가평에서 훈련은) 한 서너 달, 너덧 달 하고.
그다음에 청평 수력발전소가 있었어요. 경비대는 발전소 같은 큰 기관들을 보위하고 있었단 말이에요. 거기 신공덕이라는 데서 경비를 서고 그랬지요. 일요일이면 외출도 나왔어요. 나는 가평에 와서 청평 발전소에서 근무했어요, 한 대여섯 달.
미군들은 저 삼팔선 경비대니까 삼팔선 경비 서고 했는데, 10월 1일이겠구나. 10월 1일 국군으로 편입되면서 미군들하고 교체됐단 말이에요. 미군은 일본으로 가고, 소련은 자기 나라로 가고. 소미공동위원회에서 그렇게 결정을 했어요. 우리는 국방경비대들이 삼팔선을 다 보위하고 있었지요. 그렇게 된 거예요, 1948년에.
7사단 1연대 3대대는 ○○○이 중대장이고, 3대대 본부에 있었어요. 1개 연대에 12개 중대가 있었고요. 그래 가지고 삼팔선 밑 초성에 가서 1개 대대가 자꾸 교대한단 말이에요. 한 서너 달 있다 바꾸고. 나는 연락병을 했어요. 대대장 지프차를 타고 다지면서 대대장을 보위하니까 수월했지. 나이가 어리고 곱게 생기고 해서 대대장 연락병을 시키더란 말이에요. 같이 있으면서 대대장 식사랑 차도 다 공급해주고, 거기서 생활했어요.
그다음에 이등중사가 됐어요. 시방 말로 하면 병장이지. 의정부에서 한 15리 떨어진 곳에 하사관학교가 있었어요. 나를 승급시키려고 하사관학교에 보내더라고요. 거기 갔는데, 그러니까 1950년이지. 그해 6월 25일에 바로 전쟁이 일어났잖아요. 거기 가 있다가 내가 목격했어요, 6월 25일 전쟁을.
일요일이었단 말이에요, 바로 그날이. 토요일에 집에 다녀와서 일요일에 대대 본부에 있었어요, 의정부 3대대. 그래서 거기서 자는데 밤 서너 시쯤 되니까, 삼팔선 밑에서 번개가 치면서 우레 소리가 나더란 말이에요. 그게 바로 북한군이 전쟁을 발발해 가지고 진격하는 소리였어요. 그리고 9시쯤 되니까 중계방송을 통해서 외출 나온 부대 대원들은 다 부대로 빨리 복귀하라고, 시방 중공군이 침략해서 들어온다고 해서 다 중대로 집결했어요.
그래서 6월 26일에 전투에 참가했지요. 12중대에서 와서 포 쏘고 그러는데 사람들이 수없이 희생됐어요. 소들도 다 포탄에 맞아서 죽고. 아, 전쟁의 참화가 이렇게 무섭구나, 이 세상에 전쟁이 없어야지, 전쟁이 이렇게 참혹하고 정말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어르신은 내가 질문을 하면 구체적으로 답변하시면서 “아니, 그게 아니고. 아니요, 그게 맞아요”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포로로 잡힌 경위를 자세히 설명해달라고 하자 “별거 없어요, 그거”라고 간단히 정리하셨다. 어르신이 말씀하신 경위는 이렇다.
“맥이 없는데 어떻게 때리겠어”
(1950년) 6월 29일에 내가 무명고지에서 전투를 하는데 중대장이 부상을 당했단 말이에요. 덕정, 덕정계선. 중대장을 업고 오다 (내가 발등에) 파편을 맞아서 그렇게 포로가 된 거예요. 아, 업고 내려오니까 작전참모, 통신참모, 그다음 뭐야 부관, 이렇게 체포돼 있더라고요. 다 장교들이지.
덕정에서 잡혔는데 밤에 수송됐어요. 그래서 연천에서 이틀인가 묵었는데 비행기들이, 그 쌕쌕이들이 떠 가지고 습격도 하고 폭격도 하고…. 그다음에 함경북도 회령 군마훈련소 자리에 포로수용소가 조직됐는데, 거기 가서 훈련받았지요.
한 1,500명 되더라고, 그때 본 포로가. 외국인은 없었어요. 대대, 중대, 소대, 분대 이렇게 나눠 가지고 인민군대들이 다 보초 서고 한단 말이에요. 훈련이라는 게 전진하는 거, 후진하는 거더라고. 가만히 있으면 병이 걸리니까 운동시키는 거예요, 공부도 시키고.
김일성종합대학교, 김책(김책공업종합대학교-주) 그런 학교를 나온 졸업생들이 별을 하나씩 다 달고서 우리를 공부시켰어요. 원시사회, 봉건사회, 사회주의사회, 공산주의사회 이런 걸 가르치더라고요. 공산주의는 수에 따라 그저 자동화돼서 마음대로 먹고 쓰고 한다고. 원시공동체사회는 유인원 있잖아요, 원숭이가 사람이 됐다는 그것도 가르쳐주고 그러더라고요. 원시공동체사회에서는 다윈을 알려주는데, 뭐 이런 거 다 배우려면 오래 걸리지. 공산주의사회의 우월성을 얘기하더라고요. 근데 (배고픈데) 그게 머리에 들어가겠어요? 안 들어가지. 그저 머리만 끄덕끄덕하는 거예요.
거기에 6월, 7월, 8월, 9월까지 넉 달 있었는데 수없이 많이 죽었어요. 앓아서 죽고 전염병에 걸려서 죽고. 정말 옷도 하나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야. 목욕도 한 번 못 해봤어. 그저 굶주림에 시달렸단 말이에요. 맥이 없는데 어떻게 때리겠어. 비듬나물(비름나물-주), 배가 고프니까 그거 훑어다가 소금 얻어 와서 국 끓여 먹고 그랬지요. 20호(이)가 생겨 가지고, 전염병이 발생해 가지고…. 걔네들은 20호라고 그래요 이를. 20호가 깨워서 아침에 일어나 쓸면 바가지로 하나씩 돼요. 40명, 30명씩 그렇게 자니까 청소를 하나 마나지.
나는 2022년 경기도 하남시에서 6‧25전쟁에 참전했던 원면식 어르신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어르신은 “국군포로로 억류돼 차라리 죽겠다는 마음으로 비눗물을 들이켰는데, 그 일로 병이 심하게 나 행렬에서 뒤처지게 됐고, 감시가 소홀한 사이에 탈출할 수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얼마나 많은 국군포로가 이 분처럼 전쟁 도중 탈출에 성공했을까. 안타깝게도 김성태 어르신은 그러지 못한 경우다. 노력이 부족했던 것일까, 아니면 운이 따르지 않았던 것일까.
“조국 반역자라고 13년형을 주더란 말이에요”
서너 달 되니까 9월, 10월, 한국에서 남로당이라고 들어간 사람은 다 군관학교에 보내더란 말이에요. 한 300명 돼요. 밤에 열차에 태우고 아오지탄광에서 내리게 하더라고요. 우리한테 해방전사라고 그랬어요. 뭐 다른 얘기도 안 해. 누런 거, 지원군들 입던 거, 솜 든 거 입으니까 뜨뜻하지.
그다음에는 피원으로, 10월, 11월에 군마훈련소로 보내더라고요, 백마군마훈련소. 거기에 18개 중대가 있는데, 몽골에서 말들을 끌고 와서 훈련시킨단 말이에요. 한 사람이 말 2마리씩을 훈련시켰어요. 거기서는 나도 잘 먹었단 말이지. 말은 하루에 건조 풀 6킬로에 알곡 3킬로, 강냉이랑 콩, 수수, 보리 뭐 이런 거 3킬로씩 먹어야 돼요. 근데 그거 다 못 먹어요. 새로운 물체를 보면 공포심을 많이 가져서 뛰고 그런다고. 그걸 밤에 끌고 다니면서 익숙하게 하는 일이었어요. 아주 친숙해졌어, 말하고.
한 번은 내가 특무장하고 싸우다가 말다툼을 해서 도망쳤단 말이에요. 내가 어디까지 왔느냐면 평남도 대동군까지 왔어요. 한 닷새 걸렸어요. 나는 이남으로 오려고 그랬단 말이에요. 근데 피복 증명서가 있어야 되는데, 그걸 못 뗐어요. 그래 가지고 거기에 대위가 와서 강의하는데 “부대를 이탈한 사람은 전 부대로 돌아가라”고 해서 순순히 차 타고 돌아왔지요. 부대 와서는 부대장님한테 가서 얘기하니까 군인선서 외우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관대히 봐줬어요. 지금은 군인선서 못 외우지. 아, 군번이야 다 하지. 1105514. 군번을 알았기 때문에 한국에 온 거예요. 아니면 어떻게 한국에 오겠어. 그건 생명이에요.
1953년에 행군을 해서 강원도 회양에 갔어요. 스탈린이 죽은 날이에요, 3월 5일인가. 그래서 기억이 나. 북한에서는 스탈린 대원들을 하나님처럼 아주 우러러 모셨어요. 그때 한 달 동안 행군해서 회양까지 갔지요.
거기 가서는 보름간 휴식을 했어요. 말들은 다 본 기본부대에 배속시키고. 우리는 2군단 몇 사단으로 갔는데 나는 정찰소대로 갔단 말이에요. 나는 하사야, 부분대장이란 말이지. 그런데 1952년 치안대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아들들이 입대를 했어요. 국군이 평양을 해방시켰잖아요. 그때 태극기 들고 만세를 했다고 종파로 몰려서 가게 된 자식들이란 말이에요. 그래 그 자식들을 입대시킨 거지, 대원으로. (대원들과) 뜻이 맞아서 데리고 나오려다가 7월 18일에 내가 체포됐어요.
거기 한 놈이 신고를 해서 체포돼 7월 25일에 군사재판에 회부됐는데 조국 반역자라고 13년형을 주더란 말이에요. (재판에서) 부인했지. 근데 재판에서 차○○이라는 놈이 “하사님이 먼저 가자고 하지 않았는가? 가자고 했다”라고. 내가 “언제 그랬나?” 말대답하고 말았지. 걔가 고자질을 안 하면 넘어가려고 그랬어요, 7명이. 한 사람은 나보다 얕고. 그래서 서너, 너덧 사람이 형을 다 받았고, 나는 책임졌으니까 더 주고.
그런데 형을 받은 다음 27일에, 그러니까 1953년 7월 27일에 휴전이 됐잖아요. (재판하고) 이틀 만에 휴전됐어요. 휴전되니까 포 소리가 아주 조용하더라고요. 그래서 너무 기뻐들 했지.
어르신은 “동료들을 데리고 탈출을 시도했는데, 한국 정부가 알아주는 것은 없다”며 너털웃음을 지으셨다. 어르신은 근래 사망한 한 귀환 국군포로가 자신처럼 교화소 생활을 오래 했다고 기억하셨다. 2006년 사망한 조창호 중위가 교화소 생활을 했다는 사실은 모르고 계셨다. 현 시점에서는 국군포로의 교화소 생활을 알려면 1호 귀환 국군포로인 조창호 중위의 자서전 《돌아온 사자》(1995)를 읽는 것 외에는 별 방법이 없다. 조창호 중위가 10년 넘게 교화소 생활을 한 내용을 책에 자세히 실어놓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책에 나온 내용이 맞는지, 그 내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질문하며 인터뷰를 이어갔다.
“(13년간) 이빨도 못 닦아봤어요”
13년이라는 세월을 많이도 돌아다녔어요. 원산교도소 감방에 들어갔는데 원산에서는 두서너 달밖에 안 있었고 평양, 함흥 해서 아무렇게나 1년 있었지. 평양교화소에는 한 달 머물렀어요. 그다음 함흥으로 와 가지고 좀 많이 있었지요. 한 2~3년. 남포 벽돌공장에서 벽돌을 만들었어요. 그런데 1954년에 도주를 했다가 혼났어요. 한 1년 정도 있다가 그런 거예요. (부령소용소에서) 석회석 공장에도 있었고. 고무산, 석회산 해 가지고…. 시멘트 원료가 석회산이란 말이에요. 청진은 나중에, 고무산이 거기가 중심 같아.
나야 미약하고 하니까 장갑도 뜨고, 그물도 뜨고 하면서 집(교화소) 안에서 일했어요. 어떤 사람들은 집에서 미숫가루, 겨울에는 내복도 가져오는데 나야 총각이니 뭐 어디서 얻어. 강냉이에 콩밥이지. 강냉이에 콩이 40프로 들어가요. 콩이 들어가야지, 안 들어가면 사람이 못 견뎌요. 그것도 1급, 2급, 3급, 4급, 5급이 있어요. 일 안 하면 5급이에요. 노동에 따라 달라요. 1급은 800그램인데 사회보다 100그램씩 적게 준단 말이에요. 5급이 제일 조금 주는 거예요. 숟갈로 하면 두 숟갈이면 다 들어가는 거야. 나는 5급 그 정도 됐어요. 물이 되도록 씹는단 말이에요. 그럼 구수해요. 반찬은 된장국 하나고 다른 건 없어요. 시라지국(시래깃국-주)이지. 이밥은 김일성 생일날, 그다음에 노동당 창건일, 정월 초하룻날 그렇게…. 드문드문 해물도 먹을 수 있어요, 명탯국, 동탯국. 생활이라고 말할 게 없어요. 영양실조 걸려서 죽는 경우가 많다니까.
(한 방이) 학교 교실 정도 돼요. 안에 40명 정도 있었지요. 어느 교화소나 변기통은 다 있단 말이에요. 이 구석에다 놔요. 그래 가지고 밤낮 점검한다고. 아침과 저녁, 그렇게 두 번을 해요. 문 열고 반장이 차렷 한다고. 번호 하나, 둘, 셋, 넷… 정원이 30명, 35명 이렇게 있어요. 맞으면 가고. 아침에 자고 나면 변기통을 쏟아놓고 돌아오고 한단 말이에요.
이불은 (한 채를) 세 사람인가 덮어요, 네 사람인가. 옷 갈아입을 때, 봄여름이 지나고 그다음에 가을철에 제일 바빠요. 개인은 내의가 있겠어요, 뭐가 있겠어요? 북에 있는 사람들은 내의고 뭐고 가져다주고 하는데 나는 그렇지 않지요. 추울 때가 많아요. 그래서 나 정말 혼났어요. 광목이지요. 그 여름옷, 겨울옷 그렇게 준단 말이에요, 관복이라는 걸. (겨울에는) 솜옷을 준다고. 그걸로 생활했어요. (옷은) 쇠로 된 건 하나도 없어. 끄나풀로 맸지요. 붉은색은 아니고, 국방색도 있고 그래요.
목욕도 못 했어요. 그러니까 옷을 입성을 찐단 말이에요. 전기 찌는 걸로. 20호(이)가 생기면 큰 야단이에요. 전염병이 온다고. 그래서 계속 찐다고. 그래서 이는 없었지요. 목욕을 어디서 하겠어요. 목욕한 생각이 안 나. 세수할 때 세면장이 있겠어, 어디가 있겠어? 이빨도 못 닦아봤어요.
대화가 무르익는 사이 요양보호사가 집에 들어왔다. 요양보호사가 “아, 손님이 오셨구나. 점심에 국수를 해야겠다”고 했다. 그래서 식사시간이 다 됐으니 다음에 찾아뵙겠다고 하자 어르신은 “뭘 또 한 번 와요. 다 하지. 여기서 식사하고 가요”라면서 말씀을 이어가셨다. 부엌에서 점심식사를 준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국 교도소 견학을 다녀왔다”는 어르신은 한국 교도소와 북한 교화소를 대조하며 설명하셨다. 이야기는 어르신의 교화소 탈출기로 이어졌다.
“생지옥이 어디 있겠어, 그게 지옥이지”
남포수용소에서 1954년에 내가 탈출했단 말이에요. 평양 복구 건설에 동원됐어요. 남포 벽돌 공장, 거기서 벽돌을 생산해야 하니까 그리 간 거지. 벽돌을 만들었어요, 기와도 만들고. 3월이에요. 아, 1954년 4월이구나. 일은 힘들지 배는 고프지. 나는 죄가 없다, 내가 무슨 죄가 있는가, 그 생각이 머리에 인식돼 가지고 도망을 쳤단 말이에요. 이리로 도망을 오려고. 오후 4시쯤 돼서, 5시인가에 강사한테 대변보러 가겠다고 하고는 도망을 쳤지요.
집집마다 들어가니까 먹을 게 하나도 없어요. 배가 고파서 밤에 강냉이랑 이런 거 좀 먹으려고 했는데 하나도 없더란 말이에요. 죄수복을 갈아입었지요. 간부복을 입으면 잡히지 않아요. 평양으로 가려고 했는데, 강계도 못 갔어요. 강서까지 갔더랬어요, 평남 강서. 거기서 잠복한 경비대에 붙잡혀 가지고 새벽에, 새벽 5시인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도로에서 “서!” 하더란 말이에요. “정지!” 해서 보니까 간수란 말이지. “네가 성태야?” 그래서 “네, 그렇습니다” 해가지고 독방 처분을 15일간 받았어요.
가형은 안 받고 쇠사슬로 만든… 아, 여기(손목) 허물이 있어요, 여기. 자세히 보면 허물이 있어요. 철사로 동여맨 자리예요. 이게 오래돼서 그렇지, 자리가 푹 패어서. 그때 구타를 많이 당했어요. “너 이 새끼 어떻게 도주했어?” 하면서…. 허허허. 그래서 “잘못했습니다. 이제 잘 교화를 받겠습니다” 했지 뭐.
독방 처분 15일이라는 게 이렇게 좁은 데서 오금을 죄고, 밥 갖다 주고… 아휴, 정말 혼났어요. 정말 죽을 뻔했어요. 다리나 올리겠나, 앉은뱅이가 돼 앉은뱅이. 눈 감고 그냥 (그 자세로) 자고. 주먹밥이지 뭐, 그릇에. 화장실은 선생한테 얘기해요, 변보고 싶다고. 독방에서 반성을 해야 하는데, 글쎄 악심이 나. 반성이 뭐야, 반성이. 이 죽일 놈들, 내가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 뉘우침 없이 더 악심이 난단 말이에요.
(여기에 15일간 있다가) 함흥교화소에도 있었고, 그다음 청진 그 어디야, 구보산. 구보산에 시멘트 공장이 있어요. 부령수용소인지, 고무산이 거기가 중심 같아. (시멘트 공장에서) 석회석 싣는 거를 했어요. 세 톤. 한 조에 10명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30톤을 실어야 하지. 그렇지. 30톤씩 실어야 해, 이렇게 큰 거를. 석회석이 나오니까 버버리 장갑이라고, 그걸 끼고 싣는단 말이에요. 그래 가지고 한 사람이 석 톤씩 실어야 해. 못 실으면 선생한테 욕먹고 했어요.
근데 어찌나 힘이 들던지, 누가 주저앉더란 말이에요. 인제 오후 5시가 돼서 수용소로 오는 길에 그냥 주저앉더니 죽었어요, 고무산에서. 선생을 부르니까 벌써 숨이 넘어갔더라고요. 너무 과도하게 일을 하다 보니까, 제대로 못 먹고 약하니까…. 그런 걸 내가 목격했어요. 교화소에서 죽어간 사람이 많아요. 면회 왔다가 그냥 돌아간 사람도 있고요.
노동하다 그렇게 죽더라고. 목격한 게 많아요. 생지옥이야. 생지옥이 어디 있겠어, 그게 지옥이지. 수용소는 그 뭐야 노동을 시킨단 말이에요, 밭이라든가 이런 거를 해서. 그 주변이 몇 킬로였지. 폭이 이 정도인데, 깊이가 2미터, 3미터 되는 데가 있어요. 그렇게 해서 밑에다가 철사나 못을 박아서 도망 못 가게 해놔요. 함정을 다 파놓는 거예요. 교화소는 범위가 큰 데고, 수용소는 작은 데지.
어르신에게 계속 이야기해도 되시겠느냐고 묻자 “예, 재미있어요”라고 답하셨다. 요양보호사가 상에 비빔국수를 차려놓은 뒤 아내분을 챙겨서 모시고 왔다. 네 사람이 앉자 어르신은 요양보호사를 칭찬하셨다. “고생이 많아요. 우리 권사님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지.” 식사를 마친 후에는 “수고 많았어요. 맛있게 잘했어. 100점이네. 잘했어요. 잘 먹었어요”라고 하셨다. 요양보호사는 “어르신이 긍정적이라 오래 사시는 거 같아요. 저야말로 감사드리지요”라며 웃었다. 우리는 요양보호사가 설거지하는 소리를 들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손가락을 세면서 ‘언제 고향에 가나’…”
그런데 결핵에 걸려서 수산교도소에 있었어요. 청진에 있는 교화소 거기서 오래 있었어요. 청진병원에 가서 치료받고 약을 갖다 먹으면서 13년을 지냈단 말이에요. 뭐, 감방에서 수갑도 뜨고 그물도 뜨고, 해어 잡는 거, 바닷물에서 고기 잡는 거 그거. 구멍이 큰 건 2미터, 3미터짜리, 또 구멍이 작은 건 1미터짜리예요.
그때 누가 있었느냐면 같이 감방 생활하는 김응빈, 서울시당위원장 하던 사람이 있었고, 그다음에 한응수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고고학자. 그게 김일성이가 스위스에 있던 사람을 데려온 거예요 공화국으로. 또 김응빈은 소련 아카데미아 거기, 그 뭐야 교장인가 하다가, 아니 했었다는데 온 거예요. (감방에서는) 조그마한 스무 살 아이들이 이 새끼, 저 새끼 해요. 그러니까 죄인이 되면 높고 낮고가 없이 평등하더란 말이에요.
(국군포로가 누군지) 이마에 써 붙이지도 않고 그래서 몰라요. 근데 간첩들은 다 안다고. 간첩들은 “나는 어디서 잘 먹고 잘 입었다” 하면서 다 얘기해요.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남조선에서 대우를 잘 받고 해서 한이 없다”는 거예요. 1953년, 1952년 전쟁 때 많이 들어오고, 전쟁 후에도 많이 들어왔더라고요. 남에서 되돌아온 간첩들, 말하자면 애국자지. 이런 사람들 말 듣고 한국이 얼마나 잘사는지, 얼마나 잘살고 있는지 알았어요.
그러니까 (교화소에서 나온 건) 1966년 7월이에요. 13년이 지나 가지고 스물세 살에 들어갔다가 서른여섯 살에 나왔지요, 1966년 7월 18일에. 그런 데서 13년을 꼬박 살고 왔어요. 나와서도 ‘내가 나갈 때가 됐는데’라고 손가락을 세면서 ‘언제 고향에 가나’ 하는 그런 꿈을 여러 번 꿨어요.
이야기 도중에 어르신은 자두를 먹고 하라고 권하셨다. “아, 빨리 시원하게 그거 좀 잡숴요. 이거나 좀 잡숴. 저 노친네, 양반이 와도 그냥 누워 있고 그렇지 뭐. 이거 잡숴요.” 10여 년 전 귀환 국군포로 어르신들을 처음 뵈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누군가가 내게 이렇게 먹을거리를 자꾸 권하셨던 것 같은데, 그분이 어르신이 아닐까 싶었다. 이야기는 교화소 이후 생활로 넘어갔다. 어르신은 주원탄광과 수산탄광에서의 생활을 들려주셨다.
“잘 먹으면 낫고 못 먹으면 결핵에 걸리고”
나는 그 뭐야, 당학교도 못 갔어요. 교도소 생활하다가 왔으니까. 당학교도 못 가니 어떻게 되겠어요? 일했지 탄광에서. 그 (함경북도 원성) 주원탄광. 거기 있으면서 노친을 만났단 말이에요. 노친이 어디서 왔냐면 대동군에서 왔다고. 그래 가지고 아들 둘 낳고. 나보다 한 살 아래예요. 그때가 서른다섯 살이야. 마음이 정말 무던하고, 처갓집에 가보니까 교육받은 여자들이더라고요. 내 노친 두어 번 (결혼) 했어. 과부가 많아요, 탄광이니까. 인물도 괜찮고 해서…. 아들이 여기 와 있어요. 시방 내가 다 끊어버렸지. 아들 둘인데 하나는 북한에서 죽었어요. 며느리하고 다 있었는데, 그건 말할 수가 없어. 30대 때지. 얘기할 필요가 없어.
(일한 건) 굴진. 국영에서 개인이 하는 데로 왔어요, 수산탄광. 땅굴 팠어요, 발포해 가지고. 그다음에 삽질해서 탄을, 굴진이라는 건 동발 세우고 이런 걸 계속하는 거예요. 지방공업탄에서 나와서, 수산탄광에서 나와 가지고 배려를 잘 받았던 말이에요. 고기요, 생선이요, 해어도 많이 먹고. 수산탄광이 해변가에 있어서 수산탄광이라고 이름 붙인 거예요.
내가 나이가 60 정도 되니까 거기로 견학을 보내더라고요. 나라에서 대우를 해줘서 갔어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평양 견학을 갔지요. 임수경이 간 다음에 누구지, 남자하고 둘이 넘어왔더란 말이에요. “조국 통일! 조국 통일!” 평양시를 돌아다니더라고. 똑똑히 봤지. 옥류관에 가서 국수도 먹어보고 했어요. 3시간씩 걸려요, 식사 기다리는 게. 아휴, 못 갈 데야.
그러다가 결핵에 두 번 걸려서 사회보장을 두 번 받았단 말이에요, 수산탄광에서 10년 동안 일하다가. 글쎄, 잘 먹으면 낫고 못 먹으면 결핵에 걸리더라고. 국영탄광에는 결핵병원, 그 요양 휴양소가 있지만 이런 데는 없단 말이에요. 그런 데 가서 1년 먹으면 낫고. 또 나가서 채탄하고 굴진하면 결핵에 걸려버리고, 그렇게 사회보장을 받았어요.
어르신은 교화소 이야기를 하는 중간에 “그만하자”고 완강하게 말씀하셨다. “다 했어요. (교화소 얘기) 그만해요. 하나 마나야. 됐어, 됐어. 하지 말아요.” 이야기는 탈북 과정으로 옮겨갔다.
(예순 살이 넘어서는) 사회로 나와 산꼭대기에 가서 농사를 지었단 말이에요. 한 번은 그러니까 중국에서 날아왔어요. “김성태 아버이 없는가?” 2001년인가, 동생이 시방 중국에 와 있다면서 (브로커가) 나를 데리러 왔더라고요. 그래 가지고 내가 돈이랑 경비를 다 줄 테니까 넘겨 보내달라고. 아니, 아들이랑 다 같이. 예예. 같이 가 가지고 넘어왔단 말이에요.
그다음 중국에 한 달쯤 있다가 전화를 계속해서 동생이 왔어요, 저 뭐야, 연길(옌지-주)비행장에. 근데 50년 동안 헤어져 있었으니 어떻게 알겠어요, 동생인지 뭔지. 내가 “동생 몸 어디에 뭐가 있고 뭐가 있고” 얘기하니까, “동생이 어디 학교를 다녔고” 하니까 “우리 형님이 맞습니다” 그래요. 거기서 화해하고 동생이 돈을 주더란 말이에요. 돈을 주면서 이거 쓰라고. 그래서 넘어오게 된 거지.
거기에서 방송이 들어와 가지고, KBS 방송국에 얘기해서 김성태라는 사람이 어떻게 넘어오는지 방송을 해달라, 동생이 보냈단 말이에요. 국방부에 제기해서 왔더라고요. 그래서 국방부에서 와 가지고, 벌써 공작원들이 둘이 따라 붙었어요.
그다음 나하고 아들하고 다 거기로 해 가지고 대련(다롄-주)으로 해서 심양(선양-주)에 오니까 두 사람이 나타났어요. 그리고 그 집으로 안내해서 거기서 점심 먹고 쭉 얘기하니까, 한국에 대한 걸 아주 잘 설명해주더라고. 3시쯤 되니까 브로커가 왔어요. 먹이고 보호해준 대가를 치러야 될 거 아니에요. 3,000달러요, 4,000달러요 그래서 돈을 주고. 브로커하고 동생하고는 심양비행장에서 집으로 오고. (그 돈은) 국방부에서 줬겠지, 국가에서.
그다음 양복을 한 벌 주더라고요. 그리고 3시에 택시가 와서 타니까 대련에 내렸어요, 9시에. 그다음은 화물선에, 나하고 아들하고. 그 사람이 우리를 소개해서 이리로 오게 된 거예요. 그 사람하고 같이 왔어요. 그래 가지고 29시간 걸리더라고 인천항에 오기까지.
대성공사에서 한 달간 심사를 받고, 그 기계화부대라고 거기 가서 전역식을 하는데 친척들이 왔더란 말이에요. 내가 원래 신길에 집을 받았어요, 22평짜리. 시방 생각하면 내가 대가리가 좀 못됐단 말이지. 신길에 집을 공짜로, 거기 들어가 있었으면 일없겠는데….
(정부로부터) 4억 5,000인가 받았어요. 그래서 동생들한테 2,000만 원씩 주고. 내가 25평짜리 집을 의정부 호원동에 9,800만 원인가를 주고 (샀지), 2001년에. 나는 전세를 들고, 수원에 2억 7,000짜리 상가를 샀단 말이에요. 그다음 집을 팔아서 아들이 경북에 15세대짜리 원룸을 두 채 샀는데 1년 있다가 다 날리고 말았지.
수원 상가는 남아 있었는데, 그게 글쎄 2억 7,000에 나가더라고요. 그다음 바로 한성무역이 망할 때 그걸 판 돈을 밀어 넣었단 말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2억 7,000을 홀랑 날려버렸어요. 그때 (상가가) 안 팔렸으면 일없는 건데…. 연금이란 건 없지. (연금을 가입하지 않으면 일시불로) 1억 2,000이 나가더란 말이에요. (한성무역에 투자한 돈은) 못 받지요, 뭐. (한성무역 대표가) 징역을 2년 7개월 살았다고 하잖아요. 7월에 나왔대. 우리 돈 다 떼 가지고…. 인생사가 그래요.
어르신에게 가족과 왕래하는지 여쭙자 고개를 저으며 “그래도 살아나가”라고 담담하게 답하셨다.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어디선가 청아한 리코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너무 영광이지”
그래도 먹고사니까. 24만 원 노령연금, (기초생활)수급자. 내가 전쟁 수당이 나오잖아요, 40만 원인지. 그럼 한 100만 원 잘 타. (가족의) 괄시 그런 것도 없어요. 그래도 살아나가. 거의 다 그래요. 나는 국가에서 다 해주니까, 그까짓 거 관계가 없어요. 그래도 먹고사니까 어쩌겠어요.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어.
내가 피원에 있을 때 장○○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서울 경 자. 남녘 남 자를 써서 남한을 그리워한다는 이름이더라고. 그 사람하고 친하게 지냈어요 군마훈련소에서. 고졸 나오고 아주 지식분자인데 내 대원으로 있었단 말이에요. 1954년에 금화인지, 그리로 해서 넘어왔다고 그랬대. 그리고 우리 (부모님) 집에 들러서 (김성태가) 얼마 안 있으면 올 거다 말했대요. 그래서 내가 (탈북해서) 장○○이를 찾았단 말이에요. 장○○이가 일곱 사람인가 돼, 우리나라에. 근데 비밀이라면서 알려주지 않더란 말이에요. 그래서 찾질 못했어요.
나는 뭐, 시방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오래 사는 거야, 정말. 한국에 나왔으니까 이리 오래 사는 거지, 북에서 살았으면 죽었을지 몰라.
아, (대통령 취임식에 가서) 영광이지요 뭐. 취임식에 나하고, 유영복이하고 또 한 사람 이렇게 3명이서 갔댔어요. 그날 차가 왔어요. 그것도 물망초에서 해서 간 거지. 물망초에서 왔어요. 아, 박선영 이사장님이 최고야. 윤석열 대통령이 아주 원칙적으로 잘하는데 글쎄. 마음이 너무 영광이지. 그런 자리에 앉게 돼서 너무 영광이지.
건강은 괜찮아요. 이게 시방 척추협착이에요. 2년 됐어요. 건강해서 산에도 잘 다니고 그랬는데 갑자기 이렇게 됐어요. 내가 먹은 약이 뭐요, 요양보호사님? 일주일 동안 먹은 게? (요양보호사가 “헬리코박터균 잡는 약이에요”라고 답했다.) 그게 걸렸어. 약이 쓰고 그런데 이제는 좋아요 아주. 코로나가 뭐예요? 안 걸렸어요. 우리는 (백신을) 4번 맞았어요, 요양보호사가 잘해서 제때. 다른 병은 없어요.
복지관에는 안 다녀요. 나가기야 나가지. 평소에는 운동을 해야 해요, 허리가 좋지 않으니까. 내가 시방 아흔 살인데, 옛날에는 생각도 못 하던 나이야. 가문에서 제일 오래 살았어요. (이사 온 지) 한 10년 됐는데 여기 물이 좋은지, 터가 좋은지 건강하더라고. 여기는 공기가 아주 신선해서 자고 일어나면 거뜬해요.
에이, 헤칠 사람이 누가 있어? 나는 그런 거 하나도 없어요. 나는 겁나는 게 하나도 없어. 그럼요. 하나님 믿어서 여기서 항상 기도해주시고. (현재 함께 사는 할머니는) 12년 같이 살았어요, 13년인가. 여기 와서 만났지요. 조카가 와서 만나게 해줬어요. 노친의 조카요.
아휴, 이제 그만해요. 교화소는 시방 얘기한 거 그대로야. 자꾸 나이가 먹으니까 잊어버리고 그래. 아이고, 끔찍해요, 끔찍해. 죽다 살아났는데 자꾸만 얘기하라고 하면 어쩌겠어요. 시간이 많이 갔어요.
나도 반가워요. 이렇게 조용히 얘기하고 가면 좋지. 시원한 거나 마저 잡숫고 가요. 죽으면 다인데 뭐. 죽으면 다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