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박육아와 자기보존의 양립 불가능성
돌잔치를 일주일여 앞둔 어느 밤, 나는 악에 받쳐 '수상소감'을 썼다. 잠든 아기 옆에 숨 죽이고 누워서 스마트폰에 와다다 빠른 속도로 입력했다.
"지난 1년은 엄마 최윤아가 태어나고 성장하는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인간 최윤아가 소멸하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가족 여러분들이 붕괴된 개인 최윤아를 재건할 수 있도록 많이 지원, 응원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돌잔치에서 나는 말하고 싶었다. 지난 1년 동안 내가 잃었던 것들에 대해서. 아기는 커졌지만 나는 한 없이 축소되었던 시간들에 대해서. '좋은 날'이니 하하호호 웃기만 할 수 없었다. 그건 나조차 나를 소외시키는 일처럼 느껴졌다. 묻어두웠던 내 진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 시기를 넘어갈 수 있는 유일한 다리처럼 느껴졌다.
지난 1년은 자기를 포기하는 게 얼마나 쉬운가를 체험한 시간이었다. 어떻게하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더 나은 컨디션이 되는지 그 방법을 알면서도 나는 그 길을 외면했고, 나를 방치했다. 카페에서 1시간만 책을 읽고 끄적여도, 집에서 딱 30분만 요가를 해도, 마사지 도자기를 데워 몸 구석구석을 문질러주기만 해도, 라벤더 오일을 서너 방울 떨어뜨린 목욕물에 30분만 몸을 담가도 훨씬 더 나은 기분이 된다는 걸 나는 안다. 나는 읽고, 써야 (내 존재가 상하지 않게) '보존'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자기돌봄'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기를 돌보는 사람에게 자기돌봄은 사치라고 판단해 버렸고, 나를 방치했다. 내가 나를 방치했을 때 이 세상에 내 존재를 돌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응어리는 오직 나만이 어루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기를 쓰고 자기돌봄의 시간을 확보하려 애썼다. 아기가 잠들면 장난감을 한 군데 미뤄두고 폼롤러라도 몇 번 굴려보려 했고, 김치 국물 말라 붙은 부엌 식탁에라도 앉아 다급하게 자판을 두드리기도 했다. 1박2일로 여행도 떠나봤고, 욕조에 물도 받아봤다. 하지만 그럴 때면 어김 없이 들려오는 아기의 울음소리. 그 소리가 나를 내팽겨치고 아기에게 달려가도록 만들었다. 자기보존의 시도-중단-실패가 수차례 반복되자 "내 주제에 무슨"이라는, 패배감의 언어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자기를 돌보는 것은 자기탐닉이 아닌 '자기보존'의 행위이며, 투쟁하며 지켜야 할 명분이다."
(오드리 로드, 'a burst of light')
내가 애써 사수하려하지 않는 시간을 타인이 나서서 만들어주리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다. 누구도 내가 나를 재건하는 일에 신경 써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는동안 남편은 중책을 맡아 휘어지고, 상하고, 비틀린 자신을 구제하러 두달에 한번씩 밤도깨비 여행을 떠났다. 그는 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시종 사나운 독기를 내뿜는 나의 비위를 비굴하다시피 맞췄고, 여행 이후 이자처럼 불어나는 엄청난 피로감을 감수했다. 주양육자가 아니기에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기 시간 확보를 위한 그의 분투를 보고 있노라면, 주양육자였어도 그는 기필코, 반드시, 훌쩍 떠났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이번 설 연휴는 스스로 '최윤아 재건 프로젝트'로 명명하고 친구와 함께 호캉스를 왔다. 결혼 9년만에 처음 명절에 시가 행사에 불참했다. 나도 좀 쉬어야겠다고 선언했다. 투쟁했더니 쟁취할 수 있었다. 자기돌봄은 인간에게 '사치재'가 아니라 '필수재'다. 나부터 개념을 바꾸니 의외로 수월했다. 나의 시간인데 왜 타인의 양해 내지는 허락을 받아야하는 건가 싶어 뒷맛이 씁쓸하기는 했지만.
수영, 목욕, 맥주, 글쓰기, 책 읽기. "우울은 수용성"이라는 친구의 말에 감탄하며 부지런히 따뜻한 물 속에서 존재를 풀어본다. 한껏 쪼끄라든 내가, 천천히 팽창되는 감각이 느껴진다. 남편이 영상통화로 아기가 식음을 전폐했으며 설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온다. 하지만 이번 만큼은 투쟁을 이어나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