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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윤아 Mar 08. 2021

불면증이라는 조난 신호

잠이 오지 않을 때

"몸이 건강할 땐 잠을 잘 자고, 몸이 안 좋으면 아마 잠을 잘 못 잘 거예요." 

오묘한 말이었어요. 지난여름 보약을 지으러 한의원에 갔어요. ○○구 허준이라 불리는 명의였죠. 잔뜩 기대를 하고 갔는데, 이런 당연한 말을 하더라고요. 건강하면 잘 자고, 아프면 못 자는 건 어떤 사상체질에도 해당하는 너무 뻔한 얘기가 아닐까요? 그런데 곱씹어보니 낯설더라고요. "잠을 잘 자야 건강하다"는 말은 많이 듣지만, 그 반대, "건강하면 잠을 잘 잔다"는 말은 처음이었어요. 우울증이나 식욕 부진 같은, 다른 병을 유발하는 '원인으로서'의 불면이 아니라, 다른 원인으로 인해 발병하는 '신호'이자 '결과로서'의 불면의 가능성을 처음 따져보게 됐죠. 

 하루 최소 8시간은 자야 개운하고, 10시간도 거뜬히 자지만, 저도 주기적으로 심한 불면증을 앓아왔어요. 언론사 최종 면접을 앞두고 거의 한 달 동안 잠들지 못해 정신병원에서 수면제를 처방 받아 먹기도 했죠. 일반 정신과가 아니라 폐쇄병동이 있는 정신병원이었는데, 회색 인테리어와 무거운 적막, 단 5분의 상담도 없던 진료 탓에 왠지 비참한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던 기억이 나요. 

 입 안을 사막으로 만들고, 머릿속에 안개를 주입하는 독한 수면제를 먹고도 겨우 서너 시간 잠들 수 있었던 지독한 불면증은 합격 통보를 받고도 제 침대 주위를 어슬렁 거렸어요. 심지어 오리엔테이션 기간에도요. 신입사원 대면식에서 술을 진탕 먹어도 다음날 아침 6시면 눈이 떠졌어요. 하루 많아야 서너 시간 잘 수 있는 수습기자 때도 잠이 드는데만 늘 30분 이상 걸렸고요. 그런데 두 달쯤 지나니 감쪽같이 사라졌더라고요. 

 그 후로 잠잠하던 불면증은 퇴사 이후 재발했어요. 아직도 기억나요. '퇴사 여행'으로 무리해서 떠난 발리의 고급 리조트에서 일곱시에 눈 떴을 때의 그 아득함. '돌아왔구나.' 악당이 돌아온 것 마냥 불길했던 그 기분. 잠 좀 푹 자고 싶어서 퇴사 후를 그렇게 기다렸는데, 그날 이후 저는 다시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어요. 잠 못 드는 백수라니. 마치 돈을 쓰지 못하는 억만장자가 된 것처럼 허탈했죠. 새벽 세시에 접어들 무렵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와 탁하고 거실등을 켜면 새하얗게 쏟아지던 빛들. 마치 잠을 단념하라는 명령처럼 느껴졌어요. 그 눈부신 빛 아래 눈을 감고 누우면 눈 앞에 잔상이 남았는데, 그 형태가 마치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인간처럼 보였어요. 

 그렇게 석 달을 표류하니 책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라고요. 그날부턴 누워서 책 제목을 골똘히 떠올렸고(절대 앉지는 않았어요), 제목이 어느 정도 압축됐을 땐 머릿속에서 요리조리 순서를 바꿔가며 목차를 짰고, 목차를 다 짜고 나니 어느새 불면증이 사라져 있었어요. 그때 든 감정은 의외로 옅은 서운함이었어요. '아, 고민하기 좋은 시간이었는데...' 어느새 불면은 인생을 훼방 놓는 적이 아니라, 그 어떤 방해도 없이 고민할 시간을 벌어주는 둑이 되어 있더라고요. 

KBS 드라마 '프로듀사' 한 장면. 아이유는 극중에서도, 실제로도 심한 불면증을 앓았다죠. 그랬기에 '밤 편지' 같은 띵곡도 나왔고요. 

 제 '불면의 역사'를 쭉 훑었더니 반복되는 패턴이 있더라고요. '방향을 잃었을 때 나타나고, 방향성을 되찾으면 사라진다.'  최종 면접 한 달 전 잠을 이루지 못했던 건 '미치도록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 곳이 맞는지 확신이 없어서' 였어요.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그곳에서는 환영받지 못했거든요. 그런 곳에서 버텨낼 수 있을까, 불쑥불쑥 불안감이 치고 올라왔어요. 그러나 고된 수습 기간을 두 달 버틴 후에는 그런 고민은 사라졌죠. 매몰비용이 아까워서 도저히 퇴사할 수 없었거든요. 그러다 몇 년 뒤 튕겨져 나가듯 퇴사하고 다시 방향을 잃자 느닷없이, 그렇지만 어김없이 불면이 찾아오더라고요. 불면은 경고등이었어요. "당신의 인생이 경로를 '상실'했습니다"라고 고지하는 하얀 등. "자, 지금부터 섭섭지 않을 만큼 시간을 줄 테니, 다시 진지하게 탐색해 보세요."라고 등 떠미는 빛. 마음속에서 깜빡이는 불안을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들여다봐달라는 조난신호. 


철학자 알랭 드 보통도 불면에 대해 이렇게 쓴 적 있어요. 


"불면증이란 우리가 궁극적으로 맞닥뜨린 문제를 너무 오래 미뤄두고 있을 때 내면에서 호소하는 건강한 애원이다. 불면증의 문제는 사실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저는 이 문장만큼 불면증에 잘 듣는 약은 세상에 없다고 확신해요. 

오늘도 침대라는 외딴섬에서 잠과 피곤한 사투를 벌이고 있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지도 몰라 이 야심한 밤에 자판을 두드려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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