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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윤아 Jan 02. 2019

말하자니 두렵고 참자니 괴로울 때

얼굴은 기억나지 않아요.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고요. 그런데도 그 소녀의 '두려움'만은 완벽하게 제게 읽혔어요. '두려움은 두려움을 알아본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저는 이 문장이 자꾸 떠올랐어요. 

얼마 전 글쓰기 강의를 했어요. '우리 사회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 즉석에서 글을 써보기로 했죠. 약속한 시간이 지나자 한 여학생이 소리 없이 제 곁으로 다가왔어요. 

"선생님… 제 글은 이메일로만 첨삭해 주시면 안 될까요? " 

"음, 그건 좀 곤란한데… 아…"

여학생이 내민 글 첫 문장을 읽자마자 저는 그가 왜 자신의 글을 내보이는 걸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단박에 알아차렸어요. '우리 사회가 당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여성 혐오다.' 글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거든요. 50명 가까이 모인 강의실엔 남학생이 더 많았고요. 

 다른 답안지보다 두 배는 크고 진한 글씨, 줄이 처지지 않은 뒷면까지 다급하게 넘어간 문장들. 소녀의 답안지는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어요. '나는 이 얘기를 꼭 해야겠다, 도저히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집에 와서 찬찬히 읽어봤어요. 더할 나위 없이 탄탄한 글이었어요. '혐오의 6단계 이론'을 들어 한국 사회 여성 혐오의 심각성을 진단했고, '여성 혐오를 없애야 한다'고 헛헛하게 말하는 대신 '집단적 혐오 정서를 바로잡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했죠. 글은 맑은 호숫물처럼 글쓴이의 머릿속을 투명하게 드러내곤 하는데, 그렇게 엿본 소녀의 고민은 깊고 고요했어요. 이미 정리된 생각이었기에 문장은 더없이 단정했고요. '재능이란 이런 거구나'싶었죠. 

 그랬기에 더 안타깝더라고요. 소녀에겐 없는 딱 한 가지 가요. 어쩌면 작가에게 가장 중요할지 모르는 결정적인 한 가지, '글을 발표할 용기'가 소녀에겐 없었어요. 

KBS 드라마 '땐뽀걸즈'. 당당하게 발표하는 후배를 응원합니다. 

 왜 모르겠어요. 저도 그랬는데요. 오죽하면 원고를 다 써두고도 '지금이라도 출판사에 계약을 해지 한다고 말할까'하며 손을 덜덜 떨던 시간이 있었어요. 제 인생을 갈아 넣어 완성한 글인데도 읽히는 게 달갑지 않았어요. 공격당할까 봐 두려웠거든요. 되기만 하면 작가에겐 천군 마마나 다름없는 네이버 출간 전 연재를 출판사가 어렵게 따냈다는 소식을 듣고도 기쁘긴커녕 매일 악몽을 꿨어요. 제 출간 전 연재 페이지에 일베가 몰려와 온갖 악플을 달아 놓는 그런 꿈이요.  

 그럼에도 끝내 저는 결국 제 글을 발표했어요. '이 시대엔 이런 얘기가 필요하다'는 사명감, 당연히 있었죠. 이 책을 통해 에세이스트로 자리 잡고 싶다는 욕망, 없다면 거짓말이고요. 그러나 '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 용기를 낸 건 아니었어요. '해도 괜찮다'는 안심도 있었죠. 그 안심은 저보다 먼저, 저보다 더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동료 작가들이 줬어요. 제 책이 나오기 전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어''요즘 엄마들''며느리 사표''며느라기' 같은 책들이 연달아 출간됐어요. 살짝살짝 결은 다르지만 큰 틀에서 보면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책들이었죠. 그 책들의 존재가 저를 안심시켰고, 나아가 확신을 줬어요. '내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 이런 얘기 해도 큰 일 나지 않는구나.' 용기는 제로베이스가 아니어서, 그분들 각자가 냈을 용기는 사라지지 않고 사회 어딘가를 떠돌다가 소심한 후배가 주저하는 바로 그 순간, 그 마음 위에 포개지더라고요. 덕분에 세계 최고 겁쟁이인 저도 '전업주부의 페미니즘'이라는 상당히 논쟁적인 주제로 글을 발표할 수 있었어요. 

 그날,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여성 혐오'에 대해 쓴 학생은 절반이 넘었어요. 그중 적지 않은 글이 '여성 혐오는 없다'라고 주장했고요. 그 소녀보다 좋은 글을 써낸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요. 저는 그 소녀에게 이렇게 메일을 보냈답니다. 

 혹시 글을 발표하지 않은 걸 후회하지는 않았나요? 이렇게 훌륭한 글, 앞으로는 용감하게 발표해 주세요. 내가 말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뒷사람은 용기를 얻거든요. 

  어느 사회, 어느 조직에서나 약자를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해요. '말할 때 눈치 보는 사람'을 찾는 거예요. 신입사원들은 심지어 뭐 먹을지  정할 때도 부장님 눈치를 살피잖아요. 회사에선 카리스마 넘쳐도 시댁만 가면 꿀먹은 미어캣이 된다는 여자 선배들도 많이 봤고요. '여성 혐오가 문제다'라는 말조차 눈치 보다 입을 다물어 버리는 여학생들, '여성 혐오는 없다'는 글을 거리낌 없이 발표하는 남학생들. 누가 약자인지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는 현장 속에서 저는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답니다. '말하자니 두렵고 참자니 괴로운' 이슈에 대해 절대 침묵하지 않겠다고요. 편견이 삐죽 나온 불완전한 글일지라도 일단은 침묵의 둑에 균열을 내보겠다고요. 작가 은유의 말처럼 '글쓰기는 실패 체험'이지만, 나의 실패도 누군가에게 작은 용기를 주었다면 '우리의 실패'는 아니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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