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싫을 때
'유입 키워드: 살기 싫을 때'
요 근래 제가 읽었던 가장 마음 아픈 문장이에요. 브런치는 독자가 어쩌다 이 곳을 들어오게 됐는지 작가가 유추할 수 있도록 '유입 키워드' 정보를 제공해요. 어떤 날은 '전업주부', 다른 날은 '요가', 또 다른 날은 제가 쓴 책 두 권의 제목이 키워드로 뜨죠. 그런데 며칠 전부터 너무도 위태로워 보이는 다섯 글자가 유입 키워드 목록에 등장했어요. 그 독자가 누군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제가 아는 건 단 하나도 없었지만 어쩐지 제 눈엔 그가 보이는 것 같았어요. 암막 커튼이 햇볕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어두컴컴한 방. 침대에 묶인 듯 꼼짝 않는 자세. 실망마저 떠나버린 표정 없는 얼굴. 그 위로 무정하게 떨어지는 스마트폰 불빛. 한 때 제가, 딱 저 모습으로 저 다섯 단어를 입력했거든요.
세상이 싫었어요. '권선징악은 있다'는 걸 신앙처럼 믿고 살았는데 반례만 무성했고, 노력하면 될 줄 알았는데
수도 없이 배신당했어요. 그래서 누워만 있었어요. 다 놓아버리자니 성급한 것 같고, 다시 붙잡아보자니 내키지 않아서요. 시체처럼 누워서 매일 마음속에서 전쟁을 치렀어요. 그렇게 홀로 싸우다 정신을 차려보면 일주일이, 한 달이, 순식간에 지나가 있더군요. 시간은 흘러가는데, 저만 고여서 썩어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스스로가 부패하고 있다는 끔찍한 생각에 사로잡혔어요.
세상이 싫은 건 어쩔 수 없다. 좋아할 만한 세상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내가 나를 싫어하는 건 좀 멈출 수 있지 않을까.
숱한 뒤척임 끝에 들려온 희미한 생(生)의 승전보. 전세가 뒤집힐세라 다급하게 고민했어요. 내가 나를 덜 싫어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될까.
약속 잘 지키기. 일단 그것부터 했어요. 약속 지키기는 모든 관계의 기본이잖아요. 매번 약속에 늦거나, 제멋대로 깨버리는 친구 혹은 애인을 신뢰할 수 없듯, '약속 못 지키는 의지박약한 나'도 영 미덥지 않죠.
약속을 했어요. 아무리 일어나기 싫어도 요가는 다녀오기. 지키기 어려운 약속은 실망감만 남길 게 뻔하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는 지켜야 한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는 쉬운 약속으로 시작했죠. 그러나 첫째 둘째 날을 제외하고 내리 나흘을 저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요.
약속을 못 지킨 날엔 어김없이 총성이 들렸어요. "그것도 못 지키면 도대체 네가 할 수 있는 건 뭐냐?" "그러게 애초에 안 한다고 했잖아!" 여느 연인의 흔한 싸움 레퍼토리가 제 마음속에서도 그대로 재생됐죠. 내가 나에게 실망하고, 내가 나를 불신했어요.
반대로 약속을 지킨 날은 고요했어요. 내 말을 들어준 '내'가 고맙고 대견했고 믿음직했기에 나와 내가 싸우지 않았거든요. 놀라운 건 세상을 보는 눈도 아주 미세하게 달라졌다는 거예요. 여전히 너무나 불확실하고 불공평한 세상이지만, '미루고 도망치고 변명하는 나'가 아니라 '지켜냈기에 당당하고 믿음직한 나'와 대면하는 세상은 그래도 해볼 만하게 느껴지더군요. 똑같이 난제를 풀더라도, 내 말을 잘 수용해주는 팀원과 함께라면 덜 막막하게 느껴지듯이요.
'나와의 약속만 잘 지켜도 세상이 잔잔해진다' 마침내 내게 들려온 반박할 수 없는 명제. 저 말을 손잡이 삼아 몸을 일으켰고, 여전히 일으켜 요가원에 가고 있어요. 저 명제는 반대도 참이라서, 나와의 약속마저 미루면 잔잔하던 세상도 성을 낸다는 무시무시한 사실을 알거든요.
'살기 싫을 때'와 '죽고 싶을 때'. 언뜻 같은 말처럼 보이지만 둘 사이엔 아주 깊고 넓은 강의 흐르고 있는 것 같아요. 살기 싫은 건 욕망도 에너지도 고갈된 상태이지만 죽고 싶은 건 죽음을 욕망하는 상태라는 점에서요. 살기 싫다면서, 기어코 '살기 싫을 때'를 검색하는 건 실은 살고 싶다는 몸부림이겠죠. 다시 생의 곁으로 가고 싶은 그분께 '약속'이라는 꽤 괜찮은 징검다리를 소개해 드리고 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