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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윤아 Feb 16. 2019

안 봐도 되는 것만 안 봐도 행복해진다

호기심에 굴복해 자진해서 상처 받을 때 

책을 내고 훌쩍 떠나는 건 제 오랜 로망이었어요.  노트북 앞에 홀로 앉아 몇 달을 씨름한 스스로에게 상을 주고 싶기도 했고, 책에 대한 평가로부터 놓여나 자유롭고 싶기도 해서요. 그래서 떠났어요. 로밍도 안 하고요.

3월의 끝자락, 후쿠오카. 상상되시죠? 일부러 '플라워 샤워'를 연출한 것처럼 흩날리는 벚꽃잎들. 그 꽃잎에 취해 한껏 관대해진 사람들의 미소. 상상만 해도 완벽한 그 여행지에서 저는 미친 듯이 와이파이만 쫓아다녔어요. 너무 궁금해서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었거든요. 제 책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홍보가 잘 된 터라 읽을 것들은 넘쳐 났어요. 특히 네이버 출간 전 연재 포스팅에는 도합 1000건에 달하는 댓글이 달렸죠. 심장 박동은 빨라지고,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얼굴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수능 성적표를 받아 들 때도 이렇게는 안 떨었을 거예요. 

댓글엔 좋은 평가도 물론 있었지만, '애도 없는데 노는 거 맞지 않냐' 같은 비판적인 댓글도 꽤 있었어요. 제 기분은 댓글 하나를 읽을 때마다 무슨 아열대 기후처럼 휙휙 변했고요. 좋은 댓글을 읽고는 덩실덩실 춤까지 추면서 호텔을 나섰는데 잠시 들른 카페에서 나쁜 댓글을 기어이 발견해 내고는 입 꾹 닫고 땅만 쳐다보고 걷는 식이었죠.

그런데도 이 망할 호기심이 제어가 안 되는 거예요. '댓글 창에는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손은 자석이 붙은 것처럼 자꾸 댓글창에 끌려가는 거죠. 그렇게 2박 3일 동안 천당과 지옥을 수도 없이 오갔어요. 나중엔 멀미가 날 지경이었죠. 여행은 당연히 곤죽이 되어버렸고요. 

jtbc '스카이캐슬' 캡처.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 전에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물어야 합니다.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감당하실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돌아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호기심 때문에 다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더라고요. 휴가 중에 호기심을 못 참고 사내 단톡방을 열어 봤다가 기분을 망치기 일쑤였고요(늘 누군가가 혼나고 있었거든요), 괜히 악질 상사의 카톡 프로필 사진을 봤다가 세상 행복한 모습을 보고 더 절망하기도 했어요. 바람 난 남친 싸이월드를 몰래 찾았다 새 여친과 깨가 쏟아지는 사진을 보고 분노와 복수심에 잠을 설치기도 했고, 남친 핸드폰을 몰래 열어 봤다가 다른 여자랑 이모티콘을 주고받는(당시 제 기준에는, 이모티콘이 등장하면 최소 썸이었에요.) 걸 보고 질투와 배신감에 휩싸여 며칠을 드러누운 적도 있어요. 그렇게 판도라의 상자를 열 때마다 그 안에 숨어 있던 펀치기계에 맞고, 또 맞고, 또 맞는데도 저는 호기심을 제어하지 못했어요. 

  특히 두려움과 호기심이 만나면 파국이었어요. 선택적 인지(selective perception/보고 싶은 걸 보는 거죠) 때문이에요. 내가 두려워하는 '그 무엇'(그게 악플이든 남친의 바람 흔적이든)이 있는지 없는지를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서 더 필사적으로 '그 무엇'을 찾는 거죠. 구둣방을 찾는 사람 눈에는 구둣방이 더 잘 눈에 띄듯, 악플을 찾는 사람 눈에는 악플이 더 잘 보이고, 남친이 바람피운 흔적을 찾는 사람 눈엔 흔한 먼지도 흔적이 되는 이치죠. 가만 보니 이런 행동은, 내가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것을 작정하고 돋보기를 끼고 보는 거와 다름없더라고요. 

 이 이론이 맞다고 완전히 수긍하게 된 게 지난해 연말이었어요. 제 책이 2018년 한 해 네이버 출간 전 연재 코너에 소개된 책 400여 권 가운데 세 번째로 많은 '공감'을 받았다는 기사를 우연히 발견한 거예요. 제 기억 속엔 온통 비판과 비난과 악플뿐이었기 때문에 저 결과를 믿을 수 없었죠. 그런데 다시 보니 웬걸, 좋은 댓글이 더  많았더라고요. 악플이 두려우면서도 미치도록 궁금했던 저는, 1000개에 달하는 댓글 가운데 유독 '악플'에만 핀 조명을 켜 두고 나머지 격려의 댓글은 무심히 지나쳤더라고요. 

 '안 봐도 되는 것만 안 봐도 행복해진다' 숱한 실험 끝에 마침내 '참'임을 확인한 가설. 아이가 아무리 울고 불고 떼를 써도 엄마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칼같이 TV를 꺼버리듯이, 호기심이 아무리 아우성을 쳐도 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때로 위엄 있게 눈을 가려주기로 결심했어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세상이지만, 최소한 내가 내 눈을 질끈 감을 수는 있잖아요. 최소한 이런 것쯤은 해줘야 내가 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표현을 쓸 자격이 있지 않을까요. 

 더이상 제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지 않아요. (물론 브런치는 예외입니다ㅎ)남편의 핸드폰을 몰래 훔쳐보지도 않고요. 원망하거나 질투하는 지인의 SNS를 염탐하지도 않죠. 그것들로부터 저를 보호하기만 해도 삶이 실체 없는 바람 때문에 뒤집어지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알아버렸기 때문이에요. 

 세상은 호기심을 추앙하기 바쁘지만, 호기심은 절대 선(善)이 절대 아니에요. 오히려 호기심을 통제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절대 선에 가까운 것 같아요. '왜 결혼 안 하세요?''왜 아기를 안 가지세요?' 타인의 악의 없는 호기심에도 우리는 쉽게 상처 받듯이, 나 자신의 본능적 호기심도 나를 무참히 찌를 수 있어요. 특히 두렵고, 불안하고, 불안정할 때는 더더욱이요. 더이상 호기심이 맘대로 우리를 할퀴도록 내버려 두지 말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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