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연애 - 폴리아모리(Polyamory)
질투심과 소유욕은 인류가 가진 본능적 욕구에 해당한다.
갓난아기의 손에 쥐고 있는 장난감을 빼앗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아기는 그 자리에서 울기 시작한다. 인지능력이 발달하기 전인 신생아 조차 사물에 대한 소유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과연 인류는 언제부터 소유욕을 가지기 시작한 것일까? 일부 진화심리학자들은 질투심과 소유욕이 농경사회 이후에 발달한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수렵 사회가 끝나고, 인류가 한 곳에 정착하여 농업과 가축을 시작하는 농경사회에서 모든 폭력성과, 질투, 소유욕이라는 감정이 더욱 발달되었을 것이라 말한다.
이웃의 습격으로 목초지를 잃게 된다는 것은 곧 생사로 직결되는 문제기 때문에 자신의 영토와 가축을 빼앗기지 않으려 폭력적이어야 했다.
문명의 발달과 함께 인간의 폭력성을 줄이기 위해 뒤늦게 사회적 틀이 구성되고 일부일처제도를 도입하며 인류는 곧 인간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기 시작했다.
문득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서 수렵채집인 이야기가 떠올라 나는 바로 책을 뒤적거렸다. 어쩌면 질투심과 소유욕을 수렵 사회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면 또 다른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싶어 간략히 요약해 보았다.
⎾ 농경사회 이전의 수렵 사회를 들여다보면 공동체라는 개념이 강하다. 당시 수렵채집인 무리의 여성은 동시에 여러 명의 남자와 성관계를 하며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여성의 자궁에 한 남자의 정자가 아니라 여러 남자의 정자가 축적되기 때문에 좋은 엄마라면 반드시 여러 남자들과 성관계를 하도록 애쓰며 자신의 아이가 건강하고 튼튼하게 태어나 공동체의 보살핌을 받고 자랄 수 있도록 노력했다.
공동체 성인들은 누가 자신의 친 자식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 채 모두의 자식이 되었기 때문에 아이에게 공평하게 관심을 나타냈다.
그래서 오늘날 높은 이혼율과 사람들이 겪는 갖가지 심리적 콤플렉스들이 어디에 연원을 두고 있을까 물었을 때 진화심리학자들은 "고대 공동체" 이론에 의해 인간에게 핵가족 혹은 일부일처의 시스템은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석기시대 때의 DNA가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는가? 묻자 진화학자들은 고칼로리 음식에 빗대어 설명을 했다.
당시 수렵채집인이 먹을 수 있는 달콤한 식품은 과일밖에 없었다. 과일을 발견한 수렵채집인들은 지금 먹지 않으면 썩거나, 다른 동물들이 먹어버릴 테니 그 자리에서 과일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을 것이다.
현대사회의 우리 모습을 보자. 냉장고에 음식이 넘쳐나지만 아이스크림을 발견하면 배가 고프지 않음에도 한 숟갈 떠먹고 후에 콜라로 입가심까지 하는 우리의 모습은 수렵채집인들이 게걸스럽게 달콤한 음식을 한자리에서 끝낸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농경사회 때 발달된 소유욕과 질투심 그리고 수렵채집 때 발달한 공동체의식 이 두 양상이 모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다자 연애를 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수렵 사회 때 발달한 DNA가 더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폴리아모리스트(Polyamorist) 는 질투심과 소유욕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다자 연애자들은 어떻게 이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시키는 것일까?
다자연애주의자, 그들도 사람인데 당연히 질투심과 소유욕을 느끼고 그것을 당연한 일이라 생각한다. 다만 그들이 질투심과 소유욕 이라는 감정을 이해하고 해소하는 부분이 그들과 대화를 하며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인격체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
내가 진정 누군가를 최선을 다해 사랑해도 그 상대는 단 한 번도, 단 한순간도 온전히 내 것이었던 적이 없었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 소유욕을 해방시킨다.
질투심이라는 감정은 본인 안에 내재하는 감정이지, 이 감정을 상대의 탓으로 돌릴 수 없다.
예를 들어, 어느 날 연인이 다른 사람과 데이트를 하고 잠자리를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꼭지가 돌아버렸다. 한 없이 사랑스러웠던 연인을 순식간에 괴물로 취급하며 화를 낸다. 질투와 소유욕(배신감)이라는 감정이 나를 사로잡는다.
하지만 이 감정들은 나에게 내재된 감정이기 때문에 연인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게다가 질투심이라는 감정은 굉장히 주관적이라, 똑같은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큰 크기의 질투심을 느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작은 크기의 질투심을, 누군가는 전혀 느끼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다자연애주의자야말로 자신의 사랑방식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한편으론 무소유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놀라곤 한다.
누군가는 이들을 한 사람에게 헌신할 줄 모르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기에 쉽게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난다 생각한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저 어마어마한 감정을 컨트롤하기 위해 매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일대일 연애주의자들을 모르고 있다.
모노가미스트는 바람을 피우지 않으려 엄청난 절제심을 발휘한다. 그들은 매력적인 상대가 나타나도 한 순간의 실수로 지금까지 견고하게 지켜온 연인과의 관계를 망치고,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 주지 않으려 감정을 억누른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임을 인지한다.
폴리아모리스트는 연인이 다른 파트너를 만날 때마다 느끼는 질투와 소유욕을 억누르려 절제심을 발휘한다.
자신의 연인은 다른 매력적인 상대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고, 그렇다고 해서 연인관계가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더불어 질투와 소유욕이라는 감정을 본인이 받을 수도 있지만, 사랑하는 연인에게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두 사람 간의 진솔하고 충분한 대화를 시도함으로써 계속해서 연인의 질투심을 해소시켜주는 노력을 해나가야 한다.
일대일 연애방식과 다자 연애방식 무엇이 옳다 그르다 말할 수가 없다. 두 가지 연애 방식 나름대로 고충이 존재한다.
나는 내가 시도하려는 다자 연애방식에 관해 종종 지인들과 대화를 나누곤 한다. 그중 절친 언니의 말이 마음에 상처가 되었는데 언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네가 시도하려고 하는 의도는 알겠는데, 그것이 건강하고 좋은 관계인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볼 때 그건 이치에 맞지 않아."
대화 도중 나도 감정이 섞여 말이 거칠게 나갔다.
"언니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잖아? 게다가 건강하고 좋은 관계는 어디까지나 언니의 기준일 뿐이지 내 기준이 될 수는 없어. 언니의 모노가미식 연애(일대일 독점적 연애)가 건강하고 좋은 관계라서, 그래서 한 사람에게 헌신하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완성이라면! 언니의 결혼생활은 왜 그렇게 끝이 났어?"
말해 놓고 나도 아차 싶었다. 이혼녀라는 타이틀에 언니가 상처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감정이 먼저 앞서버렸다. 내가 사과를 하려고 급하게 말을 꺼내려고 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깔깔 웃는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니 말도 일리 있다. 그렇네, 그렇게 죽고 못 살 것처럼 봐온 커플들도 나중에 바람 펴서 이혼하니 어쩌니 하는 얘기 들어보면 세상 참 정답은 없는 거다. 그리고 결혼생활 오래 한 커플 중에 바람 한번 안 펴봤다는 커플들도 잘 못 본 것 같다. 그래도 난 이효리네 사는 거 보면 부럽더라."
통화가 끝날쯤 우리는 효리네 민박집 프로그램 이야기에서 이효리의 결혼생활 이야기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새삼 다시 미디어가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무서운지 깨달았다. 이효리 이상순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그것이 모든 이들의 롤모델이 되어 다자 연애방식이 언니의 말처럼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개념을 집어넣게 되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