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elly Yoon Apr 21. 2024

서로가 가까워지는 거리

로맨틱 스트릿





오랜만의 휴일이었다. 쇼핑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유난히 청명한 하늘이 긴 겨울이 끝났음을 알렸다. 저녁 계획을 묻는 그의 문자에 특별한 일은 없다고 했다.


'쇼핑 잘했어? 밖에서 간단히 술 마시고 집에서 와인 마시며 영화보지 않을래?'


‘시간 장소 보내줘.’






그를 기다리는 펍(Pub)에서 인간 여자에 대해, 나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해 봤다. 성욕을 해소하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여자나 남자나 공통된 분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유난히 내가 성적 욕망이 강한 부류의 인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째서 여자의 성욕은 수치스럽고 터부시되어야 하며, 남자의 성욕은 자신감을 드러내는 마초의 상징으로 부여되는 것인가.


나는 분명 그와 하는 섹스가 좋다. 감정과 정서적인 교류가 없으면 좋은 섹스도 없다고 말하던 친구가 있었다.


공감한다. 여자라는 동물은 신체적 본능보다 감각적 본능이 뛰어나니까. 신체의 연약함을 대체할 수 있는 도구로 감각이 진화해 왔으니까.



우리는 바에 앉아 모히토와 코스뮬을 마셨다. 분위기를 잘 이끄는 그는 여전히 자신의 영화와 스케줄에 관해 이야기했고, 내가 쓰고 있는 글에 대해 물었다. 숱하게 보낸 밤. 우리에겐 왜 정서적 교감이 없을까 생각해 보니 언어와 문화의 장벽이라는 것이 너무 컸다.


어디 가서 영어 못한다는 소리는 안 듣는 나임에도 유독 이 사람 앞에서는 영어가 어버버 돼버린다. 그도 그럴 것이 외국인 친구가 한 명도 없는 그는 내 악센트를 어려워하기도 했다.


술을 마시다 리큐르스토어 (Liqure stores)가 문을 닫기 전에 서둘러 와인 한 병을 구매했다. 추천받은 와인을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거리에서 그가 물었다.



"키스하고 갈까?"


"여기서? 여기 지금 대로변 사거리거든?"



눈을 흘기며 그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이 지척에 와 있었다. 짧게 입술만 마주쳤다 떨어지는 그가 다시 물었다.



"공공장소에서 하는 거 싫어해?"


"꼭, 그렇지는 않은데. 밖에서 키스하는 건 좀 부끄러워."



횡단보도를 건너고 골목에 들어섰다. 갈림길에서 그가 로맨틱한 스트릿으로 걸어가자 라는 말에 나는 재빨리 거리명을 확인했다.


문자 그대로 Romance Street 이 존재하는 줄 알았던 나는 '그런 거리명이 아니잖아!'라고 소리쳤다. 그는 우리가 걸으면 Romance Street이 되는 거라며 웃었다. 어처구니없기도 했고, 귀엽기도 해서 나는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때마침 맑은 하늘엔 별이 떠 있었다. 봄을 맞은 이곳의 나무들은 꽃잎을 활짝 피웠고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말했다.



"꽃 핀 것 봐. 진짜 이쁘다. 오늘은 별도 보이네. 응. 로맨틱한 거리네."


"것봐, 내가 말했잖아. 이 거리는 로맨틱하다고."



그의 얼굴이 다시 코앞까지 다가왔다. 술기운인가. 어렵기만 했던 그가 조금 편해졌다. 조급함도 사라졌다.


그는 내가 먼저 키스해주길 기대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서로의 코 끝이 닿았다. 숨결이 인중 사이로 오고 간다. 나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네가 와. 난 오늘 조급하지 않거든.


그의 눈이 감기는가 싶더니 입술 위로 따듯함이 전해졌다. 우리는 로맨틱하다고 이름 붙인 거리에서 짧지도 길지도 않은 키스를 마치고 다시 길을 걸었다.



"키스 한 번에 이렇게 될 줄 몰랐어. 걷는 게 너무 불편해."


"농담치 지마."


"진짜야 만져봐."


"야, 나 공공장소에서 안 만질 거거든?"


"진짜라니까?"



나를 끌어안고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내 손을 앞섭에 가져가는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나쁜 남자의 이미지가 귀엽게 탈 바꿈 하는 순간이었다.


집에 도착한 우리는 사들고 온 와인을 마시고, 재미없는 영화를 보고, 조금 더 대화를 하고, 서로를 끌어안고, 정말 안고서 잠이 들었다.







여전히 우리 두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거리가 있었다. 우리의 관계는 여기까지. 쓸데없는 곳에 감정소비하지 말고 서로를 지켜보는 거리. 그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로맨틱한 거리에서 그가 내게 다가왔을 때. 그의 농담과 노랫소리가, 나의 웃음이 거리를 채웠을 때. 손을 잡고, 걷고, 뛰고, 끌어안으며 거리를 활보했을 때.


한 밤중 로맨틱한 거리를 걸었던 우리는.

조심스럽게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별의 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