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일럿 Oct 04. 2024

여성 발표자로 초대된 날

10년 전엔 여자라서 거절당했지만, 지금은 연사로 초대받았다.

갑자기 쿠알라룸푸르 (말레이시아, KL) 출장이 잡혔다. 행사 날짜 이틀 전에 출장 요청을 받았고, 게다가 그 주 주말에 내 결혼식을 앞두고 있었다. 스위스에서 오는 남편 가족들과 같이 한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발표만 끝내고 바로 또 싱가포르로 날아와야 해서 한 번 고사했었는데, 그래도 내가 사는 싱가포르와 출장지인 KL은 비행기로 한 시간 거리인 데다, 왜 내가 발표하는 게 좋은지에 대한 팀장님의 설명을 듣고 행사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번 출장이 갑작스레 결정된 이유는 우리 회사에서 주최하는 행사에서 발표 및 패널 토론에 참석하는 연사들 중 여자가 한 명도 없어서였다. 물론 발표 내용이 내가 평소에 다루는 주제여서, 내가 발표하는 게 적절하긴 했지만, 성별 때문에 발표자가 바뀐 걸 경험한 적은 처음이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험은 있다. 대학교 때 해운 관련 해외 연수 프로그램에 지원한 적이 있다. 학과 성적, 공인 영어 성적, 그리고 면접을 통해서 점수가 매겨지고, 가장 높은 종합 점수를 받은 2명이 장학금 지원을 받고 미국 대학으로 교환학생을 가는 프로그램이었다. 지원자들 중 종합 점수가 1등이라며, 면접에 참여하셨던 교수님께 축하한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에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날 기숙사 동기들에게 치킨을 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몇 주 후, 나를 제외한 다른 학생 2명이 합격한 것으로 공식 발표가 났다. 너무 당황했다. 치킨도 쐈는데... 학과 교수님께 문의했더니, 학교 측에서도 장학 재단으로부터 일방적으로 통보받은 상황이라 왜 종합 점수대로 결정되지 않았는지 문의한 상황이라고 하셨다. 장학 단체에서 밝혀온 이유는 '여학생들은 지원해줘 봤자, 해운 관련된 진로로 나가지 않는 경우가 많기에, 업계에 기여할 가능성이 많은 남학생들을 지원해 주는 게 장학 제도의 취지에 더 적합해서'였다.



이게 진짜 이유인지는 알 수 없다. 왜냐면, 정말 여학생을 해외연수에 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애초부터 여학생 지원을 안 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 밝힐 수 없는 다른 선택 기준이 있어, 성별을 표면적인 이유로 밝힌 것은 아닐까? 진짜 이유가 뭐든 간에 나에겐 상관없긴 하지만 말이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예전엔 이런 일이 생겨도 학교에서 크게 문제 삼지 않았고, 나 조차도 그 이유를 그냥 수긍했다. 그저, 기숙사 동기들과 떠들썩하게 치킨 먹으면서 미국에 간다고 했는데, 이걸 다시 어떻게 설명하지? 바보 같게도 이런 걸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출처: OECD, 2022




지금도 여성 인권은 중요한 사회 문제이고, 특히 한국은 OECD 국가들 중 성별 간 임금격차 1위로, 2위인 일본과도 현저한 격차를 보이고 있다. 그래도 며칠 전 내가 여성 발표자로 행사에 초대돼서 발표하고 온 것을 보면, 그래도 우리 사회가 조금씩이나마 올바른 방향으로 변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컨텐츠가 동일하다면, 이왕이면 우리 단체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방법을 택하는 회사의 방향도 마음에 든다. 그 다양성은 성별이 될 수도 있고, 국적이나 인종이 될 수도 있고, 문화가 될 수도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왜 글을 쓰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