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eed Enabler
Apr 02. 2023
이렇게 와닿을 줄이야
나도 벗어날 수 없는 우물가의 말
'말을 우물 가로 데려갈 순 없어도, 물을 먹일 수는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
뜻을 살펴보면, 물을 먹는 것 자체는 말이니, 스스로 먹고 싶은 말의 마음이 있어야 물을 먹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와 어른들 교육을 하면서 느낀 아쉬움 중 하나는 '물 먹기'였다. 바로 꼴깍 넘기기만 하면 되는 환경과 조건을 제공받고도 그 '꼴깍'이 안되기 일쑤였다.
나름의 나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들인 인풋의 아쉬움보다, 그 아웃풋 아니 그 시도조차 없는 경우가 허다하니 대체 내 역량의 무엇이 문제인지 파고들며, 효능감 역시 떨어지곤 했다.
돌이켜 보면 난 항상 그것이 궁금했다.
자발적 동기를 어떻게 만드는지, 어떻게 하면 '스스로 물먹기'가 되는지... 최근 몇 개의 사건들을 겪으며, 환경과 조건의 제공이란 무엇인지 생각할 기회가 있었다.
아이가 피아노를 친지 어느덧 4년이 넘어가는데, 이렇게 늘지 않는 케이스도 드물 것이다.
익히는 속도를 보면, 학원을 챌린지 해야 하는 건지, 정말 1도 없는 재능에 포기를 해야 하는 건지 학원비를 결재할 때마다 고민의 기로에 있었다.
그럼에도 4년 넘게 배웠던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피아노 치며 노래 부르는 정말이지 가끔 가는 시간은 그 만의 스트레스 해소 방식으로 이해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이제 끊자'라고 하면 나름 배움의 시간을 끊어내는 불안감에 '절대 안 돼'를 사수하는 당사자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그 녀석은 피아노 학원 빼먹기를 즐겼다.
"당분간 좀 쉴까? 아주 잠깐 쉬어보는 거야. 그럼 시간 여유도 더 생길 거야"라는 우회술에 아이는 애증의 시간을 끊어냈다.
기술을 익히는 4년의 시간도, 집에 떡하니 있는 작년에 산 새 피아노도 아까웠는데, 아무리 봐도 저 녀석의 자발적 연습을 기대하기란 감나무에서 감이 저절로 떨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피아노 비용을 본인의 비상금으로 산 남편은 썩어갈 피아노가 안타까웠나 보다. 서치를 하더니 피아노 배우기 앱을 찾아, 아이에게 슬쩍 들이밀며, 7일 무료버전이라며 엄청 재밌다고 꼬셔대었다.
근데, 그 앱이 아이의 무엇을 자극했는지, 그 심드렁하던 녀석이 하루종일 피아노를 치더니 급기야 7일 후 유료가 되었을 때, 1년 치를 구독하고 싶다는 요구를 했다.
가시적인 진도와 다양한 노래 음악, 틀려도 지적 없는 자유로움이 마치 피아노 게임을 즐기는 기분이었을까?
그 앱의 1년 구독권은 무려 18만 원이었다.
'응?' 아무리 봐도 1년 동안 그 녀석은 18만 원어치의 'playing'을 할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안된다 하기에는 녀석은 절실했고, 4년 동안 숨겨져 있던 절실함이 갑자기 터진 듯, 본인 돈으로 결재하겠다고 나를 푸시했다.
이건 엄청난 일임에 틀림없었다. 부모님의 생일 선물도 하루 차이라는 빌미로, 과자 박스 하나 주고 나눠먹으라는 자린고비가 거금 18만 원을 투입한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나는 일말의 부모 마음으로, 아이에게 '선결제, 페이백 시스템'을 제안했고, 우리는 아래와 같은 계약서를 썼다.
1. 우선 아이의 용돈으로 18만 원을 지불하고 1년 치를 구독권을 산다.
2. 일주일 동안 아이가 정한 시간의 양을 달성하기를 3개월 유지하면 1차로 6만 원을 부모님이 페이백해 준다.
3. 다음 3개월을 유지하면 2차로 6만 원을 부모님이 페이백 해주고, 그다음 3개월을 유지하면 3차 6만 원 페이백을 해준다.
4. 총 9개월간 꾸준히 유지했을 때 18만 원이 페이백 되고, 나머지 3개월은 서비스다.
5. 추가로 18만 원의 용돈은 일주일간 집안일을 하고 받은 3천 원으로 꼬박 충당한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그동안 피아노 학원비로 한 달 지불한 14만 원의 그 피곤하고, 가기 싫은 시간이 '아이고 좀 쉬어라. 많이 했다'라는 만류가 나올 만큼 사수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방식의 형태가 바뀌고, 선택의 범위가 달라지니 아이는 스스로 물먹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을 통해 얻은 발견은 내 기준과 내 경험에 의한 방식이 아닌, 그가 느낄 수 있는 그 만의 흥미와 눈높이의 제공이 이루고 싶은 절실함과 시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변화 의지 스위치는 변화의 이유와 해 나가는 방식이 '그'의 시야 안에 들어와야 켜진다.
그 안에서 조명의 밝기처럼 변화의 정도도 '그'가 결정하는 것이다.
마치 목마른 이의 눈에 우물이 보이고, 내가 목이 마르구나를 인식할 때, 먹는 것과 먹을 양을 결정하게 된다.
뒤집어보면 연구와 활동의 아쉬움 속에 '그럼 먹고 싶을 때까지, 보일 때까지 기다리지'의 나의 자세 역시도, 내 시야 안의 것만 보겠다는 목 안 마른 자의 모습과 같음을 느꼈다.
어떻게 하면 '그'의 입장과 눈높이에서 우물을 보이고, 필요성을 인식하게 하고, 시도하게 할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나를 스스로 물먹는 말이 되도록 할 것이다.
결국은 이 일들도, 나부터 잘해야 하는구나! 를 깨닫는 삶의 가르침이었음을...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