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eed Enabler
Aug 27. 2023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부모가 아이에게 바라는 부분 중 하나가 자발성, 혹은 주도성이다. 동료 부모들과의 대화에서 빠지지 않는 이슈기도 하다.
자발성이란 단어를 통해 부모가 원하는 것은 스스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구상하여, 촉발시키며 결정하고 행동하는 행위이다. 대게는 그것이 공부이다.
부모는 아이에게 (사실 그것이 몇 살인 상태이든)이 역량이 길러지길 바란다.
예전 세대의 부모는 아이가 자발성이 스스로 탄생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아니 기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의 중년 이상 어른들은 체벌을 받고 자라기도 했고, 지금은 많이 판매되지 않지만 그 시기엔 거의 모든 집에 비치되어 있던 훈육 물건이 하나 있기도 했다. 일명 파리채라고...
시간이 흘러 부모들은 이전 세대 대비 양육에 대한 교육을 받게 되었고, 책도 읽고, 듣기도 하면서 더 이상의 체벌이 아닌 공감, 이해, 인정으로 아이가 알을 깨고 나올 때를 엄청난 인내로 기다리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엄마는 늘 혀를 차신다.
그런데 그 자발성이란 것이 정말 거대하고, 번접하기 어려운 얘기인 것에 다들 동감할까?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야겠다 맘을 먹었던 때, 특히 그것이 배움과 연결되었던 때는 내 경우에는 불혹이 넘어서였다. 그리고 불혹에 접한 그 역량은 참으로 귀한 것이었다.
나는 아이가 이 역량을 갖추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귀에 딱지가 앉도록 자발성을 강조한다. 스스로 결정해야 하고 스스로 공부해라. 하지만 이 작은 크리에이쳐는 내가 원하는 자발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나는 아이가 결정해야 하는 사항에 대한 이슈를 수면 위로 띄어놓고, 아이가 결정하기만을 기다린다.
마치 찌를 껴서 물속이 던져놓고, 안보는 척 고요히 기다리며 "물고기야 제발 자발적으로 이 찌를 물어보려무나" 애원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예전에 누군가 들려준 얘기가 있었는데, 8살 아이에게 문제집을 풀라고 정해주고, 엄마는 외출을 하고 돌아왔다. 귀가 후 아이의 문제집을 살펴보니 이상한 기색이 역력했다. 엄마의 채근에 아이는 답안을 보고 푼 사실을 털어놨고, 화가 나고 실망한 엄마는 아빠를 소환해 하소연을 했다.
"답지는 어디에 놓여있었지?" 답지는 문제집과 함께 책상에 놓여있었다.
이것은 옳은 시스템이라고 볼 수 없다.
가뜩이나 공부보다는 놀이가 좋은 아이를 굳이 쓸데없이 시험에 두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답지와 문제집이 함께 있는 시스템은 낚시 놀이와 유사하다.
그러한 측면에서 자발성도 다르게 볼 수 있을까,
그 나이 또래의 아이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자발성 혹은 아이가 발휘하고 싶은 영역의 자발성은 제외 한 채, 내가 기억하는, 최근 업데이트된 자발성의 기준을 아이에게 들이밀며, 도달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나'의 마음이 시험의 마음인지, 믿음의 마음인지 우리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오늘 이 시점에도 나를 비롯한 동료 부모들이 아이에게 통제를 가할 것인지, 자발성으로 기다릴 것인지를 고민한다.
하지만 이것이 꼭 이분적 방법으로만 바라볼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내가 원하는 자발성의 정도 - 아이가 발휘할 수 있는 자발성의 정도 사이의 갭을 인식하고, 그것이 시냇물 넓이인지, 저수지인지 혹은 강물인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저수지나 강물은 아이가 스스로 건널 수가 없고, 한 번에 건널 수도 없다. 우리 아이가 건널 수 있는 보폭의 크기가 얼마 일지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지금 건널 수 있는 보폭과 갭의 크기 없이 아이가 건너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자비 없는 시험이란 생각이 든다. 그 갭을 건널 수 있게 애타게 손 내미는 아이에게 어떤 징검다리를 놓아줘야 하는지가 자발성에 대한 부모의 과제란 생각이 든다.
오늘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는데, 어쩌면 나는 아이의 자발성에 기대며, 감나무에서 감이 내 입으로 떨어지기를 고대하는 양심 없는 이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마무리하며 나는 사랑하는 내 아이에게 어떤 크기의 넛지가 필요한지, 나는 그것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발견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