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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략가K Feb 28. 2017

#4. 후마윤과 니자무딘의 무덤 그리고 실망스러운 칸

본격적 인도 델리 여행 이야기

  온갖 사기와 무거운 배낭이 나의 여행을 방해할지라도 난 계속해서 여행을 이어나갔다. 오전 11시쯤이 되어서야 후마윤의 무덤에 도착하였다. 사실 후마윤의 무덤, 타지마할, 이티마드우드 다울라 등 많은 무슬림 양식을 볼 수 있다. 비슷한 구조와 비슷한 양식 그리고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의 내재와 다른 무슬림 양식과 다른게 있다고 한다면 인도인의 공원 같은 역할을 하기도 하는 거 같다.


 후마윤의 무덤에 도착하여 메인 게이트까지 다다르는 길까지의 양쪽 공터에서는 많은 현지인들의 국민 스포츠인 크리켓을 즐기고 있었다. 야구와 비슷한 크리켓은 원래 영국의 국기이지만 영국의 식민지 역사를 갖고 있는 인도인에게 많이 전파된 스포츠이고 영국, 호주, 뉴질랜드, 파키스탄, 남아프리카, 스코틀랜드 등 영국의 영향을 조금이라도 받은 국가는 크리켓을 즐긴다. 인도 여행을 하다 보면 심심치 않게 골목에서 배트와 공 만으로도 즐기는 인도인들이 있었다.

내가 이구역의 크리켓의 주인공이야
후마윤 무덤 앞의 크리켓 플레이어들

 마치 후마윤의 무덤 앞에 공터는 마치 내가 어렸을 적 점심 먹고 축구하던 학교 운동장과 비슷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의 웬만한 학생들이 점심만 먹고 운동하러 나와서 축구를 하는데 동시에 한 운동장에서 몇 경기가 이뤄지는지 알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때론 운동장에 22명만 댕그라니남아 11:11 축구를 하는 것이 어색할 정도로 많은 인원들이 작은 축구장에서 부대끼며 서로의 리그에 참가하고 있었고 축구선수와 월드컵에 대한 동경을 갖고 순간 모든 플레이에 전부를 걸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와 같이 인도인에게는 크리켓이 어릴 적 갖을 수 있는 최고의 동경이 아닌가 싶다. 내가 축구를 생각하고 좋아하는 과정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인도인이 크리켓을 좋아하게 되는 과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였다. 방과 후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하기를 즐겼으며 심지어 골목길에서 가상의 골대를 만들어놓고 축구를 하기도 좋아했다. 국가대표 경기라도 본 다음 날엔 골을 넣은 대표선수의 이름을 기억하였다가 다음날 그 선수의 이름을 부르면서 공을 찼던 것처럼 크리켓 타석에 들어서 스윙을 하는 인도들은 그들 선수의 가슴에 새긴 채 방망이를 휘두르며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의 폼을 고대로 따라 하며 공을 던지는 것은 일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자아실현의 첫 단계라고 생각한다. 여긴 그들만의 리그가 열리는 곳이었다.


  인도인들의 크리켓 하는 움직이는 경치를 바라보며 내 어렸을 적 축구에 대한 동경에 대한 감상에 빠졌다. 정신을 차리고 헤어 나오던 순간 후마윤 무덤에 들어서는 문에 도착했다.

  후마윤의 무덤은 무굴제국의 2대 황제인 후마윤의 무덤으로, 페르시아 출신인 그의 부인 하지 베굼 Haji Begum의 지시에 따라 1565년 건설됐다.
  설계자는 페르시아 출신의 건축가인 미락 미르자기야스 Mirak Miraz Ghiyas인데, 그는 페르시아 건축의 기본적인 틀을 창조적으로 변형, 무굴양식이라는 새로운 건축기법을 탄생시켰다. 참고로 후마윤의 무덤은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건축과 구별되는 무굴 양식 최초의 건물이라는 평을 얻고 있는데, 후마윤의 무덤으로 시작된 무굴 건축은 90년 후 따지마할로 그 절정에 이르게 된다.
  후마윤의 무덤으로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탁 트인 개방감이나, '田 '모양을 이룬 뒤 다시 수많은 작은 정사각형으로 쪼개지는 정원의 형태, 완벽한 좌우대칭은 따지마할과 거의 같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후마윤의 무덤 등 무굴 양식에서 보이는 이런 정원 양식은 이슬람교도들의 낙원 사상을 품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슬람교는 사막에 서 발생한 종교다 보니, 사방에서 흐르는 물의 존재야말로 낙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덤의 주인공인 후마윤 외에도 그의 부인인 하지 베굼, 무굴의 마지막 황제 자리를 놓고 아우랑제브와 격돌했던 샤자한의 장남 다라시코 Dara Shikoh등도 여기에 묻혀있다고 한다.
  전명윤,김영남,주종원,[프렌즈 인도.네팔 '14~'15 개정판],중앙books,145
가까이서 바라본 후나윤의 무덤

  후마윤의 무덤의 중앙 무덤을 돌고 있을 때,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의 옷차림을 볼 수 있었다. 한국 어머니의 옷차림이라고 해 봤자. 알록달록한 아웃도어의 차림이었다. 예전에 캄보디아를여행할 때, 캄보디아인이었던 내 뚝오토바이에 마차를 연결한 교통수단)의 기사였던 라샥은 한국인과 중국인 그리고 일본인을 잘 구분해 낼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옷차림이었다. 특히나 대한민국의 중장년층의 옷차림은 활동성이 좋은 등산복, 특히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선호하여 많이 입고 다녔었고 그런 옷차림으로 캄보디아인 라샥은 한국사람이라고 구분해 내었다. 후마윤 무덤에서도 친숙한 어머니의 옷차림을 한 50대 경으로 보이는 어머니에게 당연히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그 어머니는 한국말로 인사를 받아주었고 서로 한국인이라는 반가움에 몇 마디 주고받았다.


 어머님 혼자 여행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니었다. 아버님과 같이 하시는 여행이, 패키지여행이 아닌 두 분만 하시고 계시는 배낭여행이라는 것이다. 놀랐다. 그리고 두 분이 너무나 아름다운 커플처럼 보였다. 나이 들어서 이러한 탐험적인 여행을 같이 하다니.. 심지어 어머니는 계단을 오르내리실 때 다리가 불편했는지 조금 절둑이셨지만 먼저 내려가신 아버님은 그런 어머님을 먼저 내려가서 지켜봐 드리면서 기다리고 계신다. 백년가약을 맺은 상대방과 이렇게 멀고 험난한 인도 여행(나중에 들어보니 네팔 여행을 하시고 인도로 오셨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내 미래의 모습에도 이 두 장년층 커플처럼 한 장면을 그리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축구를 동경하던 과거부터 미래엔 꼭 사랑하는 사람, 부부의 연을 맺은 사람과 반드시 여행을 하기로 다짐했던 이 후마윤 무덤에서 내 어린 시절과 미래를 모두 그려볼 수 있었다. 무덤이라는 말은 다소 한국인들에게는 사람이 죽어 묻힌 곳으로 해석 할 수 있지만 후마윤 무덤 만큼은 과거 동경과 미래의 꿈을 연결해준 하나의 브릿지였다.


 후마윤 무덤의 정문을 나와 걸어서 골목골목 사이로 올라가면 인도식 면사포와 니자무딘에게 헌화할 수 있는 꽃 접시 등을 구매 할 수 있는 상점 사이의 끝에 니자무딘의 무덤이 있다.


  그 사이사이를 올라가면서 꽃을 사라는 사람과 면사포를 사라는 사람들의 권유에도 이제 내가 살 리가 있나? 니자무딘에서는 신발을 벗어야 한다면서 신발을 맡기라고 하는데 맡기고 올라가라고 권유했다. 물론 공짜로써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 또 속을 리가 있나?


  수피교의 성자이다. 수피교가 이슬람교의 종파로 정확히는 뭔지 모르겠지만 그는 자기의 욕망을 비롯한 세속적 추구로부터의 포기를 강조하면서 특히, 종교적 차이로 인한 무자비한 학살, 귀족화되어 물질을 탐하는 지도제에게도 비판을 가했다. 그래서 어느 종교보다도 힌두교와 교류가 있었고, 힌두교 종파의 탄생에도 큰 기여를 하여 아직 힌두교의 나라 인도에서도 계속해서 그의 뜻을 이어 나가고 있다.

  지금 현대의 많은 종교가 부대끼며 갈등을 겪는 사회에 어떤 종교를 믿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종교든 해당 종교를 믿는 진실한 태도를 강조했었던 것이다.

  니자무딘이 살던 시대를 역사학자들은 델리 술탄왕조 시기라고 부릅니다. 이 시기는 약 310년간, 무려 다섯개의 왕조가 명망했습니다. 즉, 한 왕조의 평균 통치 기간이 60년에 불과할 정도로 짧았다는 이야기죠.

니자무든은 92살까지 살았는데, 덕분에 그는 노예 왕조, 힐지 왕조, 투글라크 왕조 등 3개의 왕조 아래서 살았습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니자무딘의 말년, 즉 투글라크 왕조 시절입니다.

투글라크 왕조의 1대술탄인 기야스 웃 딘 투글라크 Ghiyas ud din Tudhlaq는 제국의 새 수도 투글라따바드를 오늘날 뉴델리 구역에 건설합니다.

왕조를 성립되면 가장 중요한 건? 네. 민심수습입낟. 종교국가 인도에서 기야스 웃 딘은 민심수습책의 일환으로 하는 것이 초대형 모스크를 건립합니다. 바로 민중들이 의지하는 성자 니자무딘에게 잘 보이려는 거였죠.

하지만 기야스 웃 딘의 모스크 건설은 일종의 쇼였습니다. 모스크 건설로 책정된 자금과 인력을 몰래 빼내 자기의 왕궁을 짓는데 여념이 없었죠.

  니자무딘이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격분, 대중을 기만하는 나쁜 지도자에 맞서 일종의 시국선언을 합니다. '새로 세우는 도시는 양치기들에게 이용될 것이다!'

당시 정복 전쟁 중이던 기야스 웃 딘은 니자무딘의 시국선언을 듣고, 군대를 돌려 니자무딘을 죽이기 귀해 델리로 진군했다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니자무딘이 한마디 하죠. '딜리 두르 아스트(델리는 겁나게 멀지).' 그리고 이 말처럼 기야스 웃 딘은 델리로 오기 전 측극에 의해 암살되며, 길고 긴 말싸움은 결국 니자문딘의 승리로 끝납니다.

딜리두르 아스트, 혹은 딜리 두르헤라는 말은 현재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속담 중 하나로 쓰이고 있답니다. ... 중략

전명윤,김영남,주종원,[프렌즈 인도.네팔 '14~'5 개정판], 중앙books(2014), 146
니자무딘의 무덤

  기대를 했던 거와는 달리 니자무딘의 무덤은 소박하였다. 단촐한 건물안에는 중앙에 겹겹이 쌓인 사포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도드린 모습을 보였다. 옆에 있는 현지 기도를 드리는 사람에게 “니자무딘?” 이라고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힌디어를 사용하였다. 그의 대답은 힌디어가 아닌 고개의 끄덕임이었지만 속으로 ‘진짜?’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1325년에 타개하신 니자무딘은 이곳에서 690년이나 대중들과 친숙하게 아직까지 인도인의 마음에 살아계신다.   

  

  춥게 느껴질 인도의 겨울에 인도인들은 그가 추울까봐 면사포위에 또 면사포를 덮고 꽃잎을 뿌리고 그렇게 690년을 이렇게 계셨다. 믿기지 않은 상황도 잠시, 같이 가신 어머님과 아버님과 함께 니자무딘 무덤을 나왔다.

이 면사포 아래는 690년 동안 니자무딘이 계신 곳

 니자무딘 무덤을 나와 나의 여행을 방해받지 않고 싶어서였을까? 같이 이동하자는 후마윤 무덤에서 만난 아버님과 어머님의 호의를 뿌리치고 나는 스스로 칸 마켓으로 이동했다.  커피빈이라는 세계적으로 고급적인 커피 프랜차이즈가 있을 정도로 세련될 마켓으로 불렸지만 한국의 수많은 대도시와 번화가를 보고 자란  나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보통 인도의 거리보다는 깨끗한 면이 보이기 하였으나, 인상적으로 마켓의 분위기를 느끼거나 하기엔 조금 부족해 보였다.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많은 실망감을 주었다.

칸마켓의 골목 일부


  칸마켓에서 거리를 조금 돌다가 오후 2시가 조금 넘었다. 아침을 거르고 걷는 델리에서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했다. 사실 나는 길거리에서 아무데서나 먹기가 조금 힘들었다. 아직도 더러운 거리의 인도, 길거리 아무데서나 먹으면 배탈이 난다라는 선입견을 갖고 여행 중이었다. 그나마 칸 마켓의 몇 개의 레스토랑이 깔끔해 보였고 제대로 조리되는 음식을 먹고 싶었다.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조금 고급진 레스토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말도 안되는 탄두리 치킨의 양

  내가 힘들게 매고 간 배낭여행의 여행가방과 패션은 레스토랑과는 컨셉이 달랐는지 레스토랑의 문지기와 종업원들을 당황케 했다. 언제나 운동을 하는 내게는 단백질이 필요했고, 그것을 인도 델리에서 타협할 수 있는 것은 탄두리 치킨 밖에 없었다. 나는 주저 없이 탄두리 치킨을 주문했다. 그러나 세상에나! 500루피! 한국에 있는 치킨값과 다를 게 없는 탄두리 치킨은 고급 레스토랑임을 감안할 때, 난 기꺼이 먹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탄두리 치킨의 양이었다. 1/3조각이 나온 듯하였다. 가격에 실망하고 양에 실망하고 주린 배를 어떻게 채울지를 고민하였지만 여행의 교훈으로 삼기로 했다. 우리나라 돈으로 만원 가까이 내고 심지어 Tip 까지 지불하고 위의 사진의 있는 양만큼 먹었다. 보기에도 배고픈 비주얼이었다. 탄두리 치킨을 먹었지만, 비주얼에 다시 배가 고파졌다. 나는 천천히 하나씩 발라먹었다. 뼈를 제외한 모든 부분은 다 먹을 정도로 배가 고팠었나 보다. 다 먹고 난 뒤에 부족함에 대한 벌은 나 스스로가 아직도 인도에 대한 음식과 인도의 여행에 대한 불신에 대한 나의 선입견으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조금 배고프더라도 나 스스로가 여행지에 대한 선입견과 경계심을 풀어야 해야 함을 배고픔으로 인지하고 오후 여행을 계속해서 진행하였다.



참고문헌 : 전명윤,김영남,주종원,[프렌즈 인도.네팔 '14~'15 개정판], 중앙books(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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