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인에게 소의 의미
9. 낭만의 도시 조드뿌르에서 김종욱 되기.
조드뿌르는 우리나라에서 “김종욱찾기” 라는 영화와 뮤지컬로 유명한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도시이다. 영화에서는 여주인공 임수정이 대학 시절 인도 여행에서 만난 “김종욱” 이라는분을 만나 첫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고 나중에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첫사랑을 남주인공 공유가 찾아주는 이야기 이다.
인도 여행 중에서 김종욱과의 재회와 재회를 거듭하게 되면서 조드뿌르라는 도시는 사랑에 빠지기 위한 낭만의 도시로생각 되어진다. 그런 도시에 간다. 나는 누군가의 김종욱이될 수도 있고, 여자 김종욱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일 수도 있다.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설레임을 갖게 해주는 낭만적인 도시가 아닌가?
도시는 많이 변하지 않지만, 그 도시를 여행 가는 사람들의 마음은 시시각각 많이 변한다. 로마의 휴일의 로마도 그렇고 냉정과 열정사이의 피렌체처럼 도시는 변하지 않는다. 그 도시에 씌어진 스토리와 낭만이 우릴 불러 모은다. 조드뿌르 역시 한국인들에겐 그런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
10. 조드뿌르의 아침
오전 7시 15분, 알람이 울렸다. 아직 조드뿌르에 도착하려면 30분이나 남았지만 군대의 이등병처럼 수직 상승으로 몸을 일으켜 내 자리에서 내려왔다. 각이 잡힌 상태로 침남을 접고, 쇠사슬에 묶여 있던 가방에게 자유를 주었다. 그리고 도착시간 까지의 인도 기차의 낭만을 즐겼다.
도착. 내려서 조드뿌르와의 해의 신, 수리야 오브 조드뿌르와 인사를 나눴다. 얼마나 날 세차게 반겨주던지 만나자마자 눈이 부셨다. 그런 아그라 신에게 난 찌뿌린 표정으로 답례를 했다. 사기로 가득찬 델리와 여행과는 조금 다르게 낭만으로 가득차 보일꺼 같은 이 조드뿌르의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일은 배낭을 맡기는 일이었다. 도저히 오늘은 큰 배낭을 매고 여행을 여행을 할 수가 없었다. 조드뿌르에 도착해서 알게된 사항이지만, 각 역에는 배낭을 맡기도록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배낭모양의 이모트콘이 써져있는 곧이라면 하루에 10~20루피(500원 정도)의 가격만 하루종일 배낭을 맡길 수 있다. 하, 이걸 이제 알았다니. 뉴델리역이나 올드델리 역에는 사람도 많고 복잡한 내부 시설이 얽히고 설켜 있어서 찾기 힘들었었으나, 조드뿌르처럼 작은 역은 금방 쉽게 찾을 수 있다. 짐을 맡기는 역내시설에 들어가게 되면 여권을 확인하고 돈을 지불하면 맡겨놨다는 영수증을 주고, 가방을 직접 올리게 되어있다. 분필로 번호를 쓰는게 조금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분실 우려를 걱정하게 되다면 가져간 자물쇠나쇠사슬로 묶어 놓으면 문제가 없다. 중요 물품은 카메라 가방에 따로 넣어 조금 한결 가볍게 역을 빠져나올수 있었다.
나오자 마자 내가 찾은 장소는 기차표 예약사무소이다. 왜 기차역과 기차표 예약 사무소가 따로있는지 영문을 알 수는 없지만 기차표 예약사무소에 들려 금일 밤 11시 45분에 떠나는 자이살메르로 가는 기차를 탔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잠자는 시간을 이동하는 시간을 쓰기 위해서다. 무엇보다도인도의 이동시간은 기본이 5시간이 넘기 때문에 그 시간을 허비하느니 자면서 이동하기 위한 것이었다. 자이살메르까지는 6시간이 걸리고 새벽 5시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고 물론 새벽 5시에 도착했을 때 자이살메르에서 어떻게 시가지 까지 움직일까가 고민이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난 어떻게든 여행지에 떨어졌다면 어떻게든문제를 해결해내야 한다라는 용기가 있었다. 그것보다 여행지에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는 것이 나의 여행철학이었고 그래야 내가 보고 싶은 것 느끼고 싶은 것들을 느끼고자 했다. 3등석 자리가 없다고 하여 Sleeper 좌석으로 바꾸고 조드뿌르로 나의 하루를 채우기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조드뿌르의 여행을 시작하자. 오전 9시 기차역 근처에서 사다를 바자르를 통해 메헤랑가르성으로올라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오히려 오토릭샤를 타면 먼길을 돌아서 올라가기 때문에 오토릭샤꾼들도 비싼가격을 불렀다. 또다시 길거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이라서그런지 몰라도 복잡한 델리거리와는 다르게 한산했다. 그래도 사다르 바자르를 가는길에서 델리와 다른 인도의 아침을 만날 수 있었다.
인도 북부 지역은 코끼리가 잘 보지 못하였지만 조드뿌르의 달리는 차 사이에서 우아하게 걷고 있는 코끼리와 코끼리 왕자는 사진을 찍는 나에게 인사를 해주었고, 아침부터 아그니신으로부터 따뜻한 온기의 은총을 받고 있는 거리의 주인들과 어릴적 아침부터 골목 축구를 했던 나의 모습을 회상할 수 있게 도와준 크리켓을 하러가는 듯한 아이들의 무리들은 인도인들의 아침의 일상을 느끼게 해주었다.
사다르 바자르로 들어가는 메인도로 앞에 섰을 때는 많은 소때가무리를 지어 내 갈길을 막고 있었다. 나보다 몸집이 큰 녀석들의 무리가 내가 가려는 길을 막고 있으니, 조금 두려웠다. 나는 그런 소를 피해서 조금 돌아가긴했지만 그런소들을 피해서 지나치면 앞에는 다른 소들이 또 있었고 굉장히 많은 소들이 있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인도에는 소가 많을까? 라는 물음에는 간단히 말하자면 소가 인도에서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이고, 자세히 얘기하자면 이광수 교수가 쓴 <인도는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책을 참고하면 다음과 같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인도인은 소를 잡아 먹지 않는다. 소의 신성함을 떠나서 오히려 소를 살려야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인도는 모두가 알다시피 매우 가난한 나라이다. 기근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기 직전에몰렸다고 치자. 이때 소를 하나 둘 다 잡아 먹어 버리면 장차 무엇으로 농사짓고 무엇으로 먹고 살겠다는건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잡아먹는 것은 기근이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를 잘 먹여야 우유라도 얻어 몇 사람이라도 더 살아갈 수 있게 할 수 있고 소마저 죽으면 또 그것을먹고 연명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별 문제 없을꺼라고 생각하는 인도인들의 생각이다.
“소는 어머니이다.” 인도에는 1982년 기준 1억 9,000마리의소가 있다. 20년의 지난 지금은 몇마리의 소가 있을까? 종교적으로보자고 하면 인도인들이 소를 숭배하게 된 것은 베다(Veada) 시대의 유목 생활에서 비롯되었다. 유목민들에게 소는 매우 중요한 식량원으로서 부의 상징이었다. 특히소는 고기에서부터 똥, 오줌가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었다. 이것은마치 어머니가 자식에게 주는 무한한 사랑과 희생처럼 비쳐져 소는 사랑과 희생의 화신으로 여겨지게 된 것이다. 그시대 최고의 신인 인드라(Indra)의 임무는 소를 많이 빼앗아 오는 일이었고 제사장의 주된 임무는소를 많이 확보할 수 있도록 제사를 성대하게 치르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소는 자연스럽게 제사의 재물로 쓰이게 되었다. 제물로는 소 외에도 여럿있었지만 그 가운데 으뜸은 소였다. 소를 많이 잡게 해달라고, 또 그렇게 잘 빌어 달라고 제 사장에게가장 소를 바쳤던 것이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제사를 갈수록 더 복잡하게 형식화시켜 성대하게 치렀다. 많은 소를 확보하는 것은 곧 그 사회의 경제력을 장악한다는 것이었고 동시에 권력의 장악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제사장 자리를 독점하고 있던 브라만(Brahman)들은제사를 성대하게 치름으로써 그들의 권위를 내세우려 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보면 대규모로 치러지는제사는 곧 소의 손실을 의미한다.
당시의 인도는 이미 농경이 정착되었던 때라 생산을 위해서는 소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도 전통은 계속 구태의연하게 그 자리를 맴돌고 있어서 제사장들에 의한 대규모의 소 도살은 농업 경제에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반기를 들고 새로이 등장한 종교가 불교와 자이나교이다. 힌두교의 전통을 거부하고 나선 이들은 그 당시 막강한 세력으로 부상한 왕과 상인, 농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음으로써 새로운 경제 구조의 이념적 기반으로 자리잡아갔다.
부처는 소를 보호하도록 하였고 특히 암소를 보호하도록 하였다. 불교의 불살생이라는 교리는 만방에 전파되었지만 사실은 소의 불살생이었다. 부처는 불살생을 가르침으로써 소를 사회적으로 축적할 수 있도록 했고 더 나아가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제사의 중심인 힌두교의 삼장에 비수를 꽂는, 실로 엄청난 충격파였다
힌두교의 카스트(caste) 사회질서가 이렇게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자 브라만 제사장들은 그들의 종교 생활에서 불살생을 하나의 실천 계율로 채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힌구 경전에 암소는 성스러운 신들이 살고 있는 영물로 등장하게 된다. 그의 똥에는 여신 락슈미(Lakshmi)가 살고 있고 가슴에는 스깐다(Skanda) 신이, 이마에는 쉬바(Shiva) 신이, 혀에는 사라스와따(Sarascati) 신이, 그의 ‘음메’ 소리에는베다의 네 여신들이, 그의 등에는 야마(Yama) 신이, 그리고 우유 속에는 여신 강가(Ganga)가 살고 있다. 힌두교의 제사장들이 소 보호를 채택하면서 소는 급격히 숭배의 대상이 된다. 소 보호는 힌두교의 최고 세 신 가운데 하나인 비슈누(Vishnu)와관련되면서 발전해 갔다.
소 보호는비슈누의 화신 끄리슈나(Krishna)의 몫이다. 신화 속의 끄리슈나는 태어난 후 부모에게 버림받아목자들에 의해 거두어진다. 그들의 보호로 훌륭하게 성장한 끄리슈나는 힌두 최고의 신이 되었고 소를 보호하는 신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힌두교는이렇게 소 숭배의 정당성을 확보해갔다
끄리슈나의 소 보호 신화는 제사의 신 인드라와 밀접한 관련이있다. 신화 속에서 인드라는 세상의 모든 소를 제물로 쓰기 위해 노획한다. 그런데 그보다한 수 위인 끄리슈나가 이들을모두 풀어 주어 버린다. 이에 크게 노한 인드라가 세상에 홍수를 내려 모두 멸망시키려 했으나 끄리슈나는 산을 쌓고 소들을 그 위로 대피시켜서 그들의 생명을 구하고 안전하게 보호했다. 우리는 이 신화에서 구세주의 역할이 인드라에서 끄리슈나로 옮겨갔고 구원의 양식이제사에서 보호, 즉 사랑과 헌신으로 옮겨 갔음을 알 수 있다
끄리슈나가 인드라로부터 소를 보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열리는 힌두 최대의축제가 디왈리(Divali)이다. 이날이 되면 사람들은 끄리슈나의 탄생지인 브린다완에있는 고와르다나(Govardhana) 산을 숭배하는 의례를 치른다. 원래 '고와르다나'라는 어휘는 '소(go)'를 '증가시키다(vardhana)'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은 이것이 변하여 '부(dhana)'를 증가시키기 위해 '소똥(govar)'에 의례를 지낸다는 뜻이 되었다
“암소가 생상하는다섯가지 성물"
암소가 성스러운 존재로 추앙받으면서 그가 배출하는 것들 또한 성스러운 경지에오르게 된다. 소를 성스럽게 여기는 것까지는 좋은데 배출물까지 성스럽게 여기는 것에 대해서는 마땅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에도절한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이러한 성물의 경지에 오른 것이 다섯 가지가 있는데, 우유, 우유를 발효시켜 만든 고체 요구르트, 요구르트에서 추출해 만든 버터, 소똥, 소오줌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은 인도의 전통적인 힌두교-카스트 사회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정화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서 인도인들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 농촌이라면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으로 집담벼락에 소똥을 덕지덕지 발라 놓은 것이나 마당을 소똥으로 덧칠하는 것은 바로 부정 막음이자 액막이의 하나이다. 또 엄격한 브라만들은 성스러운 경전이 있는 서재를 소오줌으로 정화시키곤 한다. 마을의 공동 우물에 개 시체가 빠졌다거나하여 물이 오염되었을 때 사람들은 시체를 꺼내고 우물물을 다섯 번퍼낸 다음 그 안에 소오줌을 넣는데 소오줌이 정화력을 갖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히(dahi)라는고체 요구르트는 생유를 가열해살균한 후 유산균을 넣어 발효시킨것인데, 하룻밤 정도 방치해 두면 우유가 신맛을 띠는 반고체 상태로 된다. 이것은밥과 함께 먹기도 하고 조미료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다히를 뒤섞으면서 다시 가열하면 우수한 질의 버터오일이 생기는데 이것이 기(ghi)라고 하는 버터이다. 버터는 상온에서 고체 상태이기 때문에 장기간 보존이 가능하고 가지고 다니기 편리하여 농촌, 도시 할 것 없이 요리에 빠지지 않는 필수품이다. 버터는 또한 약용으로 쓰이기도 하고 목축민들의 물물교환에서 중요한 물건으로인정받기도 하는 등 이용 범위가 매우 넓은데 인도 유제품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이다
독실한 힌두들이 오염된 몸을 정화하기 위해 행하는 의례 중에는암소가 생산하는 다섯 가지 정물-똥, 오줌, 우유, 요구르트, 버터-을 섞어 마시는 것도 있다. 이 다섯 가지의 혼합 쥬스(?)는 부정을 몰아내는 데 오랫동안 절대적인 권위를 유지해 왔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아무래도 찜찜했는지 내용물이 약간 바뀌었다. 다섯 가지 가운데 소똥과 소오줌 대신 꿀과 설탕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그렇지만 그것이 갖는 의례적인 권위는 변함이 없다.
12. 메헤랑 가르성 가는길
인도의 소의 이야기를 뒤로 하면서 사다르 바자르에 다다를 수있었다. 9시경의 사다르바자르는 아직 장이 열리지도 않아 한적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시계탑과 시계탑을 뒤로 저 멀리 보이는 메헤랑 가르성까지 상쾌한 하늘과 한데 어울어져 좋은 경치를 뽐내고 있었다.
조용한 사다르 바자르를 감상하는 순간도 잠시, 내 뱃속의 대장이 굉장히 급한 전보를 알려왔다. 엇! 이 사다르 바자르 중간에 나의 급한 용무를 해결 할 수 있는 곳은 없어 보였다. 도대체 많은 힌두교의 신들을 왜 조드뿌르의 한복판 사다르 바자르에서 나에게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어제 먹은 양고기가 문제 였을까? 아님 이건 라씨의 정상 작용인건가?? 어찌됐던 이런 고민을 하기엔 시간이 쪽박하였다. 시계탑 주변에 있던 다른 인도인에게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지만 방향만 말해줬다. 그 방향으로 가면 화장실 처럼 보이는 건물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고, 쓰레기장이나왔다. 설마 쓰레기에 용변을 보라는 건가? 하는 생각도잠시들었지만 점점 조여오는 하체의 압박감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얼른 화장실을 찾아야겠다. 사다르 바자르의 밖의 지역에 철물점 주인에게 나의 응급함을 알렸다. 그 철물점 주인은 갑자기 내 손에 들고 있던 인도여행책자와 카메라를 달라고 했다. 아직도 인도 현지인에대한 경계심을 갖고 있던 나는 속으로 ‘설마 화장실이 급한 나에게로 또 사기를 치겠다는 건가?’ 라는 생각에 책은 맡기고 카메라는 들고 갔다. 하체는 급박했지만 머리는 냉정하였다. 그 책을 받더니 철문점 주인은 자기의 책상위에 올려 놓더니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면서 앞장서서 갔다. 간 곳은 아까의 그 쓰레기 뒤쪽편으로 유료 화장실이 있었다. 5루피의 이용료를 내고 난 내 자리를 받을 수 있었다. 카메라 가방을 메고 급한 사건을 해결하고 다시 철물점 아저씨에게 찾아가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나의 여행 책을 찾아 메헤랑 가르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실 지도에 있는 메헤랑 가르성에 가는길을 잘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감으로 커다란 성이 멀리서 보이는 길로 쭈욱 따라가는 것이 전부였다. 어느 정도 올라가 뒤를 바라보니 파란색의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조드뿌르는 어떻게 블루시티가 된걸까? 성 주변에 거주하던 브라만이 다른 계급과의 차별화를 위해 집을 푸른색으로 칠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 전통은 오늘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현재는 일반인도 집을 푸른색으로 칠할수는 있다고 하나, 인근 브라만들이 가만두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들은 후담으로는 브라만이 아니어도 푸른색으로 칠하기 때문에 현재의 블루시티를 이뤘다고 하는 얘기도 있다.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기 위해 명품 브랜드를 무리해서 큰 돈을 주고 사는 대한민국 일부 현대인상황과 비슷한걸 보면 자신의 위치와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거나 내 위치와 능력보다 더 높게 보이고 싶은 욕구는 어느 시대나 나라를 막록하고 똑 같은 욕구를 가졌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본질이 아닌 겉치레만 따라한다는 거다. 명품과 집외벽에 파란색이중요한게 아니라 귀족 같은 생각과 오블리스 노블리제 같은 사상이고 귀족같이 자기의 명예를 위해 행동에서도 아름답게 행동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고생각하는데 그런건 돈으로 팔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못사는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