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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의 온도

매년 한해를 마감하는 31일. 저에겐 나름의 경건한 의식이자 습관이 있습니다.

다짐했던 올해 목표를 이루었는지를 돌이켜보며 다음 1년의 목표를 다짐합니다. 올해 목표를 이루었다면 새로운 목표를 두세 가지 정도 세우는 거예요. 마음만 먹으면 달성할 수 있는 조금은 쉬운 목표 하나와 생각보다 꽤 어려울 것 같은 목표를 나눕니다. 만약 한 해 동안 이루지 못했다면 새해에도 계속 유지하는 거예요. 혹여 빠른 시간 안에 이뤘다면 나머지 기간 동안은 한량처럼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것이죠.  

외적 동기를 통해 내적 동기를 강화하는 것이라고 나름 스스로 그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문제풀이의 100점은 누구나 좋아하기 마련이니까요.

매년 다사다난했다는 말을 주저 없이 하지만, 올해 2020년은 특히나 더 많은 일들과 심적 갈등이 심했던 시간이기도 합니다. 코로나 19라는 유례없는 펜데믹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도 큰 일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5년을 넘게 재직했던 더크림유니언에서의 퇴사입니다. 마지막 퇴사할 때의 제 모습이 지금도 여전히 생생히 기억납니다. 모두가 없는 디자인 본부의 그 공간을 하나하나 아로새기며 힘겹게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디자이너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며 비교적 이른 나이에 본부장이라는 어쩌면 분에 겨웠던 중책을 맡았던 그 성장의 시간들이 정말 영화의 한 장면인 것인 양 주마등처럼 지나쳐갔습니다. 약 한 달의 휴식기간을 가지고 이직한 회사에서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정과 심적 갈등으로 불과 3개월여 만에 다시 퇴사를 했습니다. 욕심이라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렉터로서 여전히 그림쟁이이자 디자이너이고 싶었던 제게 짧고도 길었던 시간이었습니다. 미안했고, 고마웠으며, 아쉬웠고, 온전하지 못했습니다. 약 14년여 동안 디자인을 하며 정식적 고통에 휩싸이고 육체적으로 한계에 부딪힌 적은 많았지만 행복하지 않았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 저의 곁을 10년 동안 지켜봐 주었던 아내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행복해 보이지 않아.' 그 길로 퇴사를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회사에 안착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굳이 올해를 마감하는 이날 하염없이 늘어놓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푸념을 하는 것은 더욱 아니고요.

차가운 물과 따뜻한 물의 실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온도의 밀도를 알아보는 실험입니다. 차가운 물이 담긴 원통에 뜨겁게 데운 물을 담은 작은 통을 넣으면 신기하게도 온도의 밀도 때문에 서로 섞이지 않고 두 개의 층을 유지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섞이지만 그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립니다.

2020년은 마치 섞이지 않은 서로 다른 온도의 내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해에는 온전한 내가 되기 위해 시간을 두고 그 밀도의 간극을 좁히려고 합니다. 글을 시작하며 언급했던 새해 목표들 중 하나도 지금 이 순간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제 2021년이 10분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10분 뒤 저는 매년 해왔던 그 경건한 의식을 행하겠지요. 시간에 맞춰 글을 적자니 서투른 문장들이 되었지만 이것 역시 지금 제가 어떤 감정을 되새기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또 하나의 시간이 될 겁니다.

행복한 한 해를 맞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행복의 조건과 가치는 각양각색이겠지만... 그래도요.

그 어떤 형태라도 그 어떤 밀도라도 하나의 결이었음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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