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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규석 Oct 24. 2024

그 남자가 영화에 미쳐버린 일련의 과정을 추적하다

영화세상 <대전 시네마테크 컬트>

영화세상 친구들의 감상문, 소개서 등 편지 원고들 파일을 모은 클리어 파일, 월간 '영화세상'의 원고가 되었습니다


"나는 내가 영화광으로 불리면 좀 거북했지만 빼도 박지 못하는 영화광이 맞습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아직도 애정하는 사람은 맞는데 나는 영화광일까? 문득 그런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던져봅니다. 이제 제 나이도 어느덧 50대 중반이 되었습니다.  제가 한참 영화를 곁에 두고 지지고 볶는 관계 속에서 희열과 이유 없는 좌절을 느끼던 나이의 젊은 청춘시절을 돌아봅니다. 빽 뚜더 90'S 과거 아나로그로의 회귀! 그 때 천방지축 날뛰던 미소년과 미소녀의 세대를 지금 제 나이 50대 중반인 세대가 자녀로 두고 있을 정도의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낯섭니다. 그걸 받아 들어야만 하는 나이가 되었네요. 시간이 참 빠릅니다. 다시 원론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서 그때의 나는 영화광이었을까? 처음에는 자신이 없었는데 조금 더 생각해 보니 영화에 관한 유별난 집착적인 행동을 했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옵니다. 제 대답은 저는 영화광이 아니다 그냥 조금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많이 봤을 뿐이지 영화광은 아니다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미칠 광이라는 이미지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아서죠. 그런데 서서히 나의 유별난 광적 안 미친 행동이 기억의 저편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래서 대답합니다. "네 자수합니다. 저 영화광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도대체 왜 재는 저런 행동을 할까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고 처음엔 마땅한 이유가 없어 말을 대꾸를 못했습니다.좋아하는데 그 이유가 있을까요? 마땅한 대답을 찾기 힘들었습니다. 그냥 내가 좋아서 한다고 얼버무리며 말하고 회피했었습니다. 나중에는 주변에서 쟤는 그냥 저러는 애다라고 아예 포기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광적인 행동이란 영화를 보는 일에 집중을 하는 일입니다. 더불어 영화를 본 작품이건 안 본 작품이건 영화에 관련된 것을 모으는 것입니다. 아마 어느 것에 미쳐본 사람은 자세히 설명 안 해도 잘 알 것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영화를 자주 보고 영화에 관한 모든 것, 많은 것을 모으고 뜯고 자르고 또 몰래 훔치기도 했습니다.


서점에서 산 교본으로 연습한 후계자 브루스 황

 "가슴에 망토를 두르고 뛰어내려보고 쌍절권 돌리다가 유리창 깨지고 마빡에 번쩍 불이 봐야지"


 

  기억에 남는 영화를 말하자면 크리스토퍼 리브의 <슈퍼맨>입니다. 1탄입니다. 지금은 사라진 대전의 서대전 극장에서 보았습니다. 변신을 하고 망토를 두르고 가슴에 S자 마크 머리칼도 s웨이브. 하늘을 납니다. 각종 재난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합니다. 지구의 수호신입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장독대에서 뛰어내려봅니다. 혹시나 나도 크립톤 행성의 초능력을 얻었는지 길가의 자동차도 한번 들어 올려봐야 합니다. 까만 암막을 헤치고 들어가면 더듬더듬 앞으로 보지 못합니다. 영어가 흘러나오고 스피커에서 총소리는 심장이 뛰게 만듭니다. 커다란 흰 천위에서는 기차도 달리고 비행기가 떨어지고 성룡의 코믹 액션 연기가 사람들의 폭소하게 만듭니다. 겨우 빈자리를 잡아 앉고는 영화를 쫓아갑니다. 그제야 극장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극장에 사람이 늘 가득 차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들어온 사람은 또 나처럼 더듬이를 세우고 자리를 잡는 모습이 재밌었습니다. 극장은 어린 저에게는 또 다른 신기한 세상을 보여주는 판타지의 실현이었습니다. 이소룡이 나오는 '용쟁호투'를 보고는 돈을 모아 체육사에서 쌍절권을 샀습니다. 그걸 잘 돌리기 위해 쌍절권 교본도 샀습니다. 한겨울에 웃통을 까고 마당에서 돌리다가 머리통에 혹도 많이 났죠. 그래도 지금까지 그 실력이 죽지 않았습니다. 아뵤! 성룡이 한국에 쇼프로에 나와서 백텀블링을 본 기억이 있네요. 아이들과 골목에 나와 쿵후 흉내를 내던... 멋지게 쓰러지는 연습도 많이 해야했습니다. 골목안의 영화배우들로 넘쳐났습니다.

노인과 바다, 로미오와 줄리엣... 아....



"휴일엔 영화의 가정교사 주말의 명화 & 명화극장"


  극장을 늘 갈 수는 없었습니다. 명절이나 공휴일에 용돈이 생기면 갈 수 있었으니까요. 작은 흑백 텔레비전으로 보는 KBS 명화극장이나 MBC 주말의 명화를 저는 즐겨 보았습니다. 오히려 더 다양한 영화를 보는 백화점 같은 역할을 했다고 할까요.  검은 뿔테 안경을 쓰신 정영일 평론가 께서 이 영화는 고 보셔야 합니다라고 하면 정말 하늘이 두쪽 나도 보아야 하고 놓치면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다행히도 먹고살기 바쁜 부모님은 뭐라고 많이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일 마치고 집에 돌아오시면 주무시기 바빴으니까요. 이불을 뒤집어쓰고 몰래 보기도 많이 했습니다. 존 웨인의 서부 영화에서는 카우보이가 그렇게 멋져 보였습니다. 그리고 인디언은 정말 잔혹하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의의 사도는 처음에는 갖은 수모를 당하고 바보 같이 행동하다가 마지막에 참지 못하고 주먹을 쓰다가 총을 들고 거침없이 적을 쓰러트립니다. 그리고 말 한 마리를 타고 떠나죠. 소년의 엄마가 미인이던 게 같이 살면 어디 덧나나? 아 그렇구나 영웅은 혼자 살아야 하는 게 멋지긴 합니다. 그리고 옛날 고전 흑백 영화를 보면서 영화의 역사를 천천히 이해학 시작했습니다. 역시 고전이 가지는 영화의 참맛. 자전거 도둑, 길, 태양은 가득히, 용쟁호투,  


 "단체관람 영화로 반공정신을 기르기는 커녕 영화에 중동되다"


   단체 영화를 가기 시작한 것은 중학생 때였습니다. 시험을 보고 나서 영화관에 가라고 하더군요. 전쟁영화 "아벤고 공수군단", 고 김득구 선수 이야기 "울지 않는 호랑이", 전영록의 "돌아이"시리즈. 액션이 화려해지고 미녀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생 때 운명적인 영화랄까 정말 가슴을 울리는 영화들이 많았습니다. 캄보디아 내전을 다룬 실화를 바탕으로 한 하잉 느고르의 "킬링 필드", 그리고 찰리 쉰, 윌리엄 데포, 톰 베린져주연의 올리버 스톤 감독의 <플래툰>. 전부 사춘기로 감정이 요동칠 때 봤던 영화였네요. 그리고 음악도 또 예술이었습니다. 존 레넌의 <이메진>을 거기서 처음 알았고요. 정말 눈물이 핑돌더라고요.  살아 돌아간다는 것, 그리고 날 살려준 은인을 다시 만난다는 것 그 감동이란....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다루며 미쳐가는 내부의 잔혹한 인간 군상을 그린 <플레툰> 역시 제 마음을 홀린 영화였어요. 고3 때 말입니다. 그래서 그 영화를 두 벌이가 일부러 극장에 가봐 봤고요. 구조 헬기를 타려고 뛰어가다 총에 난사당하는 윌리엄 데포의 명장면을 참 많이도 따라 했네요. 그 영화 역시 현을 위한 아다지오 이 음악이 너무 좋아서 처음으로 영화 O.S.T 전축판을 샀다는 거 아닙니까. 왠지 누구도 믿지 못하는 현실을 대변하는 서글픈 현악기의 울림. 이 영화의 포스터를 갖고 싶어서 전봇대와 담벼락을 수도 없이 다니다가 하나를 온전히 떼었었죠. 보통 다른 영화포스터 위에 덧붙이는지라 아주 두꺼운 종이였어요. 그것도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가는 때 서대전역 부근 골목에서 몰래 떼었는 데 성공했을 때의 그 뿌듯함과 쾌 "신문 영화 스크랩에 빠지며 진짜 미쳐가다"


"흥미로운 신문 스크렙과 영화잡지의 매력에 빠져들다"


  영화를 보고 그 영화를 추억하다 보니 영화 잡지도 사서 보게 되었고요. 영화소식이 주간지에 많이 나온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찾아간 곳이 대전역 근처 대동의 헌책방 거리입니다. 용돈이 생기면 그곳에 가서 한 권 100원씩 하는 '선데이 서울', '주간 경향'등을 사모았죠. 여배우들 사진 영화소식등이 많았어요. 그리고 'TIME'지 나 'NEWS WEEK'등 외국 주간지도 샀습니다. 희귀하 영화사진을 많이 구할 수 있었답니다. 하여간 용돈을 참고서를 사지 않고 죄다 그런 것을 사다 날랐으니 공부하고는 그때부터 담을 쌓게 됩니다. 성적이 떨어지고 학교 수학시간에는 눈을 뜨고 자거나 낙서를 하고 야자시간에 저녁을 까먹고 몰래 소설책을 잃게 되었답니다. 여하튼 영화 자료를 모으면 좋은 점은 영화를 내 것인 양 언제나 소유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작한 일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신문을 활용했습니다. 그 신문에 주말에 영화광고가 나옵니다. 하단부에 길게 인쇄된 그걸 모으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를 대고 칼로 깨끗이 잘라서 모으다가 그걸 또 백지에 잘 붙이는 겁니다. 그러다가 또 오래 뒤틀리지 않게 보관하려고 비닐을 씌우고 빳빳하게 코팅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주말에 몰아서 했습니다. 친구의 집에 가서 신문을 한 보따리 가져와서 책상에 펴고 자르고 모아서 풀로 붙이고 모아서 문구점의 코팅 가게에 가서 코팅을 하는 일을 반복합니다. 칼로 손도 베이고 잠도 못 자고 스크랩을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또 당시 신문에 TV 영화 프로그램이 나오는데 그 작은 걸 또 잘라서 모아 붙이게 됩니다. 정말 지금도 그것들을 다 가지고 있는데 저걸 그때 어떻게 했나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다가 또 사업(?)을 확장해서 길거리의 영화 벽보 사진을 찍게 됩니다. 고3 때 새벽 신문 배달을 하는 도전을 하게 됩니다. 초등학교 6학년때도 1년간 신문 배달을 해 동네 친구들 15명의 유니폼을 다 맞춰주고 용호 축구단을 만들었던 그 배짱과 용기. 용돈을 벌 요량이었지만 사실은 영화자료를 모으기 위한 목적도 있었습니다. 당시에 한국일보를 배달했는데 자매지인 일간 스포츠를 같이 배달했거든요. 배달하면 무료로 신문을 볼수 있으니까 원자재(!) 수급이 편해졌습니다. 특히 명절에는 칼라로 영화광고가 나오는 대목(?)이었거든요. 그걸 놓치지 않으려고 직접 신문을 1년간 그러니까 87년 학력고사 시험날도 배달하고 88년 6월 군 입대하는 날 새벽에도 신문을 배달하고 영화기사를 챙겼다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사진은 벽보에 붙은 포스터를 찍거나 극장 안에 붙은 스틸 사진을 찍는 용도였습니다. 물론 극장에서 주는 선전지라는 전단도 기본으로 모았죠. 영화를 보건 안 보건 상관없습니다. 죄다 싹쓸이란 표현 아시죠? 그때 정말 제가 그랬다니까요. 정말 미치지 않고는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창고 책장에 가득 꽂힌 각종 스크랩 자료들 보면 기가 막힙니다. 그걸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영틍포 옥탑방 도봉산 지하 자취방을 전전하고 친구집 창고에 맡기며 보관하고 지켜낸 생각을 하면 식은 땀이 납니다. 정말이지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지금 작은 창고 양쪽 벽면에 가득한 자료 파일들과 전단지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영화의 본질과 역할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물론 그러면서도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슬플 때 웃음을 주고 낙심했을 때 용기와 희망을 북돋아주는 영화. 그리고 그 영화를 한다는 것은 그런 영화를 만듦으로써 나의 행복뿐만이 아니라 타인의 행복을 위해 또 타인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한 영호의 역할. 저도 영화를 통해 위로받고 힘을 얻었으니까요. 뭔가 영화로 가치 있는 역할을 하기도 해야 한다는 생각말입니다. 온전히 영화 스크랩에 몰두하다가도 그래 언젠가는 그 짓이 물릴 때가 올 거야 '그때 내가  영화를 한다는 것은 영화를 만드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거야'란 막연한 생각말입니다. 그 막연한 생각이 구체하 될때 그때 까지는 하고 싶은 것은 맘껏 하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한편의 인생영화는 휴가를 나와서 본 영화 중에 청량리 부근 새 서울 극장에서 본  마틴 스콜세지 감독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택시 드라이버"입니다. 책으로만 그러니 글로 보아왔던 영화였는데 정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 이것이다! 이런 영화를 해야 한다. 널리 알려야 한다. 맞아! 군대에 가서 영화와 거리를 어쩔 수 없이 떨어졌지만 영화와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평생을 같이 가야 하는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여하간 서울이란 거대 도시의 문화. 그 속에서 영화의 영향력. 물론 제가 사는 대전과는 정말 차원이 달랐죠. 극장의 전단지도 더 고급스럽고 다양하고 다양한 이벤트와 홍보 용품에 눈이 돌아갔습니다. 제대 후 시나리오 작가협회 부설의 서울의 '영상작가 교육원'의 기초반과 전문반에 다녔습니다. 거의 1년 정도. 동국대 후문 쪽에 있었는데 거길 일주일에 두 번씩 통일호 기차를 타고 저녁에 올라와 두 시간씩 수업을 들었거든요. 그때 어머님의 도축장 일을 돕고 있었는데 서울극장, 코아아트홀, 명보, 단성사, 피카디리, 브로드웨이, 등 극장을 순례하며 전단지를 수십 장씩 수거했습니다. 그리고 만든 "영화세상" 회지를 매달 말 발송할 때 그 극장의 전단지들을 10여 장 이상 끼워 같이 보냈던 것이었지요. 그렇게 발품을 팔았습니다. 물론 영화도 보고요. 그러고 보니 영화광(자료수집광) 맞습니다. 돌아보니 정말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가 차고 넘칩니다. 지금도...

영화 잡지와 팜플렛 기타 영화세상, 시네마 컬트 자료들
시네마테크 컬트 사무실에서 비치한 대여장부
많은 소장 비디오, 도서 자료들은 시네마테크 컬트에 비치해서 대여해주는 역할을 했다. 시네마테크 컬트는 그래서 열악하지만 '대전 영상문화도서관'이라는 부제를 걸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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