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4일 화요일
10월 31일은 아내의 생일이다. 10월 초에는 내 생일이 있고 10월 말에 아내의 생일이 있어서 다른 달보다 애착이 간다. 보통 서로의 생일에 편지와 선물을 주고 받는다. 요즘은 각자 선물 살 비용을 여행 자금에 보태서 생일 기념으로 아이들과 여행을 가기도 한다. 집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거나 외식해도 좋지만 여행을 가면 또 새롭다. 나와 아내에게 10월은 달 전체가 하나의 기념일이다. 괜스레 10월만 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 우리에게 이벤트 하나가 추가되었다. 할로윈이다.
10월 31일이 할로윈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할로윈을 의식한 적은 없다. 서울에서 자취하던 때인 2014년, 할로윈 언저리에 이태원이나 홍대를 가도 지금처럼 할로윈 느낌을 물씬 느끼지 못했다. 몇몇 외국인들이 드라큘라 분장을 한 채 망토를 두르고 다니고, 펍(Pub) 입구에 잭오랜턴(Jack-o'-lantern. 호박 속을 파고 눈과 입을 새겨 만든 등불) 한두 개가 전시되어 있는 걸 봤을 뿐, 거리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2015년에 다시 부산으로 내려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부산에서는 더더욱 본 적이 없었다. 아내 역시 10월 31일은 본인의 생일이지 할로윈이라고 여긴 적이 없다. 하지만 아이들이 태어나고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바뀌었다.
우리 아이들이 다녔던 어린이집에서는 할로윈이 다가오면 학부모들에게 안내문을 보냈다. 아이들이 할로윈 행사 때 입을 옷을 미리 준비해서 행사 당일에 입고 와주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겠거니 하고 준비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어린이집에서 이틀 전까지 재차 안내문을 보냈고, 주변 엄마들도 모자라도 준비해서 보낼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도 준비했다. 첫째가 어린이집에서 처음 맞이했던 할로윈 때에는 검은색과 주황색이 섞인 비니를 씌우고, 집에 있던 담요로 만든 망토를 입혔다. 아들이어서 그 정도만 해도 괜찮았다. 그런데 둘째인 딸이 어린이집에 다닐 때부터는 의상을 준비해야 했다. 첫째 때 살펴보니 여자아이들의 의상은 화려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녀 모자와 반짝이가 붙은 치마와 호박 모양의 작은 손가방을 준비했다. 사실 나와 아내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에게 할로윈은 여전히 낯선 행사였고, 어린이집에서 행사를 하는 것도 과하다 싶었다. 하지만 아이가 좋아하니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둘째의 첫 할로윈 때 그렇게 꾸며주지 않았으면 둘째는 속상해했을 것이다. 다행히 즐거워했고, 할로윈은 재미있다고 말했다.
할로윈 행사는 어린이집을 다닐 때만 겪었고, 우리 아이들이 다닌 유치원에서는 할로윈 때 특별한 행사를 하지 않았다. 나와 아내는 오히려 그게 좋았다. 우리에게 할로윈은 특별한 날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미 할로윈 행사를 겪어 본 우리 아이들은 달랐다. 어린이집 이후 할로윈을 기념한 적이 없었는데도 이미 10월 31일은 엄마 생일이자 할로윈이라고 자연스럽게 인식했다. 할로윈을 어색해하지 않았다. 시대가 바뀌어서 세대가 바뀐 것인지, 세대가 바뀌어서 시대도 거기에 맞게 변화된 것인지, 어떤 게 우선인지 모르겠다. 어느덧 할로윈이 되면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관련 물품을 잔뜩 판매하는 걸 보는 건 자연스러워졌다.
우리 아파트에서도 올해부터는 입대의 주관으로 할로윈 행사를 시작했다. 아파트에서까지 굳이 해야 하나 싶었다. 행사 당일 저녁, 식사를 마치고 소화를 시킬 겸 아이들과 단지 내 광장으로 나갔다. 얼마나 준비되어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나가서 보니 내 예상을 훌쩍 넘었다. 곳곳에 잭오랜턴이 있었고 나무에 유령 모형들이 달려 있었다. 불도 주황색으로 은은하게 밝혀져 있어서 광장 전체가 하나의 세트장 같았다. 관리사무소에 미리 신청을 한 세대는 지정된 자리에 집에서 가지고 온 테이블을 펼치고 해골이나 호박으로 멋지게 꾸몄다. 그리고 구경을 나온 주민들에게 사탕이나 젤리를 나눠주었다. 가족 단위로 의상을 입고 나온 집도 있었다. 과한 의상이 아니라 아이들은 스파이더맨이나 드라큘라 옷을 입었고, 어른들은 마녀 모자나 가면을 썼다. 이곳에 이사온 지 2년이 되어 가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행사에 참여하는 건 처음 봤다. 10분 정도 가볍게 둘러볼 생각으로 나왔지만, 우리는 1시간 가까이 구경을 하고 들어왔다. 나도 아내도 할로윈 분위기를 제대로 느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번처럼 아무 사고 없이 모두가 즐겁게 즐긴다면 매년 해도 괜찮을 듯 하다. 만약 내년에도 행사를 하게 된다면, 우리 가족도 의상을 맞춰서 입자고 아내와 얘기했다. 이번 행사를 계기로 나도 모르게 어느새 할로윈에 스며들었다. 낯설었던 문화가 더 이상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철학자이자 시인이며 문화평론가, 현재는 교수인 서동욱 교수의 《철학은 결말을 바꾼다》서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우리 자신이 삶 자체이기에 우리는 삶과 거리를 둘 수 없고 거리를 두고 생각할 시간을 얻을 수 없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요동치는 물속에서 잠시 삶을 확인할 수 있는 공기주머니이다."
좋아하는 문장이다. 그런데 삶 대신에 문화를 대입해도 말이 될 것 같다. 우리 자신은 하나의 문화 자체이다. 살면서 축적한 관심사들과 거기서 이어진 전문성들이 융합되어 나의 역사가 되고 나만의 문화를 형성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 너무 몰입하면 편협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현재 내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생각할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지표가 있어야 한다. 나에게 그러한 지표이자 공기주머니는 책과 아내와 우리 아이들이다.
책은 나의 궁금증을 해소해주며 동시에 새로운 통찰을 알려준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관념을 깨뜨려주기도 하고 살을 덧붙여 견고하게 지탱해주기도 한다. 아내와 아이들은 내 삶의 중심이다. 아내를 만난 순간부터,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내 삶의 중심이 되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좋아하는 거라면 이전에는 관심이 없었더라도 나도 같이 좋아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그렇게 관심을 기울이다보면 그쪽에 발을 담그게 된다. 아이들이 현재 좋아하고 관심있는 곳이 무엇인지 살펴보면, 내가 어디에 발을 담그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할로윈은 나와 무관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통해 할로윈을 접하게 되었고, 어느새 할로윈이 익숙해졌다.
요즘 아들은 '야구'에, 딸은 '다양한 재료로 만들기'와 '줄넘기'에 관심이 있다. 또한 '로블록스'라는 게임에 호기심을 가진다. 게임은 아직 이르다 생각하지만, 친구들이 주로 그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고 하니 마냥 반대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관련 유튜브를 볼 때 옆에서 같이 본다. 처음 들어보는 용어들이 난무하지만 따라가려고 애쓰고 있다. 맥락상 나쁜 의미라고 생각되면 그 단어는 친구들이 쓰더라도 따라하지 말라고 알려준다. 아이들에게 '정도'와 '절제'를 강압적으로 알려주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체득하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그래도 조급하지 않고 긴 호흡으로 나아가자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아이들의 문화에 관심을 가지되 간섭이라고 느끼지 않도록 노력하자. 흐름을 놓치지 말자. 존중하되 방만하게 두지 말자. 오늘은 친구들과 또 무엇을 하며 놀았는지 슬쩍 물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