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11일 화요일
코미디TV에서 방영했던 <맛있는 녀석들> 87회 방송분에 양념돼지갈비가 나왔다. 메뉴를 소개하고 본격적인 먹방에 앞서 코미디언 김준현씨가 이런 말을 했다. "죽기 전에 딱 한 가지 음식을 먹어야 한다면 양념돼지갈비를 먹을거야."
신선했다. 어떤 음식을 정말 좋아한다는 표현을 저렇게도 할 수 있구나, 무릎을 탁 쳤다. 2016년 방송분이었는데 지금도 저 표현이 잊혀지지 않는다. 이후 나에게도 저 정도로 좋아하는 음식이 있을까 돌이켜봤다. 죽기 전에도 먹고 싶은 거라면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두 가지 음식이 있다. 라면과 치킨이다. 점심에 라면을 먹었어도 저녁에 어딘가에서 라면 냄새가 나면 또 먹고 싶다. 자취할 때 종종 그랬다. 어느 날 점심 때 집 근처 틈새라면집에서 빨계떡을 먹었다. 라면에 계란과 떡이 들어있어서 '계떡' 이라고 하는데, 매운 버전은 '빨계떡' 이라고 부른다. 얼큰하고 칼칼하고 혀를 콕콕 찌르는 매운맛이 일품인 빨계떡을 정말 좋아한다. 특히 추운 겨울에 찬바람을 맞고 들어가서 먹는 맛은 기가 막히다. 다른 지점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자주 갔었던 집은 곱빼기가 있었다. 면발이 1.5개가 들어간다고 했다. 1개는 아쉽고, 2개는 많을 것 같을 때 먹으면 딱 알맞다. 사이드 메뉴인 스팸주먹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좀 차는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해도 스팸주먹밥을 포기한 적은 없다.) 이렇게 점심에 라면을 곱빼기로 먹어도 저녁에 또 먹으라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라면이다.
치킨도 마찬가지다. 큰 범주에서는 하나의 후라이드 치킨처럼 보여도 튀김의 바삭함과 맛이 브랜드마다 다르기 때문에 질릴 틈이 없다. 그래서 만약 죽기 전에 한 가지 음식만 먹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날의 기분에 따라 라면과 치킨 중 하나를 선택하려고 했다.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나와 결혼하기 전의 아내는 요리를 해 본 경험이 손에 꼽는다. 음식과 요리에 관심이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먹는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먹는 것에 관심이 없으니 요리에 흥미가 생길 리도 만무하다. 외출하지 않을 때는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괜찮았단다. 그렇게 먹어도 배가 고프거나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나와 연애할 때도 뭘 먹을지에 대해서 오래 고민한 적이 없다. 그날 먹고 싶은 주(酒)종에 따라 메뉴를 정했다. 나도 아내와 연애할 때는 아내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냥 너무 좋았기 때문에 뭘 먹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내의 선택을 따랐다.
아내를 만나기 전 솔로일 때는 오늘 어떤 음식을 먹을지 신중하게 골랐다. 거기에 오늘 하루의 기분이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내와 반대로 혼자서도 잘 챙겨 먹었다. 지금처럼 배달 어플이 활성화되기 전이어서,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직접 포장을 해왔다. 설렁탕이나 갈비탕, 뼈해장국처럼 국물이 있는 음식은 식당에 가서 막 나온 뜨끈한 걸 먹는 맛이 당연히 훌륭하지만, 집에서 보고 싶은 드라마나 영화를 틀어놓고 혼자 여유롭게 먹는 것도 자취할 때 느낄 수 있는 재미였다.
아내와 결혼 준비를 할 때, 혹시라도 요리에 대해서 부담을 갖지 말라고 얘기했다. 음식에 대한 나의 애호(愛好)는 신경쓰지 말라고, 밖에서 사먹어도 되고 내가 요리해도 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아내는 나의 말을 듣고 본인은 결혼하면 꼭 손수 요리를 해서 나의 식사를 책임질 거라고 답했다. 본인이 꿈꾸는 아내의 모습이라고 덧붙였다. 아내는 정말 본인의 말대로 그렇게 했다.
결혼 초기에는 업무상 출근을 새벽 5시반에서 6시쯤에 했는데, 아내는 나보다 1시간은 더 일찍 일어나서 아침 도시락을 챙겨줬다. 나는 원래 아침을 잘 먹지 않아서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아내는 결혼한 남자가 아침도 안먹고 다니면 안된다고 회사 가서 꼭 먹으라고 하며 꼬박꼬박 도시락을 싸줬다. 그리고 내가 퇴근해서 집에 오면 또 밥을 차렸다. 분명 결혼 전에 요리를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거짓말인가 싶을 정도로 잘했다. 레시피를 한 번 쓱 보고는 특별히 계량을 하지 않아도 뚝딱 만들어냈다. 어머님과 아버님께서도 놀라실 정도였다.
신혼 때 어머님과 아버님을 집으로 모셔서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어머님과 아버님은 편하게 시켜 먹자고 하셨지만, 아내는 요리를 해서 먹자고 했다. 어머님께서는 아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시고는, "네가 결혼하기 전에도 집에서 요리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 밥은 해먹고 살지 걱정이었는데 이 정도로 잘하는지 몰랐다"며 감탄하셨다. 아내의 음식을 맛보시고는 더욱 뿌듯해하셨다. 그날 이후로 지금까지도 아버님께서는 어머님의 미역국보다 본인의 딸이자 나의 아내가 요리한 미역국을 더 좋아하신다.
아내의 요리는 내가 봤을 때는 뚝딱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요리하기 전까지 레시피를 살펴보고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는 과정이 나의 상상 이상으로 길고 깊었다는 걸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서 알게 되었다. 어떤 재료를 골라서 어떻게 요리를 해야 아이들이 맛있게 먹으면서 영양까지 잡을 수 있을지 검색하고 또 검색하며 고민하는 시간을 옆에서 직접 보니, 아내이자 엄마로서 가지고 있는 책임감을 얼마나 열심히 수행하고 있는지 확 와닿았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그걸 깨닫고 난 다음부터는 더 감사한 마음으로 아내의 음식을 먹는다. 이제 나에게 아내가 해주는 음식만큼 맛있는 음식은 없다. 물론 지금도 라면과 치킨을 좋아한다. 나를 닮아 우리 아들도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라면이다. 하지만, 아내의 음식을 나는 가장 사랑한다. 아내가 차려주는 집밥이 가장 맛있고 내 입맛에 딱 맞다. 맛뿐만 아니라 아내의 사랑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 죽기 전에 딱 한 가지 음식만 먹을 수 있다고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아내의 음식을 먹을 것이다. 메뉴는 상관없다. 아내가 해준 음식이라면 다 좋다. 아내의 음식은 사랑의 또 다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