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27일 목요일
어머님과 아버님께서 사장님네와 함께 먹으라고 부산에서 준비해주신 장어를 저녁에 사장님 부부와 함께 바베큐장에서 맛있게 먹고, 나와 아내와 아이들은 방으로 올라왔다. 올라가기 전, 사장님께서 밤 12시쯤 되면 별이 잘 보일거라고 말씀해주셨다. 저녁을 먹고 정리가 끝난 시각이 11시 쯤이었다. 12시까지 기다리려니 아이들이 피곤해할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올라오자마자 옷을 따뜻하게 껴입고 야외 테라스로 나왔다. 아이들과 별을 같이 관찰하는 게 처음이라 설렜다. 테라스 불을 끄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을 보자마자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탄성이 터졌다. 별이 정말이지 쏟아질 듯이 많았다. 아이들은 방방 뛰며 신기해했다. 이렇게 많은 별들은 처음 봤다며 연신 "우와"를 외쳤다. 아내도 감탄해하며 별을 바라봤다. 강원도에서 군 생활을 하며 야간경계근무를 설 때 봤던 이후로 나도 오랜만에 이렇게 많은 별들을 봤다. 아이들과 함께 보는 이 광경을 놓칠 수 없어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설정값을 바꿔가며 사진을 찍었지만 지리산 밤하늘의 아름다움이 다 담기지 않았다. 아내는 핸드폰은 집어넣고 눈에 담고 가자고 말했다. 아내 말대로 핸드폰은 주머니에 넣고, 차가운 밤공기를 맡으며 지리산의 밤하늘을 한동안 감상했다. 이날의 밤하늘은 지금이 마지막이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순간이었다. 다음에 왔을 때는 또 다른 밤하늘일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순간을 사진에만 담으려고 애썼다니. 아내가 그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눈으로 직접 바라보는 시간이 그만큼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의 감동을 덜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아내 덕분에 가을 지리산의 마지막 밤을 눈에 담을 수 있을 만큼 가득 담았다.
《경험의 멸종》이라는 책 243페이지를 보면, 페어필드대학교 연구진의 연구 결과가 소개된다. 그들은 미술관에서 작품을 촬영한 관람객들은 그렇지 않은 관람객들보다 작품에 대한 기억이 적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연구를 이끈 린다 헨켈 교수는 이것을 "사진 손상 효과(Photo-Impairment effect)" 라고 불렀다. 그녀는 "사람들은 관찰을 하기보다 촬영을 한 경우 대상을 전반적으로 적게 기억했고 대상의 세부 사항도 적게 기억했다"고 말했다. "카메라의 '눈'은 '마음의 눈'이 아니"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 연구는 다른 연구자들에 의해 몇 번 더 반복되었고 결과는 같았다.
나는 사진을 찍으면 특정 상황을 더 잘 기억할 수 있는 자극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 사진을 보며 그때의 상황을 떠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린다 헨켈 교수는 대부분의 사람이 무질서하게 기록된 방대한 양의 디지털 사진 때문에 오히려 기억을 되새기고 되살리는 것에 방해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우선 사진부터 찍어놓고 나중에 봐야지. 그때 다시 보면서 기억을 떠올리면 돼.' 라는 인식이 나에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지리산의 단풍 사진도 많이 찍으려고 했고, 아이들이 얕아진 계곡에서 물수제비하는 모습도 영상으로 담았고, 밤에 불멍하기 위해 피운 모닥불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이 순간이 그냥 흘러갈까봐 아쉬워서 붙잡으려고 사진에 담기 위해 애썼다. 사진은 지우지 않는 한 그대로 있고, 기억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으니까. 그러다보니 같은 상황, 같은 곳을 찍은 사진이 많아졌다.
린다 헨켈 교수는 이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무질서하게" 기록된 사진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 사진은 기억 복원에 우수한 "회상의 단서"를 제공한다(《경험의 멸종》, 244페이지). 하지만 그건 사진을 볼 때의 이야기다. 사진을 보지 않으면 내 머릿속에 그 상황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기억에 새기기 위해서는 '그냥 이쁘니까 일단 찍어 두자'가 아니라, 이건 정말 두고 두고 보고 싶은 거라고 생각되는 것만 찍어야 한다. 아니면, 우선 찍어 놓고 그날 다시 보면서 계속 꺼내볼 사진을 선별한 다음, 나머지 불필요한 분량은 지운다. 무질서하게 저장하는 게 아니라 나만의 체계를 세워서 기록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리산에 다녀 온 글을 4편째 쓰는 동안, 사진첩을 다시 보면서 꼭 남기고 싶은 사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지웠다. 각 글에 첨부된 사진과 아이들을 찍은 사진을 제외하면 최소 50장 이상은 지운 것 같다. 무질서하게 찍었지만 지금은 질서를 세웠다. 사진을 보며 글을 쓰니 그날의 지리산이 다시금 느껴졌다. 가을 지리산의 추억을 되새기며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겨울 지리산의 설렘과 기대도 그만큼 커졌다. 지리산을 다녀온 지 열흘이 지났지만, 나와 아내는 아직도 하루에 한 번 이상 지리산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다음 달에 언제 갈 수 있는지 계속 조율중이다. 연말 스케줄이 확실히 정해지면 우리는 1월 1일 새해를 지리산에서 보낼 계획이다. 조만간 다시 만나자, 지리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