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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Nightcraw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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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원 Jan 19. 2022

깨진 날 i


 바쁘면 집부터 더러워진다. 물건 정리를 미루기 시작하면 순식간이다. 방구석엔 먼지와 머리카락이 엉켜 구르고, 쓰레기통은 미안할 정도로 꽉 찼다. 집 여기저기서 한 달치 생활이 읽힌다. 침대 바로 옆 바닥엔 지난 수요일에 벗어둔 목폴라가 허물처럼 뒹군다. 벗자마자 몸이 식는 느낌에 발 밑에 던져주고 이불로 들어갔다 그대로 잠들어버렸었다. 그제 야식으로 라면을 끓였다가 냄비며 식기를 대충 물로만 헹구고 설거지를 미룬 탓에 부엌엔 아직 라면 냄새가 고여 있다. 냉장고는 거의 공동묘지다. 냉장고를 꽉 채운 음식 중 먹을 수 있는 게 없다. 몇 달 전에 사 온 레토르트 떡볶이, 연 단위로 넘어가는 딸기잼까지. 음식을 버리면 죄를 짓는 기분에 버리지 못한 음식이 시체처럼 쌓여 있을 뿐이다.

 바빴다. 하지만 설거지 한 번 못 할 정도로 바빴던 건 아니다. 바닥을 뒹구는 목폴라를 빨래통에 넣을 틈도 없이 바빴던 것도 아니다. 냄비 하나 씻을 마음이, 목폴라 하나 집어 들 마음이 들지 않았다. 엉망인 집이 지금 내가 엉망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속이 뒤집힐 것 같다. 나 챙길 기운도 없는데 집을 무슨 힘으로 치워. 지금 집이 더러운 건 어쩔 수 없어. 아무도 듣지 않을 변명을 읊는다. 내가 나를 속이기 위한 말이므로 소리를 내어 중얼거려보지만 방을 돌아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삐죽해지고 명치부터 뜨거워진다. 부질없게도.


 귀가 깨지는 듯한 알람 소리에 침대를 훑으면 손에 핸드폰이 걸린다. 몇 시야 지금. 쉽게 뜨이지 않는 눈에 힘을 주고 실눈을 뜨니 7시. 5시 50분부터 맞춰둔 알람이 무색하게 7시다. 시끄러운 알람이 거슬려 아예 핸드폰을 두 손에 쥐고 알람이 울리는 순간마다 조용히 시키면서 잠을 이었다. 그냥 푹 자기라도 할 것이지 아침에 뭘 하겠다고. 내내 알람에 시달린 통에 괜히 더 피곤하기만 하다. 익숙한 한숨을 쉬고 뻐근한 몸통 아래 팔을 받쳐 겨우 나를 앉힌다. 지금 당장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

 따뜻한 물 아래 서서 어젯밤을 떠올린다. 오늘은 꼭 빨리 퇴근해야지, 그리고 청소를 해야지. 열 번도 넘게 다짐하며 출근했는데, 점심도 반납하고 종종거리며 쉴 새 없이 일만 했는데 또 새벽에 퇴근했다.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아니 택시를 탄 순간부터 이미 머리가 지끈하게 피곤한 상태였다. 잠깐만 쉬었다 하자는 생각으로 정말 잠깐 침대에 누웠다가 그대로 잠들었다. 졸음이 밀려와 속수무책으로 잠에 휩쓸리는 와중에도 내일 아침에 해야지, 내일 일찍 일어나서 설거지도 하고 빨래도 돌리고 쓰레기도 정리해야지 했다. 버릇이다. 한 번 잠에 들면 모든 일을 아침으로 미뤄버린다. 당장 하지 못 할 일을 내일 아침에는 해낼 것처럼. 그렇게 다짐한 백 번의 아침 중 단 한 번 실천한 아침을 떠올리면서, 내일 아침도 마치 그런 아침일 것처럼 미루는 것은 직장을 다니면서 생긴 버릇이다. 뭘 믿고 매번 아침을 장담할까.


 아, 또 멍 때리고 있다. 이러다 지각하지 또. 어느새 눈앞이 흐려 보일 정도로 뿌옇게 김이 찼다. 몇 분이 지났는지 감도 오지 않아 샤워를 서두른다. 오늘은 꼭 일찍 퇴근하고 집을 치우리라. 오늘은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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