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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Nightcraw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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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원 Feb 08. 2021

23:53


 스트레스가 쌓이면 유난히 라면이 당긴다. 나는 이걸 ‘스트레스 라면’이라고 부른다. 나는 식욕이 돋으면 혀나 배에서부터 올라오는 욕구인지 머리에서 내린 명령인지 가늠하는데, 스트레스 라면은 십중팔구 후자다. 정말 먹고 싶은 것도, 배가 고픈 것도 아닌 학습된 식욕에 가까운 식욕이라 참는 게 좋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모르는 척 져버린다. 스트레스받아서 당기는 건데 그거라도 먹어야지 왜 참아야 해, 가 나의 합리화다. 라면은 언제 먹어도 맛있지만 스트레스 라면은 당기면 참을 수 없다. 

 스트레스 라면은 언제나 생라면이다. 라면 봉지를 뜯지 않고 손바닥으로 눌러 잘게 잘게 면을 부순 다음 라면 수프를 탈탈 털어 넣은 후 봉지를 여미고는 마구 흔든다. 수프 맛으로 먹는 음식-음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이기 때문에 골고루 수프가 묻을 수 있도록 공들여 흔든다. 여러 번 흔들다가 위아래를 뒤집어서 여러 번, 양옆으로 여러 번. 그리고 큰 그릇에 봉지 째 뒤집어 수프 범벅이 된 라면을 담고 숟가락으로 퍼먹는다. 후아 후아. 매운맛에 면역 없는 잇몸과 입술이 살짝 부어오르고 맵고 짠맛에 정신이 없다. 숨을 하도 몰아쉬어서인지 가볍게 몽롱한 기분까지 든다. 물 한 통을 다 비우면서도 기어이 다 먹었다. 배꼽까지 단단해지도록 볼록해진 배를 만지니 가벼운 자괴감이 밀려온다. 이걸 대체 왜 먹었냐.

 

 자기 파괴적 행동은 오래된 습관이다. 기분이 가라앉으면 뭐라도 해로운 짓을 한다. 매운 것도 못 먹으면서 매운 걸 찾아 먹는다던가, 하품을 쩍쩍 해대면서 동이 틀 때까지 자지 않는다던가, 머리를 쥐어뜯는다던가, 몸을 꼬집고 때린다던가. 스트레스 라면은 이런 자기학대가 교정되고 순화되어 유물처럼 남은, 그 정도면 귀엽게 봐줄 수 있는 학대 행동이라 볼 수 있다.

 자기학대가 시작되기 전, 도피에 머물렀을 때. 아주 어렸을 땐 책으로 숨어 세상과 나를 단절시키는 데 그쳤다. 아이 치고 귀여운 맛이 덜했던 나는 어른들을 자주 실망시켰다. 특히 본인의 어른임을 어필하는 어른일수록 그랬다. 쉽게 무례해지고 오지랖 넓게 판단하는 그들의 말이 어린 맘에도 상처였고, 타고나기를 예민해 그런 앞에 서면 경계하고 쭈뼛이기 바빴다. 꼭 그런 어른들은 나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는 건 물론이고 엄마, 아빠한테까지 쟤는 좀 어떻고 저쩧다는 말을 해댔다. 그런 말이 시작되기 전에, 그런 어른을 피해서 나는 자주 활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책을 읽는 아이에게 대놓고 꾸중하는 어른은 없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 책 읽는 모습을 두고도 쟤는 내성적이니 어떻니 하는 소리를 들었으나 어깨너머로 들은 것이니 훨씬 나았다.

 도피가 학대로 변한 것은 4학년 즈음. 부모님 사이가 좋지 않았고, 부부관계가 부부의 관계를 넘어 자식의 정체성에까지 영향을 미칠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 그때쯤이었다. 엄마, 아빠는 함께 있기만 하면 싸웠다. 싸웠다는 말은 사실 적절치 않을지 모른다. 대부분의 싸움은 아빠의 잘못이었으나 주로 아빠는 소리를 지르고, 엄마는 소리를 견디고 가만히 바닥을 쳐다보는 식이었다. 엄마가 나와 동생을 지키는 방식은 그랬다. 가족을 유지하고, 부부가 서로 맞서 싸우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 매일 같이 서러움을 견디면서도 아이를 사랑해야 하는 엄마를 위해, 지는 방식으로 싸움을 견디는 엄마의 방식을 지키기 위해. 나 역시 집 안 곳곳에 서린 뾰족한 긴장감을 그저 감내했다. 그리고 내가 감내하는 방식은 집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밖에선 같은 반 남자애들의 골목대장 행세를 하며 스릴을 즐겼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다던가, 가파르고 긴 언덕 꼭대기에서부터 자전거로 브레이크도 잡지 않고 내려온다던가. 긴장감에 심장 박동이 올라가면 해방감 비슷한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게 시작이었다.

 불행히도 집안 분위기는 나날이 험해졌다. 아빠의 화는 갈수록 뻔뻔해졌고, 엄마는 나를 붙잡고 울었다. 아빠가 무엇에 화가 나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때로는 자기 자신에 화가 났고, 엄마의 운전에도 화가 났고, 버릇없는 내게 화가 났고, 순해서 답답한 동생에게 화가 났고, 할머니의 반찬에 화가 났다. 모든 것이 아빠가 화낼 이유가 됐고 내가 기억하는 대부분의 날, 엄마는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는 날이 더 많았을 테니 그때 엄마는 매일을 울며 살았을 것이다. 화와 슬픔에 허덕이는 두 어른은 내게 어른스럽기를 종용했다. 

 나는 결국 병들었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이제는 내 정체성이나 다름없는 수면장애와 강박은 이때 시작됐다. 매일 누군가의 눈치를 보며 사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레이더를 곤두세우고 상대의 비언어적 행동을 예민하게 해석해야 하며,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들을 컨트롤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려고 바로 누우면 천장이 성큼성큼 내려와 짓누르는 상상이 들었고, 무슨 일을 해도 성에 차지 않으면 초조함에 손을 떼지 못했다. 잠들지 못해 샌 밤도 있었고, 의도적으로 잠들지 않은 밤도 많았다. 바로 눕지 못했으므로 밤은 대부분 모로 눕거나 책상에 앉은 채 지냈다. 바로 눕지 못했으므로. 밤은 조용하고 내밀한 자기 학대의 시간이 되었다.

 중2, 그 무시무시한 시기가 되니 집 밖에서도 숨 쉴 수가 없었다. 학교 가득 사춘기의 불안이 넘쳐 모두 서로를 다치게 할 만큼 날을 세웠고 찌르는 데 서음이 없었다. 그리고 자기 학대의 정점을 찍었다. 자해라고 부를 법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손톱을 가만두지 못하거나 아프지 않게 살을 뜯고 꼬집는 것까진 평범했던 것 같다. 이건 엄마에게 들키면 안 되겠다 생각했던 건 손목을 건드리면 서다. 내 인생에서 죽음과 가장 가까웠던 시기, 나는 한 번도 죽을 용기는 가져본 적이 없었으므로 진지하게 죽고자 손목을 괴롭힌 것은 아니다. 날카로운 물체를 사용한 것도 아니고. 그럴 용기도 없었다. 그냥 손톱으로 꾹꾹 눌렀다. 상처처럼 길게 꾹꾹. 고등학생이 되고 나와 친구들이 점점 철이 들며 마음이 소란한 날이 잦아들어도 손목을 괴롭히는 버릇은 흉터처럼 오래갔다.

 다행히 대학생이 되고, 내가 꾸린 세상에서 내가 나를 감당하는 시간을 통과하며 자기 파괴는 서서히 옅어졌다. 그 역사를 샅샅이 밝히진 않을 테지만, 주로 애정과 사랑이었다. 너무 뻔하고 클리셰적인 말이라 앞의 두 단어를 쓰는 데 여러 문장을 쓰고 지웠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광주에서 동떨어진 곳에서 내가 찾은 애정과 사랑을 통해 이룬 결과라 구태의연한 표현밖에 나오질 않는다.

 손목을 괴롭히는 버릇을 발견해준 사람이 있었다. 산책을 하던 여름밤 손목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날 세워두고 편의점에서 귀여운 밴드를 사다 붙여주며 그랬다. 아프지 마. 그 한 마디로 4년 묵은 버릇은 버릇도 아닌 것처럼 깨끗이 나았다. 절절한 사랑도 아니었다. 사랑은 무슨, 노는 사이에 가까운 그냥 그런 사이였다. 그 정도, 맘을 간질이는 귀여운 애정만으로도 옅어질 수 있는 거였다 그게.

 이후로도 내게 사랑이 다녀갈 때마다 나를 파괴하는 행동이 교정되었으나 결코 자기 파괴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나를 촘촘하게 사랑하는 이들의 눈에 걸릴만한 물리적 파괴가 줄고 수면 패턴으로 활동 반경을 옮겼다. 폭식과 절식을 반복한다던가, 겨울잠 자는 동물처럼 열 시간 넘게 자다가도 이틀 동안 한 숨도 자지 않는다던가. 아마 죽을 때까지 자기 파괴적인 습성은 버리지 못할 거다. 불쑥 맵고 짠 음식을 몸에 때려 붓는다던지, 관절이 아릴 정도로 뛴다던지, 끈적한 상념에 고여 잠을 자지 않는 행동을 자꾸 하겠지. 그래도 이제 죽음에 가까운 행동을 하진 않으니 다행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정도 학대쯤이야 버틸 수 있는 수준들이니 얼마나 다행인가. 라면 수프에 쓰린 속을 움켜쥐고 시작하는 아침에 자괴감이 들긴 하지만 절망적이진 않으니. 나를 해치고 싶은 마음에 불쑥 져버리고 싶은 밤이 그렇게 점점 옅어지진 않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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