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아빠 차가 뭐였더라. 모하비였던 것 같다. 광주에 뿌리를 둔 우리 가족의 자동차는 언제나 기아 자동차였고 업보처럼 짐을 잔뜩 싣고 다니는 아빠는 큰 차만 탔기 때문에 모하비였을 거다. 입학 준비를 하기엔 이른 1월 중순부터 아빠는 서울에 내 자취방을 구하고 이사할 계획을 세웠다. 개강은 3월인데 왜 이렇게 서두르냐는 질문에 아빠는 하루라도 더 스무살을 즐기고 서울에서 자유롭게 지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입학이 다가오면 어차피 집 구하기 힘들어지기도 한다며. 뭐든 장비 빨을 먼저 세우고 보는 아빠는 이사를 서두른 건 물론이고 서울 가서 사도 될 가구며 잡동사니들을 진작부터 광주로 시켰고, 덕분에 나는 가늘고 기다란 행거 기둥과 뒷자리에 구겨져 서울로 향했다. 이러다 타이어 펑크 나는 건 아닐까하면서.
뒷자리 끝에서부터 길쭉하게 튀어나온 행거도, 보자기에 꽁꽁 봉인된 이불도 내 취향은 아니다. 모하비를 꽉 채운 짐의 절반은 아빠가, 절반은 엄마가 사버린 것들이다. 실컷 자취방 꾸밀 생각에 신나 있던 와중에 나도 모르는 새 이미 주문이 완료되어 속속들이 도착하는 자취품들을 보고 얼마나 흥이 식었는지 모른다. 모름지기 부모님과 딸의 취향은 큰 카테고리가 같아도 디테일이 다른 법이다. 뽀얀 철제 행거를 염두에 둔 '미색의 행거'라는 비교적 구체적인 주문에도 아빠는 연한 나무 무늬를 골랐다. '포근한 이불'을 두고 나는 폭신한 호텔 침구를 떠올렸고 엄마는 부들부들한 극사세 이불을 골랐다. 스무 살 처음 시작하는 자취는 조금 더 감성적인 물건과 함께 시작하고 싶긴 했는데 말이지. 나쁘진 않은데 또 마냥 좋지도 않은 미묘한 이 물건들은 일종의 세대차이일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못 품을 것도 없지. 짐 사이에서 약간 결연한 마음이 되었다.
멀미가 심해 차 안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차를 타자마자 잠들 생각이었는데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울렁이듯 울컥하는 이 기분은 어젯밤부터 달라붙어 잠을 방해하고 있다. 돌돌 말아 끈으로 꽉 묶은 라텍스 매트리스를 끌어안고 광주에서 서울까지 네 시간 남짓을 달리며 나는 이 기분에 어떤 단어를 붙일 수 있을까 한참 생각했다. 섭섭하다. 아쉽다. 설레다. 청춘. 꿈. 어딘가 모자라거나 느끼한 말들만 맴돈다. 묵직하게 흔들리는 자동차 진동 위에 앉아 생각한다. 상경, 그냥 상경이라고 하자. 서울로 간다는 그 말에 이 모든 말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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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구하던 날 우리 셋은 모두 풀이 죽었다. 그날은 서울에서 집을 구하기란 혹독하고 서러운 일이라는 걸 배운 날이었다. 가구는 진작부터 주문해둔 아빠는 집을 알아볼 때는 영 계획적이지 못했다. 혜화에 도착해 대충 학교 근처 괜찮아 보이는 부동산부터 골라 잡고 들어가 집을 보여달라고 할 셈이었던 거다. 우리 부모님은 맞벌이 부부다. 그 말은 우리가 집을 알아보러 갔던 그날은 주말이었다는 뜻이고 엄마, 아빠가 쉬는 날이라 서울에 갔던 그날은 남들도 쉬는 날이었다는 뜻이다. 불 꺼진 부동산을 보고 아빠는 꽤나 당황해하며 급하게 전화를 돌렸다. 다행히 대부분의 부동산 문에는 핸드폰 번호가 적힌 메모가 붙어 있었다. 서너 군데 전화한 끝에 겨우 부동산 업자를 만났을 때엔 우리 모두 이미 지친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1월 한겨울, 광주에서 서울까지 차를 타고 온 참이었다.
"전화 주신 분이죠? 이 쪽으로 가시죠."
다행히 업자는 살가운 사람인 듯 보였다. 은은하고 자연스러운 웃음으로 인사를 건넨 그는 곧바로 우리를 이끌었다. 어찌나 거침없이 안내하는지 걸음걸이만으로 이미 집을 구한 것처럼 안도감이 들었다. 훌쩍 먼저 도착해 올라가자며 가리키는 손 끝에 낡은 유리 현관문에 놀라긴 했어도 학교 근처라 오래된 건물이 많은가 보다 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채 한 시간도 가지 못하고 부동산 업자가 보여주는 방을 보며 우리는 차례로 말이 없어졌다.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으나 서울 집값은 비싸도 너무 비쌌다. 이왕이면 학교 다니기 편하도록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위험하지 않게 큰 길가 어둡지 않은 곳으로. 최소한의 조건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하나 비용이 되면서 방 크기는 예산에 맞추어 점점 줄어들었다. 이 돈을 들여도 겨우 이 한 칸 방이라고? 현실에 두드려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어른들이 옵션이며 집 값을 이야기하는 사이 핸드폰으로 광주 부동산 시세까지 검색하며 궁금한 적도 없던 부모님의 연봉을 가늠했다. 서울에 집 있는 사람은 정말 부자였구나. 얼얼한 정신을 겨우 잡아 나는 여기도 괜찮아, 저기도 괜찮아했다. 엄마, 아빠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초등학교 입학생이 된 기분이 들었다. 대학생이 아니라.
"이 예산으로는 방 구하기 힘들어요."
살갑던 업자의 목소리는 어느새 새침해졌다. 얼마나 새침했는지 그가 집주인이라도 되는 지를 가늠하느라 어른들끼리의 대화를 한참이나 관찰할 정도였다. 얄미운 목소리에 서러운 맘이 울컥 치솟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거다. 서너 개 되는 방을 보여주고 퉁명한 말을 뱉는 저 얄미운 입을 꽉 잡아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아저씨는 얼마나 부자인데요. 어떤 집에 사시는데요. 광주에서 왔다고, 우리가 사투리를 쓴다고 괜히 무시하는 거 아냐? 삐죽이는 마음을 달래느라 혼났다. 자식 둔 죄 밖에 없는 두 사람의 고민을, 기껏 벌어 마련한 그 예산을 별것 아닌 숫자로 취급하며 기 죽이는 저 아저씨의 입을 콱.
선생님 월급으로는 부담스러운 월세에도 딸 둔 부모 입장에서 마냥 예산을 타협할 수는 없었던 엄마와 아빠는 머리로 몇 번 계산기를 두드리고는 결국 예산을 올렸다. 몇 달 혹은 몇 년 간의 생활비, 몇 년 들어둔 보험, 자동차. 어떤 것이었는지는 몰라도 그 계산으로 둘은 분명 무언가를 포기했을 거다. 서울 살이는 내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그 뻔한 사실을 집을 구하며 겨우 알았다. 대학만 가면 다 된다며. 드라마에서 들은 것 같은 목소리가 머리에 스쳤다. 대학만 붙으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는데, 그저 스물을 시작하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내 이십대가 부모님에게 몇 년 치나 되는 빚이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어디까지 당연하게 생각했던가. 아직 내 스물은 시작도 않았는데 어영부영 운을 뗀 어름의 마음만 무거워졌다.
점심 즈음 시작한 원룸 투어는 해가 지고 나서야 끝났다. 어렵사리 방을 정하고 계약서를 쓰던 와중 엄마는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엄마 운다, 울어. 아빠의 장난 섞인 목소리에 나도 울고 싶어 졌다. 이 복잡한 마음에는 또 무슨 말을 붙여야 할까. 내가 앞으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 드디어 서울이다 하는 기대감, 이제 집을 벗어났다는 안도감, 부모님에 대한 부채감, 계속 혼자 살 게 될 것이라는 막연함, 외로움. 이것들에는 어떤 말이 어울리려나. 가슴께부터 눈물이 차오르는 느낌에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울 것 같은 마음만 뚜렷해지고 아무 말도 고르지 못하는 새 엄마는 발간 눈으로 돌아왔다. 운 흔적이 분명한 얼굴에 나는 오히려 의젓하게 허리를 고쳐 앉았다. 내가 원해서 왔잖아. 난 울면 안 되지. 그렇다고 울고 온 엄마 앞에서 웃을 수도 없어서 어색하게 굳은 얼굴만 했다. 차라리 속 없는 척 웃기라도 했으면 엄마, 아빠도 따라 웃었을지도 모른다. 속 없는 척도 못하게 속 없는 나는 큰 마음을 쓴 부모님을 웃기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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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들고 먼저 올라가 있어."
자취방까지 장장 네 시간 반을 달렸다. 건물 1층을 차지한 주차장은 차 두 대가 빠듯하게 들어갈 크기라 주차하기 전에 엄마가 짐을 차근차근 내리면 내가 방 안으로 옮기기로 했다. 간단한 짐을 먼저 챙겨 들고 4층 계단을 올라 문에 붙은 숫자를 더듬는다. 401호, 402호... 이제 내 주소가 될 숫자 앞에 짐을 내리고 데면데면한 마음으로 열쇠를 꽂아 돌린다. 2003년에 지은 나이 든 건물에는 공동 현관문을 빼고는 도어락도 달리지 않았다. 철컥. 묵직한 쇳소리와 함께 잠금쇠가 풀리는 약한 반동이 새삼 오랜만이다. 생각해보니 열쇠를 쓰는 건 초등학생 이후 처음이다. 다시 열쇠를 뽑아 잃어버리지 않게 주머니에 잘 넣어두고 손잡이를 잡는다. 후. 괜한 긴장감에 큰 숨을 내쉰 것이 무색하게 덜렁 가볍게 문이 열린다. 문 너머 연한 베이지색 장판이 보이고 한눈에 작은 방이 다 들어온다. 책상 놓고 매트리스 깔면 화장실까지 서너 걸음만에 도착할 수 있는 크기의 방. 집에만 있으면 다리 근육이 퇴화될지도 모르겠는데.. 계약할 때 요리조리 뜯어본 방인데도 새삼스럽다. 집을 알아보며 알게 된 것은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한 대부분의 스물이 이 정도 크기의 방에서 산다는 거였다. 그래, 적어도 2년은 이 방에서 지내는 거지. 아니. 서울에서 사는 이상 어쩌면 계속 이런 집에서 지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벽엔 에어컨도 달렸고, 싱크대 끝엔 작은 드럼 세탁기도 있다. 스물이 혼자 지내기엔 모자라지 않지. 나도 모르게 뱉어버린 큰 숨을 줍느라 긍정적인 말을 웅얼거렸다.
"그래도 입주 청소는 깨끗하게 잘 됐네."
퍼뜩 정신을 깨우는 엄마 목소리에 소용없는 생각은 얼른 치워버리고 복도에 쌓이기 시작한 짐을 안으로 옮긴다. 이 와중에도 부지런한 두 어른은 1층과 4층을 오가며 순식간에 짐을 다 날라버리더니 합의라도 한 것처럼 구역을 나누어 닦고 치우기 시작했다. 엄마는 방, 아빠는 화장실. 나는 멀뚱히 서있다가 엄마가 닦으라는 곳을 닦고 아빠가 사 오라는 것을 사 왔다. 얼쩡거리지 않는 게 돕는 거랬다, 엄마가. 그렇게 저녁이 되니 반나절만에 이사가 끝났다. 방이 작으니까 청소는 빠르네. 혼자 살기엔 적당하겠어. 그래도 몇 시간 있었다고 적응이 되는지 슬슬 정이 드는 것도 같다.
"저녁 먹자."
이사 날 아침에도 부지런히 반찬을 챙긴 엄마 덕에 계란말이와 김치찌개가 뚝딱 차려졌다. 내 키만 한 작은 냉장고에 벌써 반찬통과 과일이 한가득이다. 김치는 큰 통 하나를 꽉 채웠고 작은 반찬통에 멸치볶음, 진미채, 콩자반이 들었다. 자취생이라면 이런 반찬 한둘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사는 법인가. 나 마른반찬 안 좋아하는데.. 애써 챙겨준 반찬이 벌써부터 숙제 같다. 엄마가 싸준 건데 그래도 먹어야지. 일단은 내가 좋아하는 계란말이를 오물거리고 김치찌개를 크게 떠서 맛있게 먹는다. 엄마는 김치와 계란으로 하는 요리는 다 잘한다.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나서야 하루가 끝났다. 이사에 동네 구경까지 하루 만에 끝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내 성격이 급한 건 다 엄마, 아빠 닮아서다. 드디어 불이 꺼진 좁은 방에 셋이 가로로 누웠다. 세로로는 성인 세 명 누울 자리도 나지 않는다.
"내일은 서랍장 사러 나가자. 혼자 살면 심심한데 화분도 하나 놓고."
"옷걸이도 더 사야 돼. 화장실 슬리퍼랑.."
하루 종일 종종거리며 일을 하고도 아직도 남은 옷과 짐을 정리할 궁리로 머리가 바쁜지 투 두 리스트가 끊이질 않는다. 솔직히 나는 뭘 챙겨야 할지 모르겠으므로 가만히 듣기만 한다. 지내면서 필요한 거 천천히 사면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은 굳이 꺼내지 않는다. 맘이 놓이지 않는 둘의 걱정은 자르지 않고 하게 두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효도다. 아무리 봐도 방이 좁아. 그 와중에도 아빠는 방이 좁은 게 걸리는지 좁단 말을 계속한다. 모로 누운 엄마는 내 이마를 가만가만 만지면서 자꾸 그런다. 언제 다 커서. 어휴, 언제 이렇게 다 커서. 서울에서 혼자 어떻게 지내려고.. 눈물이 날 것 같아 눈을 꾹 감고 잘 지낼 수 있어 속으로 대답한다.
나는 이 날만 기다렸는 걸. 엄마, 드디어 서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