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물건은 금방 망가져버린다. 망가진 피아노를 이제는 팔아야겠다는 엄마의 말에 알았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다. 내가 광주를 떠난 후로 누구도 치지 않는 피아노를 오래도 안고 있었지. 언젠가는 피아노를 떠나보내야 하는 날이 오겠지 여러 번 생각하고 상상했던 장면인데도 이별 선고는 기어이 심장을 내려 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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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상만 남은 시작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유치원 선생님이 재롱잔치 연습에서 실수한 내 종아리를 멍들도록 때렸고, 엄마는 유치원과 담판을 지었다. 내 기억은 아니다. 그랬다고 들었다. 겨우 다섯 살 된 애 다리를 어떻게 그렇게 때릴 수 있냐고 소리를 높이던 엄마만 희미하게 떠오른다. 우리는 당장 그 유치원을 그만두었고, 집에 어린애들 둘만 달랑 놓고 출근할 수 없었던 엄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애초에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당시 우리는 고흥읍에 살았고, 읍에 산다는 것은 유치원의 선택지조차 제한된다는 뜻이다. 결국 학교 입학까지 한참 남은 동생은 교회가 운영하는 유치원에, 나는 유치원 대신 피아노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피아노가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였고, 어릴 적 피아노를 배웠던 엄마의 낭만이기도 했다.
쇼팽 피아노. 유치원 대신 보내진 쇼팽 피아노는 두 자매가 운영하는 곳으로 가정집을 개조해 구조가 독특했다. 거실엔 원장실을 겸한 리셉션이 있었고 기다란 부엌의 기다란 테이블엔 아이들이 매달려 피아노 문제집을 풀었다. 큰 방엔 한 평 남짓한 연습실이 여러 개, 복도마다 피아노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두 자매 외에 다른 선생님은 없었으므로 둘은 부지런히 큰 방과 복도를 옮겨 다녔다.
나의 선생님들은 어린아이에게 모질지 못했다. 교육열에 불타오르는 편도 아니었던 데다 아무튼 물렀다. 손을 계란처럼 예쁘게 말지 않는다고 손등을 때리는 일은 결코 없었다. 아직 건반을 누를 힘도 부족한 손목 아래 부목처럼 받쳐진 선생님의 손가락은 부드럽고 든든했다. 사과를 칠하며 할당량 채우듯 피아노를 친 적도 없었다. 사과 대신 규칙 같은 것은 있었다. 내가 아무리 소나타를 좋아한다고 해도 반드시 하농 10분, 체르니 20분을 친 후에 소나타를 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설명이 붙었다. 하농으로 손을 데우고, 체르니로 예쁜 소리를 내는 법을 익히고, 소나타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가끔 취향에 맞지 않는 소나타를 대충 넘기려 할 때에도 혼내는 대신 이유를 말했다. 왜 이 단계를 거쳐야 하는지, 왜 이 곡을 끝까지 해내야 하는지. 그냥 시키는 법은 없었다.
내 세계는 집과 피아노 학원이 전부였다. 쇼팽 피아노에 나보다 오랜 시간 머무르는 아이는 없었다. 두 시간씩 피아노를 치고, 학원 책꽂이에 꽂힌 위대한 음악가들을 읽고,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문제집을 풀거나 다시 연습실에 들어갔다. 상냥한 선생님, 내 몸짓에 그대로 응하는 피아노. 유치원을 졸업하지 못한 내게는 그런 것들이 필요했다. 내가 실수하고 까불 수 있는 어른과 아무 때나 찾을 수 있는 친구가. 그러니 어떻게 피아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늘 그곳에서 피아노와 피아노 소리와 함께했다.
초등학교 입학 선물로 큰 방구석에 갈색 피아노가 들어왔다. 광택 나는 갈색 피아노는 사슴 눈처럼 아주 맑고 반질반질했다. 선물은 놀랍게도 할아버지가 주신 것이라 했다. 피아노가 생겼다는 사실보다 할아버지의 선물이라는 점이 더 놀라웠던 것 같다. 늘 할머니와 함께 살았으나 할아버지는 일 년에 한 번도 볼까 말까 했으므로. 피아노를 받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기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제 나는 어디서든 피아노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 모두 사슴 같은 피아노를 사랑했다. 엄마는 어린 시절을 더듬듯 피아노 뚜껑과 건반을 훑었고, 할머니는 먼지 앉을 새도 주지 않고 부드러운 천으로 매일 닦았다. 두 사람의 손짓이 어찌나 정성스럽고 애정 어린것이었는지 나 역시 피아노 앞에서는 저절로 손길이 조심스러워졌다. 빨간 머플러 같은 건반 커버를 조심스레 올렸고, 손 끝에 온 힘을 모아 소리 나지 않게 뚜껑을 닫았다. 결코 건반을 함부로 뚱땅거리지 않았다. 학원에서 피아노를 마구 때리는 한 남자애를 봤을 땐 얼마나 가슴이 철렁했는지 모른다. 감히 그렇게 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소중한 것을 소중히 다루는 법은 이때 배웠다. 무언가를 익히는 데에는 재능보다 좋아하는 마음이 먼저라는 것도, 계획 없이도 시간을 나누는 것이 사랑의 증거라는 것도. 전부 피아노가 가르쳤다.
그러나 뻔하게도, 사춘기에 들며 피아노를 그만뒀다. 사춘기 청소년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하는 법이다.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어떤 훌륭한 미래를 가질 예정인지 같은. 선생님은 내가 피아노를 계속하기를 바랐으나 열세 살 내 머리로는 피아노로 먹고살 궁리가 서지 않았다. 솔직히 그때쯤 되니 8년 넘게 친 피아노가 좀 질리기도 했다.
"나 피아노 그만 할래. 피아노로는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아."
성공이 뭔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으나 그럴듯한 말을 위해 성공을 들먹였다.
"공부로는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아?"
반문하는 엄마의 말은 예상 밖의 것이었으나 별 고민 없이 다시 대답했다.
"피아노보다는 낫지 않을까. 예체능은 천재들이나 하는 거잖아."
"그래, 그럼. 이제 공부해."
가벼운 대답에 더 가벼운 허락이 떨어졌다. 난 피아노가 직업인 사람 말고 피아노가 취미인 할머니가 될래.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피아노를 그만두겠다는 의사결정은 1분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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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노 가져갔어. 5만 원 밖에 안 하네.
핸드폰 대기 화면에 뜬 알림에 마음이 저 끝까지 추락한다. 스무 해 가까이 자리를 지키던 피아노는 낮은 시와 파의 소리를 잃고 중고로 팔렸다. 5만 원. 나무 값도 안 될 헐값에. 미안해. 속상해. 잘못했어. 내가 더 잘할걸. 우리의 마지막이 언제였지. 그때 난 어떤 곡을 쳤었더라. 순식간에 죄인이 되어 마지막을 더듬거려 봤자 어릴 적 시골집 큰 방에 자리하던 모습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네가 가장 소중했던 그때. 그 옛날만.
디어, 내 생의 주인공이었던 너를 떠올린다. 큰 방에 위풍당당하게 자리하던 네가 이사할 때마다 자꾸 물러나야 했던 역사를 곱씹는다. 큰 방에서 내 방으로, 동생 방으로, 그리고 우리 집을 벗어나 이제는 트럭으로. 딱 한 평만 주어지면 어떤 자리에서든 같은 소리를 내던 네게 이제 어떤 구석도 내어주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못내 미안하다. 겨우 5만 원에 팔린 너를 떠올린다. 네가 난 휑한 자리를 사진에 눈물이 난다. 섭섭해. 섭섭해 죽겠다. 느슨한 줄을 조여준 적도 없으면서, 네게 앉은 먼지를 닦아주지도 않아놓고서는. 너를 비운 자리에 이제야 넘치도록 차는 이 마음에, 충분히 공들여 사랑하지 못해 잉여로 남은 마음에 기어이 서러운 마음을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