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랗게 멍든 시간들. 46
최은영의 소설 쇼코의 미소 중 한지와 영주라는 단편에서는 어젯밤까지만 해도 다정하고 친밀했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싸늘하게 변해서 자신의 인사도 받아 주지 않는다. 1인칭 관점에서 서술되는 이야기라서 독자들도 상대가 왜 저렇게 한순간에 달라졌는지 속수무책 알 길이 없다. 만약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어젯밤까지만 해도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던 좋아하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해 당신의 인사도 받아주지 않는다면?
몇 년 전,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나는 오열했다. 내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이별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고통스러웠던 그 최초의 기억을 다시 생생하게 경험해야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고통의 핵심은 ‘무지’다. ‘이해할 수 없는’ 단절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보다 잔인한 것이 있는가. 상대가 떠나갔다는 사실보다 상대가 왜 떠나간 것인지 영원히 알 수 없게 된 채로, 그저 상대의 선택을 받아들이기만 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욱 잔인하다.
나는 이 소설이 사랑을 통해 인간의 앎에 대해 질문한다고 생각했다. 당신은 사랑하는 그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우리는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알 수 있는가?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때 내가 사랑하는 것이 상대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헤어지기 직전 기차를 기다리면서 셀린느는 말한다. 자신에게는 상대에 대해 완벽하게 알게 되는 순간이 그 사람을 정말로 사랑하게 되는 순간이라고. 셀린느에게 사랑은 곧 앎이다.
나 역시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등을 돌린 채 침묵으로 일관하는 사람의 뒤에 서서 절박한 심정으로 요청한 적이 있다. 나는 단지 이해하고 싶을 뿐이라고. 네 감정과 생각들을 내게 들려주면 안 되겠냐고. 그러나 이 요청이 누군가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너무 많이 묻는 일이 그 사람을 궁지로 몰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누군가에게는 앎이 사랑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신뢰이자 보호라는 것을 몰랐다. 사랑하려 할수록 증오를 되돌려 받으면서 그때 나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누굴 사랑하게 되느냐 따라 매번 다르게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됐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 자존심은 반드시 일정한 거리를 확보해야만 가능한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 사람이 대화하고 만나는 내내 도저히 넘을 수 없는 계급의 차이가 선연하게 부각된다. 그럼에도 그들은 저녁마다 함께 식사하고 밤 10시가 될 때까지 매일 함께 텔레비전을 본다. 그리고 나선? 그뿐이다. 그 시간이 마냥 아름답게만 묘사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종종 자신에게 예민한 부분을 지적당하거나 불편해하는 지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어떤 계기로, 마침내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같이 살자고 한다. 이건 분명히 프러포즈지만 제안하는 사람은 그것이 프러포즈가 되지 않도록 유의하여 제안한다. 우리는 남매처럼 살면서 서로를 잘 돌볼 수 있지 않겠냐. 제안을 받은 이는 이 제안에 깊이 상처 받았다는 사실을 감추면서 같이 살 수도 있을 집을 보란 듯이 팔아버린다.
누군가에게는 이 이야기가 자존심 때문에 함께보다는 혼자를 택한 바보들의 단순한 이야기처럼 읽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럼에도 이 모든 불협화음과 신뢰 없음과 두려움 속에서도, ‘지금’을 함께 나누는 순간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그들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배제한다. 그것이 그들을 결코 ‘함께’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삶이란 아무리 철저히 통제한다고 해도 그러한 구획을 매번 넘어서는 사건들의 연속이어서, 그들 사이에서는 무언가가 계속 발생한다. 그들이 그 사건들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고 서로를 연인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는 사이라고 단언하기는 쉽지 않다. 당사자들이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은 사랑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만약 가능하다면 이때의 사랑이란 선언이나 선택이 아니라 다만 사건일 것이다.
얼마 전 한스 바인가르트너 감독의 신작인 에브리타임 룩 앳 유에서는 시간성을 통해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모든 것이 순간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슬픈데 편안하다고. 우리는 누구도 서로를 소유할 수 없으며 그것을 인정해야만 행복해진다고. 다소 상식에 가까운 관념적 진술이었던 지라 나는 별 감흥 없이 그 대사를 보았으나 번역된 두 감정적인 단어, 슬픔과 편안함에 대해서라면 무언가 가까이 와 닿는 것이 있었다. 누구도 서로를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기도 하지만 사실 편안한 일이기도 하지 않은가. 우리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거나 알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동시에 다행스러운 일이지도 않은가. 슬픔과 편안함, 슬픔과 편안함.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너무 가깝지는 않기를 바라는 모순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며 이 모순 속에서도 ‘지금’을 함께 나누는 일들이 계속 벌어진다는 것이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