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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의 책방 Apr 26. 2024

좋은 사람은 어디에 있을까

조금은 특별한 하루


이 글은 <월간 에세이> 2024년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당신 요즘 참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것 같아.”

주말 동안 집을 비우고 지쳐 돌아온 남편을 보며, 아내가 한 말입니다. ‘아휴, 힘들어’하는 소리와 달리 표정은 웃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런가 봐. 좋은 사람들 만나서 나도 물들어 가는 것 같아.” 잠시 대화가 끊어졌습니다. 아내는 빨래를 건조대에 널며 무심한 듯 말했습니다. “당신도 좋은 사람이야!”

 괜시리 부끄러웠지만, 아내의 말이 고마웠습니다. ‘내가 그런 사람인가? 나의 못난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당신인데…’ 지난 추석, 아버지와 날 선 대화가 떠 올랐습니다. 아버지는 얼마 전 업장에서 손님과 시비가 붙어 형사재판 중이었습니다. “아부지, 너무 화내지 마세요. 한 발만 물러나면 세상에 좋은 사람이 더 많아요.” 연휴 내내 아버지는 그 일로 화를 참지 못하셨습니다. 일흔이 훌쩍 넘은 연세에 혹 탈이라도 날지 걱정되어 한 말이 오히려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습니다. “좋은 사람? 허, 네가 그 나이가 묵도록 아직 세상을 몰라서 걱정이데이. 세상에 좋은 사람이 어딨노?” 평생을 살얼음판을 걷듯 살아왔고, 당신을 무시하는 사람에겐 꼭 되갚아 주었다는 아버지는 이젠 자식마저 당신 마음을 몰라준다며 속상해했습니다. “미안해요. 우리 아부지 주변엔 그런 사람밖에 없었을까, 아부지 삶을 들으면 제가 너무 마음이 아파서 그래요.” 그제야 아버지의 표정이 가라앉았습니다. 


  지난 10월 28일, 카이스트 정재승 교수님의 주도로 2010년에 시작해 올해 14번째를 맞은 <10월의 하늘>이 열렸습니다. 전국 중소도시 50개 도서관에서 100명의 과학자가 자발적인 참여로 재능기부 강연을 하는 행사였습니다. 저는 정재승 교수님의 초대로 <10월의 하늘> 준비위원으로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이 행사의 첫 시작은 정말 극적이었습니다. 2006년, 서산의 한 도서관에 정교수님이 초대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강연을 마친 뒤 아이들은 ‘과학자를 처음 본다’며 정교수님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싶다고 뜯어(?)가기까지 했지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잊지 못한 교수님은 그로부터 조용히 방학 때마다 강연 기부를 시작했습니다. 2010년 어느 날 정교수님은 트위터에 ‘이런 일을 하고 있어요. 함께 하지 않을래요?’라는 메시지를 띄웠는데, 폭발적인 호응과 참여가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이로부터 매년 10월의 마지막 주 토요일, 가을하늘만큼이나 청명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세상을 향해 선한 마음을 전해왔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뒤풀이 자리에서 정재승 교수님은 한가지 소망을 이야기했습니다. “<10월의 하늘>이 계속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정말 순수하게, 좋은 강연을 아이들에게 전해줄 과학자들의 참여가 필요해요.” 그는 개인의 사적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참여, 양질의 과학강연이라는 모토가 훼손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10월의 하늘>을 지속할 수 있는 관건임을 강조했습니다. 각자의 수고로움을 뒤로하고 <10월의 하늘>에 기꺼이 동참하는 모든 이들이 이 취지에 공감해주길 바랐습니다. 

2023년 <10월의 하늘> 뒷풀이 모임

 이튿날 경의선 숲길에서 소설가 이우와 만났습니다. 오래도록 헤어졌던 벗을 만난 듯 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첫 소설 <레지스탕스>에서 나의 모든 소속을 지운 뒤, 홀로 남은 나는 누구일까를 고민했다면, <서울 이데아>에서는 결국 우리는 어느 곳에 속함으로서 자신의 근거를 확인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그의 말을 듣다 문득, 내가 누구와 함께 있고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나의 좋음과 나쁨이 다르게 드러낼 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못난 모습보다 좋은 점을 먼저 바라봐주는 아내, 선하지 않은 세상이 있음에도 선한 마음을 물들이는 정재승 교수님, 시지프 신화처럼 부조리한 현실에도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치열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작가 이우, 세상에 좋은 사람은 없다면서도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아버지…. 선함은 늘 상처받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침 출근길에 가끔 독서와 커피 한잔을 하기 위해 들리는 도넛가게가 있습니다. 사장님은 바삐가느라 반쯤 돌아선 제게 ‘행복한 하루 되세요’라며 인사를 건내곤 했습니다. 오늘은 먼저 인사를 건냈습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그는 놀란 눈을 동그래 뜨고 웃었습니다. 그리고는 제게 말했습니다. “혹시 독서모임 만들어보지 않을래요? 제가 첫 회원이 될께요.” 가느다란 실이 사람과 사람 사이로 이어집니다. 그 실은 작은 친절, 작은 선함으로 강해지는 실입니다. 어디에나 있었던 좋은 사람, 어디에나 있는 선함과 선함을 잇는 실입니다.


           

<월간 에세이> 2024년 4월호 통권 444호


* 표지사진 : 10월의 하늘 준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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