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말을 흐리는 이유
일정 규모를 넘어선 회사라면 업종을 불문하고, 불분명한 언어를 일상적으로 구사하는 상사가 적어도 하나둘쯤은 포진해 있기 마련입니다. 하는 말 대부분엔 저기, 그, 어, 음, 거시기, 뭐시기, 있잖아 등이 가득하지만 마무리만큼은 알았지?로 귀결되는 그런 스타일의 화술가 말이죠.
성격이 급하고 언변이 부족해 말로 하는 전달에 어려움을 겪는 분이라면 그나마 어느 정도는 이해와 동정의 여지 또한 있겠습니다만. 문제는 맘만 먹으면 지시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양반이 일부로 모호한 표현을 한껏 동원해 뜻을 전하는 상황입니다.
떠올린 바를 명쾌히 설명할 역량이 있는 사람인데도 말을 굳이 뭉갤 이유가 존재할까 싶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미지 관리나 처세를 위해 화법을 일부러 흐리는 분은 실상 그리 드물지도 않습니다. 원하는 바를 노골적으로 말했다간 체면이 깎일 꼴을 염려하거나, 일이 잘못될 경우 책임 소재를 역추적 당하는 리스크를 지고 싶지 않아 말을 대충 흘리고선 눈치를 주며 헛기침을 뱉는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팔로워 대다수는 좋건 싫건 통역사 내지 독심술사가 돼야만 합니다. 직업적인 관점에선 둘 모두가 상당한 전문성과 집중력을 요하는 분야인데요. 본업에만도 치이는 직장인들이 전문직급 테크닉을 발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죠. 설령 어찌어찌 흉내를 내 본다 한들 그 과정에서 유발되는 피로와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준을 넘어설 테고요.
실제로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 2018년 10월 직장인 4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업무 방식 실태 조사'에서 설문에 응한 이들은 조직의 업무 방향성(업무의 목적과 전략이 분명하다)과 지시 명확성(업무지시 시 배경과 내용을 명확히 설명한다)에 100점 만점 중 각각 30점, 39점만을 부여했습니다. 지시를 명확하고도 분명히 전하는 회사나 상사가 우리 사회 전반에선 오히려 적고 드문 편인 셈이죠. 뒤집어 말하자면 한국 직장인 중 태반은 의사소통 능력이 부족하거나 의중을 작심하고 감추는 윗사람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 말할 수도 있겠고요.
물론 정상적인 소통이 어려운 상급자일지라도 실력만큼은 압도적인 수준이라면 조직 입장에서야 다소간의 불편이나 실무진의 희생을 감내하더라도 그를 기용할 유인이 충분할 것입니다. 창작물 속 인물이긴 하지만, 다나카 요시키의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 ‘은하영웅전설’에 등장하는 ‘침묵 제독’ 에른스트 폰 아이제나흐를 그러한 예 중 하나로 들 수 있겠습니다. 간지럼을 태워도 입만 벌릴 뿐 소리를 내진 않을 정도로 말이 없는 인물이었지만, 능력 하나는 확실했기에 은하제국군에선 위관급 부관을 붙여 줘서 그가 별다른 난관이나 지장 없이 역량을 펼칠 수 있도록 지원했죠.
하지만 묵언을 고수하는 와중에도 원수 계급장을 받을 정도로 유능했던 아이제나흐 같은 지극히 드문 사례가 아닌 이상, 전달력이 부족하거나 진솔한 소통을 회피하는 리더는 애초에 조직 차원에서 능력이 부족한 인물로 간주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밑의 멀쩡한 직원들이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과도하게 받거나, 윗선의 애매한 지시로 벌어진 일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튕겨 나가는 사태가 빈발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조직 입장에서야 어느 쪽이건 손해가 막심한 일임은 그저 자명하고요.
달리 말하자면, “걔가 말주변이나 표현력은 좀 모자라도 일은 잘해”라는 옹호가, 사람을 여럿 지휘해야 하는 리더를 대상으론 도통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이죠. 리더의 커뮤니케이션을 제외한 나머지 스킬이 정히 아깝다면 소통 역량을 기르도록 요구해야 할 것이고요. 책임을 피하려 말을 일부러 흩트리는 보신주의자는 회사에 해가 될 인물이니 가급적 신속하게 쳐내야 옳을 것입니다. 실무자 시절엔 그토록 강조되는, 조직에 기여하는 동시에 주변엔 피해를 끼치지 않고자 끊임없이 배우고 익히며 실력을 배양하려는 노력이, 과연 리더 자리에 올랐다는 이유만으로 간과되거나 면제받을 수 있는 과업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