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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웅 Dec 21. 2022

열역학 제2법칙을 증오해

난 그런 이세상 전부를 증오해

“현재는 한순간 과거가 되어 버리지! 누구나 언젠간 죽어! 운명은 인간의 지식을 뛰어넘어 미쳐 날뛴다고!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야! 난 그런 이 세상 전부를 증오해! 열역학 제2법칙을 증오해!”


/만화 ‘총몽’ 中


1990년대 SF 명작으로 널리 인정받는 만화 ‘총몽’에서도, 작중 최고의 대사 중 하나로 꼽히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캐릭터 디스티 노바(Desty Nova)의 절규입니다. 그의 외침엔 시간의 흐름과 존재의 소멸이라는 고고한 흐름을 거스르고픈 욕망이 절절히 묻어나는데요.


스포일러가 될 법한 내용인지라, 그가 작중에서 끝내 열역학 제2법칙을 극복해 냈는지를 여기서 말씀드리긴 뭣합니다만. 아무튼 그의 바람은 순탄히 달성할 만한 성질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세간엔 ‘엔트로피’로도 잘 알려진 열역학 제2법칙은 우주 전체의 종말과도 이어지는 자연 전체의 거대하고도 묵직한 법칙이니까요. 영국의 천체물리학자인 아서 스탠리 에딩턴은 "만일 당신의 이론이 열역학 제2법칙을 위배한다면 빨리 포기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런 이론은 아무리 고집해봐야 희망이 없다"고 단언했을 정도죠.




디스티 노바야 그나마 상궤를 벗어난 정신만큼이나 능력 또한 보통은 아니었기에 열역학 제2법칙에 대한 증오라는 광기 어린 발상에도 어느 정도나마 발맞춰 갈 수 있었습니다만. 현실엔 야망을 감당할 깜냥이라곤 전혀 없는데도 수레에 맞서는 사마귀마냥 백일몽에 무엄히 덤벼 대는 캐릭터가 오히려 보다 많은 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물이 조직에서 리더 자리를 맡거나 결정권을 쥐는 순간 모두의 괴로움은 시작되기 마련이죠.


실제로 지난 2021년 1월 국무조정실이 전국 성인 남녀 15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발표한 ‘갑질 인식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26.9%가 설문 직전 1년 이내에 갑질을 경험했으며 이는 주로 ‘직장 내 상사-부하 관계’(32.5%)에서 '부당한 업무 지시(46.0%)' 형태로 발생했다 합니다.


부당한 업무 지시라 하면 흔히 계약에 없는 작업을 시키거나 규칙 위반을 강요하는 형태를 떠올리기 쉽습니다만. 비현실적이거나 달성이 불가능한 목표를 수립하고 압박을 가하는 것 또한 엄연히 부당한 업무 지시에 속합니다. 이를테면 고용노동부 산하 공공기관인 노사발전재단이 2020년 3월 발표한 ‘갑질 근절을 위한 가이드라인’에선 ‘업무상 분명히 불필요하거나 수행이 불가능한 일을 지시하거나 업무를 방해하는 행위’를 직장 내 괴롭힘에 속하는 부당행위로 간주하고 있으며, 일본 후생노동성 역시 불필요하거나 수행 불가능한 업무의 강제를 6가지 ‘파와하라’(パワハラ·power+harassment) 유형 중 하나로 지목했죠.




그럼에도 리더가 불가능한 목표를 걸어 두는 것에 나름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여론 또한 아주 드물진 않습니다. 기준을 극도로 높은 곳에 두고 달리다 보면 자연히 힘을 한계까지 쏟으며 종국엔 당초 기대보다 높은 성과를 자아내게 될 수 있다는 논리인데요.


실제 상황이 그들의 바람대로 흘러가 줄지는 의문이긴 합니다. 지난 2015년 영국 레딩 대학교 연구팀은 ‘부모의 기대가 비현실적으로 높으면 자녀 성적이 오히려 낮아진다’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들이 2002~2007년에 걸쳐 독일에서 진행된 11~16세 청소년 3530명과 그 부모들에 대한 연구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기대감이 적절한 부모보다 비현실적으로 높은 쪽이 상대적으로 낮은 성적을 기록했던 것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연구를 이끈 무라야마 코우 박사는 “과도한 기대는 자녀에게 불안감, 자신감 부족, 좌절을 안겨줘 성적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보인다”며 “기존엔 부모의 기대가 그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관념이 있었으나, 우리의 이번 연구는 그 수준이 과하지 않을 때만 성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고 설명했습니다. 물론 기대와 성취라는 흐름에 미루어 보자면 리더와 팔로워 사이에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리라는 추정 또한 무리 없이 해낼 수 있고요.


미국의 시사 주간지인 타임 역시 ‘끔찍한 상사 유형 7가지’ 중 하나로 기대치가 비현실적으로 높은 리더를 꼽으며, “불가능한 요구를 하는 상사 밑에서 일하면 일을 잘하는 사람도 자신감을 잃게 된다”고 지적했던 바가 있죠. 코우 박사가 언급했듯 기대가 적절한 수준이라면 조직원의 의욕을 자극하는 촉매로 기능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예 접근조차 불가능한 꿈을 지나치게 열망하고 사랑하는 태도는 실적 달성에 오히려 독이 될뿐더러 자칫하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까지 번질 수 있다는 것이죠.



더욱 많은 이야기가, '오늘도 출근중'에서 독자 여러분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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