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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hillip Mar 28. 2021

사의 찬미

수많은 죽음을 대하는 방법

    일요일 아침의 서면 문화로를 좋아한다. 7시 이전, 아무도 없는 공백으로 가득한 이 거리의 낯섦 만큼이나 지금 이 공간에 더더욱 머물고 싶어 진다. 정력이 고갈됨을 느낄 땐 비어있는 공간을 찾는다. 늘 사람으로 북적이는 공간, 그 안에서 이리 너른 여백을 찾을 수 있음에 더 큰 위안을 느낀다. 구원이란 게 별 게 없다. 스스로 편안함에 이르렀는지 오늘도 자문한다. 적어도 이 순간은 그러한 듯. 북적이는 인파에 곧 이 시간도 공간도 양보하여야 한다. 그들처럼 부산하지는 않도록,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싶다.


    최근 의도치 않게 죽음에 관한 글들을 꽤나 많이 접하였다. 함부로 보편적인 죽음의 의미가 뇌리에 각인될까 두려워 자꾸만 다른 이들이 꺼내어 놓은 함의들을 덧대어 본다. 피천득 시인의 글을 읽고, 사의 찬미를 듣다, 좋아하는 니체의 구절을 읊조려 본다. 그렇게 제 각기 다른 정의가 담긴 애매모호한 단어 위에 나는 단 하나의 글자도 더하지 못하였다. 죽음을 겨우 면하고 다시는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으리 다짐하였던 그 찰나의 순간, 어쩌면 그때부터 실존하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계속 마음속으로 되뇌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혹 한 번 더 필연적이지 않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면 과연 어떤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처갈런지.   


    그 수많은 정의들 중에서 나름 보편의 맥락을 찾는 다면 삶, 사랑, 그리고 죽음까지도 같은 선상에 존재함과, 더불어 숨이 붙어있는 한 인이란 존재는 끊임없이 각자가 정의한 죽음과 말 그대로 "사투"를 벌일 수밖에 없음을. 죽음을 치환하는 수많은 개념들, 이를테면 허무라던지, 허무라던지, 허무라던지, 그들조차도 내가 존재의 이유로 끝없는 소통을 꿈꾸는 한 내 무한한 자유를 침해할 수 없음을.


    내 삶은 꼭 촌극과 같아 이런 진지함이 어울리는지 조차 모르겠다. 내가 그 촌극의 주인공인지도 꽤 자주 헷갈리고, 이리 흘러가다 접하는 죽음은 얼마나 허무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습관처럼 깊이 숨을 머금었다 내뱉는다. 혹은 죽음을 한 움큼 머금었다 내뱉는다. 비어낸 자리에 더 큰 공백을 머금어 본다. 그렇게 나는 다시금 잠시나마 편안해 지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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