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가 내 삶의 끝도 아닌데 그전에 남아있는 시간을 가급적 알차게 쓰고 싶어 졌다. 한 달 반 정도 있는 시간. 몇 년 동안 굳어진 공백 때문에 용어도 새로 외워야 하고 전공책도 들여다봐야 하지만 늘 하던 일들도 차곡차곡하고 싶다. 예를 들자면 책을 읽는 일, 가고 싶은 곳을 정해서 돌아다니는 일,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 마지막으로 여행.
출근 전의 시간을 비장한 각오로 사용하는 이유는 아마도 십여 년 만의 취직이 주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아침 여섯 시에는 눈을 떠서 출근을 해야 하는 날들이 계속될 것이고 가끔은 느긋하게 출근을 해서 아이들이 잠이 들어야 하는 시간에 집에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종종 밤새 집을 떠나 있는 날들이 있을 것이다. 집에서 늘 가족들을 맞아주던 역할이었던 나는 항상 부재로 남겨질 나의 자리가 염려스럽다. 그리고 바삐 돌아가는 생활에 내가 얼마만큼의 적응력을 보일지도.
어떤 유투버는 항상 새벽 네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한다고 한다. 하루를 쪼개 쓰고 싶어서 계획을 세우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밖이 어두울 시간에 일어나는 그녀는 영양제와 꿀차를 챙겨 먹고 운동을 하고 책을 읽으면서 여유롭게 있다가 출근을 한다. 그녀만큼의 아침형 인간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은 마음만 있지 자신은 없다. 출근시간이라는 것이 없는 남편과 살아온 결혼생활 동안 나는 자고 싶을 때 자고 아이들을 보내야 할 때 일어났다가 피곤하면 조금 더 자는 생활에 익숙해졌으니까. 생각해보면 안산에서 인천까지의 먼 통학거리를 대학시절 동안 왔다 갔다 했던 것을 보면 나도 나름 바쁘고 부지런한 날들이 있었다. 실습을 다니느라고 혼자 살면서도 아침 일찍 일어나 집을 나서던 시절도. 하지만 굳어져버린 내 생활이 그때의 나를 불러낼 수 있을까. 아무튼 걱정과 불안이 많은 나라는 인간은 취업이라는 좋은 소식 앞에서도 벌벌 떨기만 한다.
운동을 가지 않는 오늘과 내일의 시간을 두고 나는 무엇을 할지를 생각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나가면 저녁 전까지 들어올 수 있는 이틀. 일단 오늘은 내가 답답할 때마다 가던 곳을 가기로 했다. 바로 제일 사랑하는 장소 고속버스터미널 지하상가. 그곳은 서른이 넘은 나이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 분기별로 가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내키면 언제든 답답함을 떨치러 가게 되는 곳이 되었다.
분명한 것은 쇼핑은 근본적인 위로가 되어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아프면 진통제를 맞고 견뎌내듯이 아픔의 원인을 벗어날 수는 없어도 적어도 통증을 이겨낼 힘은 필요했다. 나의 답답하고 가끔은 상처 받는 마음들은 그곳을 가는 길에서 조금씩 나아지고 사람들이 분주히 걸어 다니는 지하상가에 들어서면 어느덧 잊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그곳은 나에게 사랑해 마지않는 곳이 되어버렸다.
양쪽으로 뻗은 긴 지하상가의 길. 옷과 신발들로 빼곡한 곳들을 지나서 끝에 다다르면 그릇, 이불들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있고 진짜라고 해도 믿을만한 조화들, 향기와 색깔이 매혹적인 생화들을 파는 꽃집이 늘어서 있다. 주부들이 좋아하는 모든 품목들이 모여있다. 저렴한 양말과 가방, 속옷들도 있고 졸업시즌에는 꽃다발들이 가득하고 크리스마스에는 트리들이 가득해 눈 내린 세상이 되어버리는 곳. 항상 같은 패턴이지만 나에게는 갈 때마다 새롭다. 만 원짜리 신발도 즐겁고 가끔 삼천 원에 골라내는 내 눈에만 들어오는 면티셔츠도 반갑다. 세상에서는 보석을 골라내는 눈이 없는 나이지만 그곳에서는 반짝반짝 빛난다. 베이컨을 추가한 샌드위치와 커피로 점심을 때워도 뱃속이 헛헛하지가 않다. 손 가득 무언가를 고르고 사다 보니 비닐봉지가 남긴 자국이 손목에 선명하다. 가끔 한강을 건너가는 일이 수 기운이 많은 나에게 좋은 개운의 일이라더니 나의 외출은 그래서일 것이라고 이유를 만들어본다. 천 원짜리 생수를 마시고 집에 가는 버스를 탔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본다. 돈이 정말 많다면 어떤 쇼핑을 할까. 어떤 것들을 하면서 기분전환을 할까. 백화점에 가서 비싼 브랜드를 골라 가격표도 보지 않고 담는 구매를 할까. 정말 부자가 되어본 적은 없지만 그런 방식의 쇼핑은 나와 맞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안다. 나는 삼천 원짜리 에코백의 원단에 감탄하고 가게를 돌며 가격을 비교하다가 조금이라도 싸게 사는 것의 기쁨을 버릴 수가 없다. 그런 소소한 즐거움이 주는 행복은 물건이 많고 적음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취업 후 당분간 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방문한 서울 나들이는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새해가 되어서인지 간간히 보이는 타로 가게들도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는데 집에 가기 전 마지막 코스로 타로를 보기로 마음먹었다. 새로 들어가는 직장에서 얼마큼 적응하고 잘 다닐 수 있을지를 물었다. 나쁜 대답이 나왔다면 나는 입사를 취소했을까. 아마 그러지도 못했을 거면서 운명을 묻고 또 묻는다. 선택과 미래를 저울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