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관 감독의 <더 테이블>
절명을 꿈꾼들 저 꽃같이는 심장을 걸 수 없었네 // (중략) 이 여름 다 가고 붉은 두근거림마저 지면 / 당신 눈짓과 살내를 곁에 두고 오래 잊을 것이라
- 신미나 시집 『싱고, 라고 불렀다』 ‘칸나꽃 분서’ 중에서
그렇다. 우리는 저 꽃 한 송이만큼의 사랑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간의 생기와 활기를 모두 머금은 하나의 완벽한 봉오리를 잉태하지 못한다. 아마도 그것은 저물어야 할 꽃의 운명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화려한 꽃일수록 만개는 덧없이 짧다. 많은 걸 주려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던 빈자리를 만드는 일은 너무나도 두렵다.
이 테이블에만 꽃이 있어.
그렇기 때문일까, 꽃 있는 자리에 시선이 끌리는 것은. <더 테이블>의 인물들은 카페 내부에서 유일하게 꽃이 놓인 한 테이블에 머문다. 마치 그렇게 함으로써 저들의 사랑이 완벽해질 수 있다고 믿는 양. 서로 다른 사람과 사랑이 하루라는 시간 동안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생동한다. 하루가 끝나고 꽃이 저물면 그들의 사랑에도 엔딩이 찾아올 것만 같다.
오전 열한 시. 유진(정유미)은 자신의 앞에 앉은 남자와의 관계에 대해 확고하게 정의 내리지 못한다. 우리가 친구였을까, 아님 그 이상이었을까. 하지만 적어도 이 남자에 대해서는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실례되는 추문을 거리낌 없이 떠보며 사실인 것과 아닌 것들을 면전에서 저울질하는 이 남자는 눈치도 매너도 없는 사람이다. 인증샷을 찍어 올리고 직장 동료를 카페로 불러낸 그 앞에 그녀의 표정은 점차 일그러진다. 극성팬을 쫓으려고 매니저 행세를 하던 남자의 자상함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경진(정은채)은 한동안 남자를 기다렸다. 고작 세 번 만난 게 다였지만 밤을 함께 보낸 사이였고 그래서 더 애틋했다. 어느 날 남자는 해외여행을 떠났고 여자는 그리워했다. 그리움은 시간이 경과할수록 커져갔지만 연락은 한 번도 없었다. 결국 여자는 남자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오후 두 시 반. 경진은 하염없이 기다려온 남자 앞에 고개를 숙이고 눈을 피한 채 앉아있다. 감정을 숨기려고 부러 차가워진 채 한참 동안 이야기를 듣는 경진은, 지나온 과거가 아닌 현재에 대하여 묻는 남자가 이제 막 만난 사람 마냥 낯설다. 나만 그리웠던 걸까. 경진은 결국 자리를 일어선다. 붙잡고 싶은 맘에 얼결에 그녀의 손을 잡은 남자는 마음 깊숙한 데까지 싸늘해진 경진을 그제야 발견한다.
삐걱대는 대화가 잠깐 공백을 맞는 순간 그들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꽃을 바라본다. 잠시 후 유진은 자리를 일어서며 남자에게 '또 연락하라'고 말한다. 경진은 남자와 함께 행복한 표정으로 카페를 나선다. 무엇이 위태롭던 그들을 이어지게 하였을까.
자기 자신을 여배우로 정의 내리지 못하던 유진은 그 남자 앞에 있을 때 비로소 여배우가 될 수 있었다. 남자가 두고 간 시계를 간직해왔던 경진은 그 남자의 가방을 열어보고서야 자신과 동일한 남자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나를 나로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면, 내가 당신에게 그러듯 당신이 나를 계속 생각해준다면, 이들에게 눈치 없고 서툰 모습은 그 순간부터 하나도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온전한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사랑은 시작된다. 어쩌면 사랑이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는, 사람의 불완전함에 대한 증명의 행위인지도 모른다.
은희(한예리)의 사랑도 그렇다. 다른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 가짜로 살아오던 은희가 돈 없고 힘없는 말단 사원과 사랑에 빠진 것은, 부족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무언가가 그 남자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록 진실할 수 있는 순간을 놓친 채 예식에 필요한 가짜 엄마와 가짜 하객을 섭외하고 있지만, 그리고 그 끝이 불행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은희는 활짝 피어있는 꽃 앞에서 그 꽃봉오리를 닮은 사랑을 거행한다.
완벽한 모습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사랑은 없다. 그건 애초에 향이 없는 메마른 조화나 마찬가지다. 저녁 아홉 시. 꽃이 저버린 순간, 혜경(임수정)과 운철(연우진)은 사랑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다. 이들의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일시적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더 길게 드리워진 현실이라는 이름의 그림자 아래에서 이들은 마음 가는 길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더 테이블>은 관객으로 하여금 꽃이라는 존재에 대하여 주목하게 만들고 난 후 옴니버스를 시작한다. 형체를 알 수 없게 흐드러진 꽃잎과 꽃가루는 도입부의 씬을 가득 채운 채 알 수 없는 신비로움마저 안긴다. 이 영화가 꽃에 대한 예찬 혹은 꽃을 닮은 사랑에 대한 예찬처럼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들의 사랑은 꽃과 함께 시작되어 꽃과 함께 끝난다. 같으면서도 다른, 다르면서도 같은 그들의 사연이 더욱 궁금해진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