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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휘남 Nov 06. 2017

그녀가 떠나간 것은

손태겸 감독의 첫 장편 <아기와 나>

스포일러: 약함



 ‘남자는 커서도 애’라고 했던가. 이 말은 좀처럼 자기밖에 모르는 남성을 깎아내리기도 하고,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에 대한 이해를 강요하기도 한다. 말이 가진 부정적인 어감을 아무래도 지울 수가 없는데, 손태겸 감독의 첫 장편 <아기와 나>에서만큼은 이 말이 정설로 통하지 않을까 싶다. 말년 휴가를 나온 주인공 도일(이이경)의 철부지 같은 모습을 보노라면 말이다. 


 남자는 군대를 다녀와야 철이 든다고 했던가. 그러나 아기와 함께 놀러 가자는 순영(정연주)의 말에 ‘휴가를 나온 건 나’라며 애버랜드에서 놀이기구를 타고 싶다고 말하는 이 남자는 전혀 철이 들지 않은 듯하다. 군필자 도일은 여전히 입이 걸었고 술 담배를 좋아했으며 놀음 앞에 충동적이었다. 깡패 취급받는 것을 몸서리치게 싫어하면서도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다혈질에 제 앞가림도 못했고, 대화로 해결하는 법을 몰라 덮어두고 둘러대다가 일을 크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성숙할 줄 모르는 자신을 스스로도 혐오했다. 왜 이렇게 어른스럽지 못할까. 남자는 정녕 다 커서도 애인 걸까.


전역과 함께 도일의 방황은 시작된다

 <아기와 나>는 미혼부 도일이 결혼을 앞두고 사라진 아내 순영으로 인해 겪게 되는 좌충우돌을 다룬 영화다. 한 마디로 도일은 사고를 쳤고, 아기라는 사고의 책임을 전적으로 떠안게 되었다. 아이에 대한 부성애보다 꿈에 대한 열망과 성적 욕망이 당연히 더 클 20대 청춘에게 감독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실체를 안긴다. 영화가 가지는 서사적 탄력감은 이러한 드라마틱한 설정에서 시작된다. 


 이 영화는 전역을 앞두고 한없이 흔들리는 '애 어른' 도일을 성장시키기 위한 영화다. 그는 지인의 애인을 뺏었고 그녀와 사랑을 나눴고 결국에는 아기까지 낳은 미혼부였다. 20대 청춘 미혼부의 삶은, 그러나 여태껏 도일의 눈 앞에 당도한 적 없었다. 부대로 복귀하는 동시에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이 -동기들과 농구를 하고 별들을 바라보며 담배 한 모금 들이키는 일과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조망 안에서 평화롭고 안정적이던 카메라는 그러나 그가 말년 휴가를 나옴과 동시에 핸드헬드(Handheld)로 시종일관 흔들린다. 이 흔들림은 일종의 암시가 되어 미혼부 도일의 삶을 파국으로 치닫게 한다. 도일은 강제적으로 현실과 마주한다. 현실의 무게는 당연히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정도다.


순영은 아기와 도일을 남겨두고 떠난다

 영화는 도일이라는 캐릭터를 집중한다. 그런 만큼 <아기와 나>의 다른 인물들은 도구적으로 소모되는 모습을 보인다. 굉장히 많은 주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스토리의 진행에 따라 필요한 부분에서 단편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제목에 등장한 만큼 영화 전반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야 할 아기 조차 중반부를 넘어서면 도일의 짐짝 취급을 받는. 또 한 명의 주인공인 순영조차 영화의 초반부 이후 모습을 감춘다. 모든 요소들은 도일을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순영의 역할을 무엇일까. 그녀는 왜 도망쳐야만 했을까. 순영은 스마트폰 조작법을 알려달라는 엄마에게 ‘어차피 까먹을 거 뭐하러 배우냐’고 소리치는 도일 대신 차분하게 도움을 주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도일의 집안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집을 나오고, 여러 남자들을 거친 후에 비로소 도일의 가정에 뿌리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순영은 도일의 엄마를 자신의 엄마로 받아들이고서 효녀처럼 살았다. 집안 살림과 밥벌이를 도맡았으며 육아마저도 그녀가 모두 담당했다. 순영이 감당하는 현실에는 도일의 몫까지 함께 있었다. 달리 말하자면, 순영이 존재하는 한 도일이 현실을 마주할 방법은 없었다. 그러니까 순영의 도망은 도일의 성장을 위한 계기이자 동력이다.


도일은 아기라는 현실을 직시한다

 당장의 생계보다 ‘가오'가 더 중요했던 도일은 순영이 사라지면서 성장하기 시작한다. 헬스 트레이너가 아니면 일하지 않겠다고 외치던 도일은 밥벌이를 위해 전단지를 돌리고 잡역부 역할을 자처한다. 분유통도 제대로 흔들 줄 모르던 이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육아에 있어 그 누구보다 해박하고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인다. 룸살롱에서 순영을 만났다는 남자의 도움을 거부하는 것은 책임을 다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순영의 도망간 덕분에 도일은 성장한다. 그런 그에게 숨을 거두기 직전 엄마는 말한다.


너 잘 살고 있어, 이 정도면.


 이 말은 커다란 시련을 안기고 그 시련 속에 인물을 곤두박질치게 만든 감독이 건넨 사과이자 위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비공개 행사 자리에서 손태겸 감독은 영화의 각본 작업을 마무리 짓는 데에 1년 정도의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말했다. 창작자로서 실화를 기반으로 시작된 이야기와 오랜 시간 함께하며 실제 인물과 작중 인물에게 느꼈을 미안함, 동정심, 고마움과 같은 여러 가지 감정들이 한 줄의 대사 속에 복합적으로 녹아들어 간 듯하다. 


 이 영화에는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을 성장시키고자 했던 손태겸 감독의 노력이 담겨있다. 모든 것을 감당하기에 그들은 너무나도 어렸으며, 무책임했던 게 아니라 책임을 지는 법을 몰랐다. 미숙함은 모든 것들을 ‘무섭게’만 만들었다. 인물들은 흔한 성장드라마가 그러듯이 드라마틱한 '영화적 성장'을 겪지 않는다. 다만 주춤거림을 멈추고 한 걸음 더 내딛는 법을 배운다. 마침내 두려움을 직면하고 현실과 맞닥뜨린다. 그렇게 천천히 그들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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