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은 간다> 속 상우의 여름
[스포일러: 보통]
아직 사랑해본 적 없는 이에게 '열렬한 사랑'은 어떤 의미일까.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너무나 경험해보고 싶은 무언가 이고, 대단히 숭고하며 가슴이 웅장 해지는 일일 것이다. 사랑밖에 난 몰라, 그런 노랫말이 마음을 위대하게 만들고 꼭 내가 순수한 순정파 같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사랑을 모르는 이에게 바람이란 어떤 의미일까. 사랑한다면서 바람을 피우다니, 정녕 이해할 수가 없다. 할머니를 놔두고 바람을 핀 할아버지. 그런 할아버지를 치매에 걸리고서도 열렬히 기다리는 할머니. 상우(유지태)는 매일 같이 기차역에 나가는 할머니를 지켜보며 긴 겨울을 보냈다. 아직 사랑해본 적 없는 때였기에 상우는 이렇게 다짐했다. 내게도 사랑이 온다면 나는 꼭 일편단심 그대만을 사랑하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대만을 위해 내 한 몸 바치리. 그토록 바라던 열렬한 사랑이 마침내 상우에게도 찾아온다.
<봄날은 간다>는 사랑밖에 몰랐기에 필연적으로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상우의 여름을 다룬다.
우리는 언제 사랑에 빠질까. 영화에 의하면 사랑은 그 사람만이 갖고 있는 특징들이 모여 그 사람을 유일하게 만들 때 시작된다. 가령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은수(이영애)의 실제 말투와 주파수를 타고 흘러 들어오는 그녀의 상냥한 아나운서 말투를 함께 들을 때. 종이에 베인 손을 심장보다 높이 들어 피를 멎게 할 때나, 밥숟가락의 밥풀로 김을 무심하게 붙여 먹을 때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내가 가장 나답고 너가 가장 너다울 때 서로를 주목하고, 사랑을 시작한다. 상우는 나다운 게 뭔지 알았다. 재밌는 이야기를 해보라는 물음에 나 재밌는 사람 아니에요, 라고 이야기할 줄 알았다. 그건 그 사람만이 갖고 있는 특징이었고 은수는 기꺼이 그런 상우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나다움’은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일시적으로 휘발된다. 원래 쉽게 방을 어지럽혔고 자신의 속내를 곧잘 숨길 줄 알았던 은수는, 상우에게 잘 보이기 위해 허겁지겁 방을 정리하고 밤늦게 전화를 걸고 부둣가를 서성이며 상우를 기다린다. 한 번의 이혼을 경험한 이레 영원을 믿지 않기로 마음먹어놓고 쉽게 영원에 대해 거론한다. 그런 은수를 보며 상우는 쉽사리 무장해제되어버린다. 마찬가지로 나다움을 잃고 상대에게 몰입한다. 입을 다물고 귀를 기울인 다음 상대를 위하는 행동을 한다. 내가 나답지 못해 불안하고 위태로우면서도. (그 위태로우면서도 좋은 순간에 우리는 설렘을 느끼는 게 아닐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은수가 그러듯이 어느 순간 관성적으로 나다움을 되찾는다. (알다시피 설렘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상우는 제대로 길을 잃는다. 사랑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스포일러: 강함]
이 영화는 사랑밖에 난 몰라, 의 오류를 말한다. 그건 사랑밖에 모르는 인물이 한 명 더 등장하기 때문인데, 바로 상우의 할머니다. 할아버지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바람을 피우고 생을 마감했다. 할머니는 치매에 걸렸고 그런 할아버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어쩌면 기억하지 못하기를 자처한다. 내연녀가 찾아오자 그녀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등을 돌리는 할머니의 모습. 마치 자신만을 사랑하던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만을 기억하려고 이후의 기억들을 철저히 도려낸 듯하다. 내가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았는데 상대는 왜 나를 두고 떠나갔을까. 할머니는 사랑밖에 몰라서 자신의 삶을 잃었다. 그래서 할아버지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모습 말고는 할머니의 인생이 영화 내내 한 번도 묘사되지 않는다. 사랑을 시작하고, 사랑에 몰두하고, 오직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할애하는 상우의 모습은 그의 할머니의 모습과 동일시된다. 그맘때 은수도 할아버지가 그랬듯 다른 사람을 만나기 시작한다.
<봄날은 간다>는 사랑밖에 모르는 상우의 모습을 마냥 순수하고 위대하게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밖에 모르는 바로 그 태도를 나무라는 쪽이어서, 행복할 것만 같던 상우의 강릉에서의 삶을 내내 좌절시킨다. 기다림은 길어지고 기대는 실망을 안긴다. 내내 섭섭하고 서운한 마음에 은수를 향한 갈증은 커져만 가고, 결국 상우는 메마르고 시들어버린다. 그럴수록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점점 더 은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긴다. 그렇게 ‘나다움’을 완전히 잃어버린다. 그런데 그 나다움이란, 은수를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던 상우만의 특징이었다. 나 재밌는 사람 아니에요, 라고 말하던 상우는 오로지 은수의 감정에 어떠한 동요를 일으키기 위해 우스워지기를 자처한다. 내가 사랑하던 상우는 어디 갔는가. 그녀는 더 이상 상우를 사랑할 수가 없다. 그런데 상우는 되려 소리를 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변한 건 사랑이 아니라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상우는 은수를 내내 사랑할 수밖에 없다. 은수가 되찾은 나다움이란, 마찬가지로 상우가 사랑해 마지않던 그 순간의 은수 모습이었으므로.
영화는 할머니의 죽음을 통해 상우에 대한 구제를 시도한다. 사랑밖에 난 몰라, 를 몸소 체화하던 존재의 부재를 통해 상우도 점차 삶의 균형을 되찾기 시작한다. 온전히 나다운 모습을 다시 되찾아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봄날이 가고 나서도 사랑이 지속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역설적이지만 사랑밖에 몰라서는 안 된다. 나와 당신의 연애가 건강하게 지속되려면 우리는 사랑을 지키기에 앞서 ‘나다움’을 지켜야 한다. 나는 나답게, 당신은 당신답게. 나다움을 지키면서 상대방을 사랑하며, 나다움과 당신을 위하는 마음의 균형을 맞추어 나간다. 그래서 마침내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에도 균형이 이루어질 때, 봄날이 가도 사랑은 지속된다. <봄날은 간다>를 보면 오로지 그것만이 계속해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건강한 연인 관계의 유일한 동력인 것처럼 느껴진다.
은수는 상우에게 있어 나쁜 사람이라기보다 옳은 사람이었고, 옳은 사람이었기에 헤어지자는 말을 감당했다. 그런 은수의 행동이 상우에게는 배신감만을 부추길 뿐이어서, 상우는 자신의 마음에 새겨진 큰 상처를 은수에게도 남기고자 그녀의 차에 큰 흠집을 낸다. 상대방에게 느끼는 갈증이 온전히 사랑을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서운함과 섭섭함, 시기와 질투와 집착으로 점철된다고 해서 나의 사랑이 상대보다 더 큰 것도 아닐 것이다. 황홀하기만을 바라던 봄날은 결국 간다. 장마가 한창인 서늘한 여름밤도 곧 끝이 날테다.
이미지 출처: Daum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