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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보리 Mar 08. 2021

거의 완벽한 타인

 스페인에 도착해서 도피하듯 떠났던 포르투 여행이 성공적으로 끝난 후 자신감이 부쩍 생긴 나는 포르투에서 돌아오는 날 바로 2주 후에 떠나는 로마행 티켓을 끊었다.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인 민박을 예약했다.


 그렇게 도착한 로마에서는 그 이후에 갔던 그 어느 곳보다도 열심히 돌아다니고 각종 투어에서 넘치도록 충분한 설명을 들었다. 꼭 가보고 싶었던 카타콤도 방문했고 바티칸에서는 책에서만 보았던 그림들과 조각을 보며 감탄했다. 하루에 한 번은 꼭 젤라또를 사 먹고 커피를 마시고 유명하다던 티라미수도 먹었다.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명소들도 찾아가고 진실의 입 속에 손을 넣으며 관광객 티를 한껏 내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제일 기억에 남지 않는 여행지가 되어버렸다. 투어 덕분에 긴장할 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효율적인 이동 동선을 위해 한 선택이었는데 그게 이 여행을 그렇게나 멋없게 만들어버렸다. 아마 더 그래서 일 수도 있다, 로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 유명한 유적지나 바티칸이 아닌 것이.


 그래서 그것들을 제치고 1등을 한 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민박집이다. 정확히는 민박집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길이 어려워 약간의 애를 쓰며 찾아간 내 인생 최초의 한인 민박은 상상으로 그리던 분위기와는 조금 달랐다. 뭔가 복작복작한 주방에 환한 조명의 거실, 따뜻한 집을 상상했는데 그곳은 조금 노랗고 어둡고 러프한 공간이었다. 약간 퀴퀴한 냄새도 났다. 하지만 깨끗했다. 숙소는 숙소라고 이름 붙이기 위해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들로만 구성되어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이층 침대, 베개, 이불 거실에는 큰 테이블 하나 의자 몇 개. 털털한 인상의 아저씨 사장님은 꾸밈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눈 아래가 약간 캄캄했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되어 공간이 아직 덜 꾸며졌다고 하셨다. 나야 뭐 문제 될 건 없었다. 그 날 숙소에 있던 사람은 사장님, 나 그리고 몇 달 장기로 머무시는 한 아주머니 이렇게 세 사람이 다였다.


 다음 날에는 몇몇 배낭여행자들이 합류했다. 숙소는 조금 더 내가 상상하던 민박 집의 모습과 닮아졌다.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곳곳에서 다양한 소리들이 났다. 사장님은 우리를 근처의 유명한 젤라또 집에 데려가셨다. 잠시 뒤 우리 손에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젤라또들이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우리는 동그란 테이블에 모여 동그랗게 앉았다.


얘들아, 여기 중국인 진짜 많지? 상점들도?

네, 오면서 놀랐어요.

왜 그렇게 많은지 알아?

왜요?

그 사람들은 여기 와서 자리를 잡으면 자기 가족들을 불러. 친구들도 불러. 그냥 싹- 다 불러버려. 그렇게 몸집을 불리는 거야.

아하하 그렇구나. 대단하네요.

그런데 한국인들은... 하.


사장님의 목소리가 조금 격해졌다. 우리는 갑자기 생긴 말의 공백에 젤라또를 먹던 고개를 들어 사장님을 보았다.


한국 사람들은 뭐가 잘 되잖아? 그러면 절-대 공유 안 해. 자기만 잘되려고. 아니, 누가 조금만 잘 돼도 질투하고 배 아파한다고. 남 잘 되는 걸 못 봐.


 이게 진실일지 아닐지는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으나 사장님이 슬픈 것만은 확실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내리고 젤라또를 보았다. 어찌 되었든 젤라또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였다. 사장님은 전에 다른 일을 하시다가 사정이 생겨서 급하게 하숙집 사업을 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그 뭔지 모를 사정이라는 것 때문에 저렇게 눈 아래가 캄캄해지신 것일까. 중국 상점에서 그 어딘가로 급하게 넘어간 사장님의 분노 포인트는 이십 대 초반의 몇몇 젊은이들이 이해하기에는 아직 조금 어려운 이야기였다.


 마지막 날에는 남자 여행객들이 대거 들어왔다. 사장님의 얼굴이 조금 핀 것 같았다. 사장님은 내게 혹시 방을 옮겨줄 수 있냐고 물으셨다. 이 숙소의 유일한 여성 손님은 나와 아주머니 둘 뿐이었는데 그 아주머니 방으로 갈 수 있냐는 것이었다. 난 흔쾌히 좋다고 했다. 내가 짐을 옮기는 수고로움보다는 손님이 많아져 얼굴이 밝아진 사장님을 보는 것이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이 밤만 지나면 새벽에 다시 공항으로 가야 할 터였다.


 장기 투숙하신다는 그 아주머니는 아저씨 아는 분의 아는 분이라고 하셨다. 가끔만 모습을 보이셨는데 주로 식사 차림을 도와주시고는 홀연히 사라지곤 하셨다. 조용히 방을 옮겨 다음 날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는데 아주머니께서 들어오셨다. 사장님께 미리 말씀 들으셨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갑자기 대화가 시작되었다.


 사실 대화라고 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것이, 이후 두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내가 낸 소리는 '네'와 '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나는 듣고 듣고 또 들었다.


 그녀는 로마에 도망치듯 왔다. 고통스러운 이혼 후 힘겨운 와중에 온 힘을 쏟아 홀로 아들을 키웠다.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집안에 어떤 일이 생겼고, 모든 것을 제치고 키운 자식은 전남편의 편을 들었다. 아주머니는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고 표현하셨다. 말 그대로 와르르 쏟아지는 것 같아서 한국에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익숙한 것이 없는 곳으로 가야만 했다. 그래서 여기로 왔다, 로마에.


 함부로 추임새를 넣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잠잠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꼭두새벽부터 남부 투어를 다녀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쏟아졌던 잠조차 달아날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이야기의 내용과는 반대로 매우 담담하게 말을 하다가 가끔은 잠시 멈추었다. 눈물을 흘리시려나 조마조마한 타이밍이 몇 번 있었으나 이미 오래전에 말라버린 듯한 눈에서는 아무것도 흐르지 않았다.


 사장님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아주머니의 이야기도 내가 모든 것을 이해하기에는 조금 순진한 나이였다. 아주머니도 속으로는 스물두 살짜리 애를 잡아놓고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생각하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이야기들은 나의 이해를 바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 우리는 서로에게 거의 완벽한 타인이었다. 그렇게 때문에 나에게 모든 것을 쏟아냈을 수도 있었다. 그녀는 오히려 그녀의 친한 지인들에게는 이야기의 몇 군데를 생략했을 수도 있었다. 내가 가끔 그러기 때문이다. 너무 창피하거나 가까운 사람들에게 알리기에는 준비가 안 된 내용들은 숨겨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나와 아주머니는 내일이면 영영 보지 않을 사이였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나이도, 한국에서 살던 곳도 모르는 사이였다. 그냥 어쩌다가 같은 시기에 로마에서 같은 집에 묵는 가벼운 우연으로 연결된 사이였다. 그게 오히려 안도감을 주었을지 몰랐다. 


 이야기의 끝이 조금 어색했지만 약간의 웃음으로 마무리되었고 정신없이 잠이 든 후에 새벽 비행시간에 맞춰 급히 숙소에서 나왔다. 식탁에는 사장님께서 일찍 나가는 나를 위해 준비해놓으신 사과와 작은 빵이 든 꾸러미가 있었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기에 지난밤에 잠시 돈독한 사이가 되었던 아주머니와의 작별인사 같은 것은 없었다. 하지만 난 이제 아주머니를 알기 전으로 완벽히 돌아갈 수는 없었다.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너무 자세히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그 슬픔을 내 마음으로도 느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건 아마 이미 5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아주머니가 종종 생각나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가끔 그녀가 생각날 때마다 부디 로마에서 위로를 얻고 무사히 돌아가셨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로마에서는 의도치 않게 어른들의 슬픔을 조금 알아버렸다. 어쩌면 그래서 이후에는 한인 민박을 찾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같은 곳에서 왔다는, 같은 뿌리를 가졌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난 너무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너무 깊게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슬픔들을 내 속에 하나씩 남긴다면 나는 너무 금방 채워져 버릴 것이 틀림없었다. 왜냐면 나는 그런 애였으니까. 그런 것들을 쉽게 잊지 못하는 애였으니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그런 것들로 쉬이 채워지도록 나를 열어 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비자발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자발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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