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 시나리오 작가로 산다는 것
연재작 소개의 글: 4년 전, 대기업을 퇴사하고 당당히 전업 시나리오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꿈에 부풀어 제출한 사직서는 알고 보니 가시밭길 행 급행 티켓이었다?! '퇴사, 그 후'는 그야말로 눈물없인 들을 수 없는 연명과 풀칠의 나날 그 자체! 정보성 0%. 성공담도, 실패담도 아닌, 실패기(期)를 지나는 중인 5년 차 시나리오 작가의 일상 생존기.
지난 글:
실패의 정의는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나는 나 스스로를 ‘현재 스코어: 실패한 퇴사자’라 일컫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 아래 세 가지 문답을 통해 알아보자.
퇴사 후, 어느 정도 각오한 부분이 있었다면 바로 수입의 감소였다. 자리 잡기 전까지는 물론 회사 다닐 때만큼의 안정적인 수입은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새 4년 차, 자리를 잡았어도 진작 잡았어야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수입은 아직 회사 다닐 때에 근접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회사를 다닐 때 대단한 돈을 번 것도 아니다. 문과 졸업생 평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월급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나마 근접하게도 못 번다. 김밥 가격이 46.6% 상승할 동안, 나의 벌이는 –50%... 혹은 그 이상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놀았느냐? 그것도 아니다. 프리랜서, 그 중에서도 글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그렇듯 노동(?) 시간을 절대적으로 계량하긴 어렵지만, 놀았다고 정의하기엔 바빴다. 우선, 평일과 휴일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졌다. 직장인은 누리기 힘든 평일의 호사를 누린 적도 많지만, 상대적으로 남들 다 쉬는 휴일은 나에게 결코 휴일이 아니었다. 주말에도 휴일에도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쉬어야지’가 아니라 ‘일단 뭐라도 하러 나가봐야지’가 되었다. 내가 버는 귀여운 돈을 내가 쓴 노동 시간으로 나눠 보면 참 답 없는 생산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평일과 휴일의 경계가 사라지니, 단순히 불안에 쫓겨 일주일을 내리 꾸역꾸역 노트북 앞에 앉은 적도 많다. 하지만 그게 과연 생산적인 일주일이었을까? 작품 구상 중에는 일주일을 노트북 앞에 앉아 있어도 썼다, 지웠다. 작성했다, 폐기했다... 결론적으로는 한 글자도 쓰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어찌 보면 당연한 과정이다. 좋은 글이 탄생하기 위해선 당연히 고통스러운 고민의 시간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현실적인 부분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돈은 어디서 나오는데?”
생산적이지 못한 인간이 되어간다는 기분은 나를 깊은 불안으로 몰아갔다. 노트북 앞에 멍하니 앉아서, 돈 한 푼 벌지 못하며, 언젠가 누군가가 사 줄지도, 혹은 아무도 안 사 줄지도 모르는 글을 쓰는 일은 심적으로도 괴롭고 물리적 현실마저 숨 막혔다.
내가 쓰는 이 시나리오라는 글은 철저히 누군가의 구매를 통해서만 가치가 생긴다. 그렇기에, 생산적이지 못한 인간이라는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일단 돈 되는 일 위주로 하는 거였다. ‘선주문 후작업’의 일만 골라서 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쉽게 쓸 수 있는, 퀄리티 낮은 글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처음에 꿈꾸었던 감동과 재미를 주는 작가의 사명감은 흐려지고 작가로서의 꿈을 이뤄가는 대신 먹고 살기에만 급급해진 것이다.
1편에서도 언급했듯, 업계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지고 있다. 내년, 혹은 후년 이후까지 불황을 전망하는 사람들도 있다. 호황에도 살아남기 힘든 게 작가인데, 눈치 게임까지 실패했으니 이래저래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내가 실패한 퇴사자일까? 아니다. 업계 불황은 내 탓이 아니고, 고로 그게 내가 실패한 퇴사자가 된 이유가 되지도 못한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이 시기가, 적어도, 미래를 위한 투자로서는 가치가 있느냐?’이다.
언제나 생산적인 삶을 살수만은 없다. 누구에게나 생산적이지 않은 시기는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최소 9년, 최대 12+@년의 시간 동안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명목하에 ‘공부’라는 생산적인 활동에 매여있지 않았나. 하지만 나는 이제 10대도, 대학생도 아니다. 명백히, 한창 사회의 일꾼이어야 할 나이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정말 ‘경력 단절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도 싸워야 한다. 그렇기에 만약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게 투자라면, 그냥 버리는 시간일지도 모를 현재는 나에게 있어 더없이 비싼 투자인 것이다.
이렇게 내가 스스로를 현재 스코어: 실패한 퇴사자라고 일컫는 이유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보았다.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이 시기가, 적어도, 미래를 위한 투자로서는 가치가 있느냐?’라는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아직 답을 모르겠다. 하지만 내내 꾸역꾸역 ‘현재 스코어’라는 미사여구를 붙였듯, 그리고 보란 듯이 브런치에 나의 시나리오 작가 생존기를 쓰기 시작했듯, 나는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고충은 생생히 나누되, 내일까지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인생사 새옹지마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