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친과 관련된 모든 기억이 기분 나빴던 이유

#22. 그 사람이 밉기보다 그 시절 속 내 감정이 미웠던 거야.

by 기록하는 슬기

어제저녁, 처음 보는 아이디가 내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우한다는 알림이 왔다. 영문으로 된 아이디를 차례대로 소리 내어 읽으니 한글 이름 세 글자로 완성이 됐다. 흔한 이름이 아니라 그 계정의 주인공이 누군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그다지 반갑지는 않았다. 나를 팔로우 한 사람은 대학생 때 인사만 주고받았던 한 선배였다. 그 선배의 계정에 들어가 보니 내 기억 속 그 얼굴이 맞았다. 계정 속 많은 사진 중에 최근 몇 년 동안 잊고 살았던 대학교 때 사람들의 얼굴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리고 정말 정말 잊고 있었던, 잊고 싶었던 한 사람의 얼굴을 한눈에 발견했다.


사실 그 선배가 나를 팔로우한다는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던 이유는 따로 있다. 대학생 때 나와 과CC로 오랫동안 만났던 전 남자 친구와 친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 정말 친하게 지내던 몇몇 친구들과 동생들만 빼고 연락을 모두 끊고 살았었다. 그랬던 가장 큰 이유는 전 남자 친구와 대학교를 졸업하고 불과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헤어졌기 때문이다. 한 다리만 건너면 자꾸만 들려오는 그 사람의 소식이 듣기 불편했고, 싫었다. 그래서 그와 헤어지면서 그 사람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과는 모두 연을 끊고 살았다.


그런데 대뜸 6~7년 만에 그 선배의 계정 속 대학교 사람들과 그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데 말로는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지만 확실한 건 긍정적인 감정보다는 부정적인 감정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전반적인 대학 생활을 꽤 열심히 한 편이었고, 그중에 과생활은 과 대표를 한 해 맡았을 정도로 적극적으로 참여했었다. 원하지 않은 대학교였지만 막상 입학하고 몇 개월 뒤부터는 우리과 뿐만 아니라 다른 과를 넘나들며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누구보다 즐겁게 학교 생활을 즐겼었다. 딱 남자 친구를 사귀기 전까지는.


남자 친구를 만나고 나서부터는 대학 생활의 기억의 80% 이상은 그 사람과 함께한 기억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같은 과에, 비슷한 학년이라 같이 들어야 하는 수업도 많았었다. 유독 과생활을 강조했던 우리 과의 특성상 대부분 수업이 끝나고 나면 같은 과 사람들과 어울렸었다. 이런 환경 속 과CC라 그런지 사귄 시간이 3년이라도 보통 커플들 기준으로 보면 사귄 기간이 거의 5년에 가까웠을 것이다. 분명 그와 사귀던 시절 그 당시 나는 그 사람을 많이 좋아했고, 그 사람과 함께 하는 시간 또한 좋아했었는데 가끔씩 불쑥 찾아오는 그와의 기억이,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왜 이렇게 달갑지 않은 걸까.




P20200829_185726094_516EFCAC-927F-4397-92CA-5A61BB84CB00.JPG 가끔 그 시절 사진을 보면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너무 많이 웃고 있더라. <사진 : 그 시절 속 어느 한 장면>



예전에는 그 사람과 이별 문턱에서 겪은 잦은 다툼과 그로 인한 감정 소모 때문에 그와의 기억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와 나의 다툼이 유별났던 것도 아니었다. 보통의 오래 사귄 20대 커플들이 겪는 권태기였고, 그중 잦은 말다툼일 뿐이었다. 그와 이별을 하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왜 나는 그와 그와 관련된 기억을 떠올릴 때 기분이 좋지 않은지를 알았다. 내가 늘 부정적인 느낌을 받았던 본질적인 이유는 그와 나의 성향 자체가 너무도 달랐다는 것이다.


20대 초반의 나는 활발함과 사교적임의 끝판왕이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친하게 지내고, 여기저기 발을 넓히는 게 재밌었다. 오죽하면 대학교 어느 건물을 가든, 대학교 주변 어느 카페, 식당, 술집을 가든 꼭 아는 사람 한 명은 만날 정도였다. 그랬던 내가 남자 친구를 만나면서 다른 과 사람들과는 단 한 번도 따로 밥이나 술을 먹는다던가 하는 만남 자체를 가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대학 생활 중 친하게 지냈던 남녀 포함한 또래 친구들과 멀어지게 돼버렸다. 솔직히 그때 나는 '억지로' 그 행동을 한 게 아니었다. 나와 정반대의 성향인 그 사람이 싫어할 것 같은 행동을 스스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사람이 좋으니까, 그 사람과의 시간이 더 좋으니까.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각각 다른 기질과 성향은 오랜 시간 숨길 수 없다. 사귀던 초반에는 분명 내가 좋아서 그렇게 무 자르듯 모든 인맥들을 끊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전에 화려하고 넓던 인맥이 한순간에 조촐해져 버린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고 나서도 그 사람과는 대학교 졸업 후에까지 사귀었으니 그저 나는 내 마음을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내내 억눌러야 했던 그 기분과 그 사람, 그 시절과 연결됐던 것이다. 전 남자 친구라는 그 사람 자체와는 별개로, 나는 그 사람과 함께 했던 그 대학 시절을 떠올리면 내 성향과 본능과 정반대로 해야 했던 그때 그 감정부터 떠올랐던 것이다.


맞다. 나는 그 사람을 미워했다기보다 그 사람과 다른 성향 때문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던 내 부정적인 감정과 기억을 미워했던 것이다. 지금도 객관적으로 아주 가끔 친구들과 전 남자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그때 만났던 그 사람이 갖고 있던 장점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러다 보면 더욱 선명히 보인다. 그 사람과 내가 얼마나 다른 장점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다른 성향과 기질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 점을 깨닫고 나서는 일부러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과 그 기억을 연결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 시절 속 그 사람을 좋아했던 것도 나였고, 그 사람과 연애를 했던 것도 나였고, 그 관계를 지키고 싶어서 노력했던 것도 나였다. 그 기억 속에 모든 결정과 행동은 '내'가 했었다. 그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시절 속 나는 그때 그 순간을 누구보다 몰입해서 최선을 다해 살아갔다. 만약 계속해서 그 감정과 그 사람과 그 시절을 모두 연결시켜 부정적으로 바라본다면 곧 나의 선택과 진심 또한 부정한다는 것 아닐까.


아직은 그 감정과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지만 계속해서 노력할 것이다. 어제처럼 예고 없이 불쑥 찾아오는 빛바랜 기억의 한 조각이 불러일으키는 작은 감정들 때문에 그 시절 속 사랑하고 사랑받던 나 자체를 잃을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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