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즉필사 사즉필생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말 내내 우리 집의 공용어는 충청도 사투리였다. 느긋한 충청도 사투리를 빌리면 같은 말도 어쩐지 더 다정하게 들린다. 남편과 나는 충청도에 아무 연고도 없지만, 경쟁적으로 더 자연스러운 사투리를 구사하고자 애썼는데 이 모든 것은 드라마 <소년시대> 탓이다.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의 향연이 황홀하게 재미있다.
때는 1989년. 충청도 온양의 고등학생 장병태(임시완)는 불법 댄스 교습소를 운영하다가 걸린 아버지를 따라 야반도주를 하게 된다. 깜깜한 새벽 세간살이를 꾸깃꾸깃 실은 택시 한 구석에서 병태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정든 친구들과 이별해서도, 여자친구와 갑자기 헤어지게 돼서도 아니다.
"지가유 여기 온양에서 하도 처맞아 가지고 인제 워떤 놈이 어떤 식으로 시비를 걸고 어떤 식으로 패는지 다 파악했단 말여유. 근데 이렇게 이사를 가 버리믄 새로운 동네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잖여..흑"
이렇게 엉뚱한 대사라니. 그걸 또 위화감 없이 소화하는 임시완이라니. 전에 알던 임시완의 똘망하고 곱상하게 잘 생긴 얼굴이 안 보인다. 온양 찌질이라 불리는 장병태 그대로다.
흐느낌과 함께 시작한 병태의 부여 생활은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부여농고 일진들이 장병태를 전설적인 싸움 짱 '아산 백호' 정경태로 오해한 탓이다. 정경태가 사고로 정신을 잃어 병원 신세를 지는 동안 장병태는 일진들의 호의와 호위 속에 팔자에도 없는 일인자의 자리에서 인생의 전성기를 맛본다.
내내 코믹하던 분위기는 의식을 회복한 진짜 아산 백호 정경태가 기억까지 회복하면서 180도 뒤바뀐다. 타교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던 병태가 추락하는 과정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이 안타깝다. 병태가 당하는 수모가, 그가 느낄 모멸감이 내 것처럼 절절하게 와닿는다.
경태의 악랄함은 더해가고 병태는 원래 있던 찌질이 자리보다도 더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일주일을 기다려야 다음 이야기를 볼 수 있는데 결말이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통쾌한 복수라도 있어야 후련할 텐데 그건 또 너무 뻔하고도 비현실적인 전개가 아닐까. 다급해지는 마음으로 검색을 했지만 원작이 없는 순수 창작물의 결말을 알 길은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 금요일에 7, 8화가 공개되었다.
병태는 현실에 순응해 경태의 비위를 맞춰주고 지켜보기 힘든 굴욕을 견뎌낸다. 급기야 경태가 자신의 아버지를 궁지로 내몰고, 잘못 없는 어머니가 흘리는 눈물에 병태는 각성한다. 경태에게 맞아 입원까지 한 병태를 찾아온 지영의 말은 결정적인 불쏘시개 역할을 한다.
병태 :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봤는디 뭘 더 어찌케 하라고.
지영 : 이 빙신 새끼야. 할 수 없는 걸 혀야지!
'할 수 없는 것을 하기 위해서' 병태는 싸움 잘하는 흑거미 지영으로부터 싸움의 기술을 배워 나간다. 흑거미랑 한 집에 살 때부터 예측가능했지만 한편 너무나 뻔한 전개라서 다른 방식으로 흘러갈 줄 알았는데 차곡차곡 잘 쌓아 올린 이야기의 힘은 셌다. 개연성은 충분했고 전혀 닳아빠진 느낌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완벽한 설득이었다.
지영이 근성과 근력을 키워줄 목적으로 병태를 밀어 넣은 곳은 숯 공장이었다. 무거운 통나무를 옮기고 장작을 패고 펄펄 끓는 불가마 속에 나무를 집어넣고 숯을 만들어내는 고된 노동의 현장에서 병태는 맥을 못 춘다. 일을 마치고 겨우 등을 대고 자리에 누워 눈을 한번 감았다 뜨면 아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늦은 밤, 이른 새벽 가릴 것 없이 시간을 쪼개어 몸을 단련하는 사이 달라지는 것은 것은 병태의 눈빛이다. 지영식으로 말하자면 '싸움을 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된 것.
8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었다. 병태가 기초 체력을 기르러 간 곳이 하필 숯 공장이라는 설정 말이다. 숯은 나무를 태워 만든다. 뜨거운 불길 속에 던져진 나무는 열기를 흡수하며 숯이 된다. 그런데 숯은 타고 남은 재가 아니라 훌륭한 땔감이다. 숯 공장에서 단련을 이어간 병태가 스스로를 고통 속으로 던져 뜨거운 복수를 위한 땔감으로 거듭난다는 은유가 읽혀서 괜스레 홀로 감탄을 했더랬다.
이 시리즈는 총 10부작이니 이제 2개의 에피소드만이 남았다. 이번주 금요일에 공개될 결말에서 아마도 병태는 통쾌한 복수를 해낼 것이다. 얼마나 근사하게 이야기를 쌓아 올릴지 꽤나 기대가 된다. '생즉필사 사즉필생' 이순신 장군이 남겼다고도 전해지는 이 말이 <소년시대>의 주제곡 가사에도 등장한다. 죽고자 하는 각오로 자신을 활활 태운 병태가 마침내 경태를 때려눕히고 새 삶을 여는 순간 어떤 대사를 뱉을지… 참~말로 궁금허구먼! (2023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