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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기복 Oct 17. 2024

나 돈 필요해요

얼마나 줄 수 있는데요?

어제저녁 식사를 준비할 무렵 전화기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을까 말까 하다가 받았더니 주거래 은행 소속 직원이었다. 대출 만기가 한 달 남았는데 연장을 하겠냐 물었다. 마이너스 통장 얘기였는데 4년 전 이사하면서 최대한 땡겨쓰고 지난 일 년 넘게 +상태로 존재감이 희미했다. 하지만 몇 달 뒤 이사를 해야 하는 처지라 냉큼 연장해 달라고 했다. 내가 너무 달려들었나, 직원은 웃음기 묻은 목소리로 어플로 직접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도 그렇게 손가락 몇 번의 터치로 연장을 했던 기억이 났다.


전화를 끊자마자 앱을 열어서 대출기한을 연장하려고 보니 영업점 방문이라는 다섯 글자가 단정히 적혀 있었다. 걸려온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고객센터로 연결되었다. 상황을 설명했다. 친절한 안내원은 많이 놀라셨겠어요 라는 나긋한 문장으로 나를 안심시킨 후에 설명을 시작했다. 요약하면 마이너스 통장 한도가 20프로 감액되었다고, (한동안 마이너스가 아니어서 실적이 반영된 모양이다.) 앱에서 한도를 줄이면 기한 연장이 가능할 거라고 했다.


계약갱신청구권이란 것을 써서 2년 더 살고 싶은 집인데 새로 바뀐 집주인이 들어와 살겠다고 해서 떠밀리듯 떠나는 상황이다. 2년 새 부쩍 올라간 전세금액 조달이 중차대한 이 시점에 하필 믿고 있던 마이너스 통장 한도가 줄어든다니! 속상한 마음이 컸지만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고 어플을 이용해 대출한도를 안내받은 금액으로 줄였다. 그리고 다시 기한 연장 메뉴를 눌렀다. "영업점 방문"


어리둥절한 채로 다시 고객센터 번호를 눌렀다. 아까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나는 상황을 설명했다. 아까 말한 것에 안내받은 내용까지 보태어진 이야기였다. 상담원은 단호한 톤으로 이 건은 영업점에 서류 챙겨서 오셔야만 연장이 가능합니다라고 했다. 이어 내가 대출한도가 20프로 감액된다고 들었고 그래서 조치를 했다고 하니 낭패감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로, 이제 그 금액에서 다시 20프로 감액되어 대출 가능하단다.


팔짝 뛸 노릇이었다. 나는 고객센터 상담원의 안내를 따랐을 뿐이다. 애초에 만기연장을 알린 은행 직원도 원망스러웠다. 처음부터 제대로 안내를 했다면 좋았을 텐데. 원래금액의 20프로에서 또 한 번 20프로 디스카운트를 해버리고 나니 믿을 구석이라고 하기엔 불안한 금액이 되었고 게다가 잘못된 안내로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니 너무 화가 났다. 그러나 나는 잘못 없는 엉뚱한 사람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아까 그 직원을 다시 연결해 드릴까 묻는 두 번째 상담원에게 그냥 됐다고 체념하듯 말했다.


콜센터 상담원들이 나오는 소설을 너무 봤나. 그들의 감정 노동이 얼마나 고된 것인지, 화장실 다녀오는 것도 눈치가 보일 정도로 쉼 없이 얼굴 모르는 타인들을 응대하며 억울하고 분한 일을 삼켜내다가 끝내 무너지고 마는 주인공의 목소리가 너무 생생했다. 내가 녹음된 통화를 증거로 상담원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그로 인해 그 직원이 상처를 받고 모욕감을 느끼거나 행여 회사에서 불이익을 당한다면? 짧은 순간에도 휘리릭 몹쓸 장면들이 펼쳐지는 통에 차마 바꿔달라고 하지 못했다. 행여 감정이 흘러넘쳐 소설에 나오는 몰지각한 진상이 되어버릴까 봐.


얼얼했다. 대출만기가 다가오는지 불과 이십 분 전에는 알지도 못했는데 난데없이 벌어진 일들이 나를 헤집어놨다. 여기에서 내가 가장 참기 힘든 대목은 억울함이었다. 자기야, 나는 상담원이 시키는 대로 했어. 근데 대출한도가 이중으로 줄었어. 남편에게 하소연을 했다. 비켜보라고, 내가 대신 나서서 따져주겠다고 그가 얘기를 했다면 내 기분이 좀 나았을까. 갑자기 줄어든 자금은 둘째치고 억울하게 피해를 입어서 속상해 죽겠는 내게 내일 은행 가서 어쩌고 저쩌고, 임무를 하달하는 상사처럼 구는 모습에 참지 못하고 알아서 하겠다고 짜증을 냈다. 자기는 꼭 그러더라로 시작하는 비난을 곁들인.


휴.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어대던 스위트홈에 급격히 냉기가 감돌았다. 식사 거르면 큰 일 나는 줄 아는 남편이 저녁 생각이 없다며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속상했다. 너그러운 민원인 코스프레를 하느라 상담 직원에게 따지거나 화내지도 못하더니 애꿎은 남편에게 분풀이를 했다. 일단 은행에 직접 방문해야 뭐가 해결될 것 같았다. 따지더라도 가서 따지자 생각을 하고 두 번째 상담원이 불러준 서류를 어떻게 준비할지를 조사했다. 인증서만 있으면 단숨에 해결인데 하필 또 인증서는 만료.


인증서 재발급 신청을 하더라도, 당장 내일 아침에 은행으로 달려가지 않으면 답답해서 못 견디지 싶어 재직증명서와 원천징수영수증을 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물론 재직 중인 학교에 가면 되겠지만 굳이 휴직 중에 거기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알아보니 팩스민원 서비스라는 제도가 있었다. 인근 학교에 가서 신청을 하면 팩스로 자료를 전송받을 수가 있었다. 전혀 몰랐던 정보였다. 서류준비가 얼추 해결된 것 같으니 이제 남편을 풀어줄 차례다.


나는 사과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것 같다고. 불안한 마음이 올라와서 짜증을 내버렸다고. 불안하고 힘들어서 그랬던 걸로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고. 차라리 나서서 해결하든 돕든 할 것이지 업무 지시 같은 말은 좀 그만하라는 말은 참았다. 나중에 남편 기분 좋을 때 넌지시 건의하기로 하고. 스르르, 배시시 얼굴이 풀린다. 화해의 의미로  등과 허리 몇 번 주물러주고는 거실로 데리고 나와 함께 티브이를 봤다. 고되다, 고돼.


오늘 아침 5분 거리 초등학교에 가서 방문자 등록을 하고 행정실에 들어갔다. 그렇다. 이 공간의 불청객. 나를 위해 수고를 해주실 담당 직원에게 공손히 용무를 전하고 서류를 작성했다. 일단 가 계시면 연락드릴게요라고 하는데 순순히 알겠다고 하고 밖으로 나왔다. 도움이 될까 싶어 우리 학교 행정실에 전화를 걸어 상황설명을 했다. 지금 바로 처리하겠다는 친절한 목소리. 목소리에는 참 많은 것이 담기는구나. 일찍 되겠구나 싶어서 방문증을 목에 건 채로 벤치에 앉아 이 글의 서두를 쓰기 시작했다.


30분이 훌쩍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혹시나 싶어 찾아갔더니 이제 막 처리가 끝났다면서 서류를 챙겨준다. 단순히 팩스만 받는 게 아니라 저쪽 학교, 이쪽 학교 담당자의 이름과 도장에 일련번호까지 주렁주렁 이었다. 어찌나 미안하고 황송하던지. 인사를 꾸벅하고 나오는데 어려운 미션을 무사히 마친 것처럼 기분이 후련했다. 주민센터에서 초본까지 떼고 드디어 은행으로 향했다.


근무공간의 청결함으로 볼 때 은행은 학교와는 감히 견줄 수 조차 없다. 교무실로 한정해서 비교해도 마찬가지. 널찍하고 쾌적한 공간에 온도와 습도, 냄새까지 실시간 관리되고 있는 것처럼 말끔했다. 번호표를 뽑았다. 오전이라 손님이 많지 않았다. 대기인은 3명. 3041번이 불리자마자 창구로 갔다. 대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베테랑 은행원이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이미 안달이 나 있었다.


직원은 이제 막 삼십 대가 되었을까 싶게 젊었다. 나는 일단 어제 있었던 일들을 토해냈다. 말했다기보다 토했다. 미간이나 찌푸리지 말고 얘기할 것을. 상대가 너무 차분해서 내가 더 허둥지둥하는 것처럼 느껴진 건지 내가 흥분해서 상대를 더 차분하게 만드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뭔가 빼앗긴 사람처럼 억울했고 상대는 그저 업무를 보고 있었다. 둘을 따로 놓으면 나와 짝을 이룰 상대로는 (사건을 조사하는) 경찰, 학생부 선생님 정도가 적당할까.


요지를 파악한 직원은 신분증을 요구하더니 어플로 내가 직접 이것저것 입력하거나 인증하거나 동의하도록 안내했다. 그녀가 입을 뗐다. 감액하면 자동 연장되는 상품이 맞고요 로 시작해서 얼마나 대출이 가능한지를 알려주었다. 어제 첫 번째 상담원이 말한 금액 그대로였다. 이럴 수가. 첫 번째 상담원이 맞았다. 두 번째 상담원이 틀렸다. 이중감액이 되는 게 아니라니. 당황스러웠다. 나 왜 억울했지?


어제 첫 번째 상담원과 통화를 해서 설명을 들었다면 어땠을까. 나는 마땅히 행사할 수 있는 내 권리에 자꾸 갑질이나 진상 같은 프레임을 덧씌우며 과도한 자기 검열을 한다. 왜 그런 내용으로 안내를 한 건지 해명을 요구함으로써 오해를 풀고 그쪽도 오명(잘못 안내했다는)을 벗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정부 대출 제도의 들쑥날쑥함과 은행의 설명 없는(해준대도 못 알아들을) 기준들은 순응하면서 잘못 안내받은 것에만 길길이 뛰는 나의 스위치는 역시나 '부당한 피해'다.


왜 첫 번째 상담원에게 소명의 기회도 주지 않고 두 번째 상담원의 말만 듣고 그를 불신했을까. 설사 잘못된 안내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내가 그 부분을 문제 삼았다 해도 그렇다. 하다못해 어린 학생들도 대다수는 변명의 여지없는 본인의 잘못에 토를 달지 않는다. 내가 읽은 소설 속에서 마음이 병들어가던 상담사들은 업무상의 잘못을 지적받아서 그랬던 게 아니었다. 정당한 질문과 적절한 해명. 고성 없이, 감정의 긁힘도 없이 이루어지는 대화에 사람이 무너져 내릴 리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들에 대해 책에서 몇 자 읽은 걸로 너무 쉽게 공감의 탈을 쓴 동정('힘든 업무 하는데 내가 참자' 같은)을 해버리는 것이야말로 진짜 진상 아닐까. 진상 학부모가 언론의 주목을 받을 때 낯선 타인들이 교사들 불쌍하다, 안 됐다는 시선을 보내는 것이 나는 얼마나 불편했던가. 공감이 담긴 응원이 아닌 단순한 동정은 오히려 그 직업의 긍지를 꺾고 지위를 끄집어 내린다. 타인의 직업에 대한 가장 바람직한 자세는 그를 해당분야의 전문가로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태도일 것이다.


그나저나, 우여곡절 끝에 대출은 어떻게 되었을까. 새 대출로 갈아타도 20프로 감액된 금액보다 적은 한도가 나온대서 그냥 기존 것을 연장하기로 했다. 딱 20프로 감액된 채로. 모든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소파에 누워있는데 은행 공식 번호로 안내 전화가 온다. 전화 내용으로 미루어 이게 어제 왔으면 소동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다. 얄궂은 타이밍. 그래도 세상에 나쁘기만 한건 없어서 어젯밤 머리 싸매고 이사의 청사진을 완성했으니 전화위복. 급한 성격을 못 이긴 덕분에 소동의 결말까지 속성으로 도달했으니 오히려 좋아. (2024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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