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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기복 Dec 24. 2024

수술실 문 앞에서

박기복 환자 구하기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이십 년 전,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암은 아니었고 몸 안의 양성 종양을 제거했는데, 결코 가벼운 수술이 아니었음에도 그 일은 내 삶에 큰 의미를 남기지 못했다. 타격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 수술은 이후 내 몸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지만, 당시 나는 아무것도 깨우치거나 배우지 못했다.


그건 내가 어리석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렸기 때문이었다.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데다가 책도 많이 읽지 않아 간접 경험 또한 적었고 결정적으로 나 자신에 대해 잘 모르던 때였다. 그러니까 안팎으로 재료가 없어서 깨우침도, 변화도, 무엇도 만들지 못했다는 소리다. 그저 벌어진 상황에 놀라고 당혹스러워하기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경험을 쌓고 심지어 기록하는 일에는 위대한 가치가 있다. 일어난 일 중에 무엇을 적고 무엇을 뺄지, 인과 관계와 상관관계를 따지는 사이에 생각은 깊어지고 새 길을 내다가 대단한 통찰을 얻기도 한다. 같은 사건도 어떻게 연결 지어 해석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불행이 되기도, 반대로 기회가 되기도 하니까. 내가 지금 목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인 채로 앉아 글을 쓰는 것도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다.  


수술 당일, 수술실 문 앞에 앉아 대기하고 있는데 이십 년 전 생각이 났다. 침상에 누운 채 수술실에 들어가기 직전, 엄마가 내 귀에 대고 “수술 잘 받고 와”라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건네는 인사처럼 느껴졌던 건 엄마가 그 말을 하고서 내 볼에 얼굴을 비비며 흐느꼈기 때문이었다. 엄마가 이렇게 나를 사랑하는구나. 철없던 나는 엄마의 슬픔은 나중에야 헤아렸다.


어쨌거나 며칠 전 수술실 앞에서 나는 혼자였다. 오후 두 시 예정이라던 수술이 갑자기 순번이 바뀌며 정오로, 다시 오전 열 한시로 당겨졌다. 남편이 오전에 급한 회의에 참석하고 병원으로 오고 있었다. 보호자가 지금 오는 중이라고 이야기했지만 괜찮다고 했다. 저기요 제가 괜찮지 않거든요라고 따질 수도 없었다. 이내 빈 휠체어를 밀고 한 남자가 나타났다. 같은 병실을 쓰는 환자와 보호자 내외의 응원을 받으며 휠체어를 타고 수술실로 이동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한참 긴 복도를 지나는 동안 휠체어를 밀어주는 분이 계속해서 말을 건넸다. 이렇게 혼자 들어가시게 되어서 속상하시겠다고. 자기도 6개월 전에 이 병원에서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었다고. 아이에게 동화책이라도 읽어주듯 부드러운 톤이었다. 참 고마웠다. 수술실로 향하는 내 불안과 긴장을 헤아려 이렇게 말을 걸어준다는 사실이. 그 마음이 고마워서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분과 나눈 스몰토크로 조금은 긴장이 풀렸다.


수술실 문 앞에는 나 말고도 대기자가 있었다. 네댓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가 휠체어에 앉아 있었고 나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 머물게 됐다. 수술이 무엇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아주 밝고 천진했다. 옆에 있는 제 엄마에게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는데 심지어 기분도 좋아 보였다. 곧 아이 곁으로 간호사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이것저것 물었고 아이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OO는 주사 맞아도 안 울어요, 저 용감해요”라는 대목에서 다들 호들갑스럽게 칭찬으로 호응했다. 해맑은 웃음소리가 번졌다.


대놓고 쳐다보면 부담스러울까 봐 나는 그냥 앞을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한바탕 응원이 끝나고 수술실 앞이 고요해지자, 갑자기 세상이 나를 돕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을 앞두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내 곁에서 펼쳐지는 풍경들이 하나같이 나를 돕고 있는 것 같았다. 병실 동료의 따뜻한 응원과 챙김, 수술실 앞까지 이동하는 동안에 나눈 대화, 어린 용사의 용기와 아이를 둘러싸고 다정한 마음을 내어주는 저 간호사들의 선의까지.


실은 밤새 나를 다독이느라 진을 빼다가 새벽에서야 겨우 잠이 들었었다. 진통제 알레르기 걱정 때문이었다. 그나마 몇 년 전 남편의 성화로 알레르기 내과를 방문해 안전한 진통제를 찾아내기는 했는데, 수술 중 쓸 진통 주사제가 문제였다. 여러 사람이 몇 번이나 같은 것을 물으며 얼굴에 드리우는 근심만큼 내 불안도 커져 갔다. 이십 년 전 수술의 기록이라도 있었더라면.


수술 중 진통 때문에 마취를 이기고 깨어나는 건 아닌가, 마취에서 깨자마자 수술 부위에서 극단의 통증을 느끼는 건 아닌가, 아예 마취에서 제대로 못 깨어나는 것은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줄 알지만 상상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나를 괴롭혔다. 근데 아이 곁에서 웃음꽃을 피우는 의료진을 보니 선의와 실력을 가진 저 의료진들이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을 다해 나를 도울 것이라는 믿음이 피어올랐다. 두렵던 마음이 조금씩 괜찮아졌다.


안경을 벗어 흐릿한 시야에, 맨발로 휠체어에 앉아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생각뿐이었다. 두려운 마음이 조금 가라앉으니 나를 돕는 생각들을 할 수 있었다. 지금 이 시간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는 남편과 부모님을 생각하고 다정한 관심과 응원을 보내준 친구들을 비롯해 나에게 쏟아진 수많은 선의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몇 년 전 칠순을 넘긴 나이에 뇌 수술을 받으셨던 내 아버지와, 나와 비슷한 시간에 수술대에 누워있을 저 용감한 작은 아이를 생각하니 용기가 났다. 대한민국의 의학 기술과 빅파이브라는 병원의 명성과 담당 교수님의 권위도 믿어보기로 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 울고 갈 박기복 환자 구하기! 수술실 앞에서 나는 온갖 것들을 끌어다가 나를 구하고 있었다. 그날의 MVP는 쟁쟁한 후보들을 물리치고, (당연하게도) 나였다. 이미 수술대 위에 누워 본 이십 년 전의 나와, 수술을 받고 나서 회복을 하고 있을 며칠 뒤의 나. 그 둘이 합심해서 수술실 앞의 나를 구했다. 마음이 편해졌다. 미래의 나를 생각하게 된 것은 김연수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소설 덕분이었다.


이윽고 내 차례가 되었다. 바야흐로 박기복 환자를 의술로써 구할 시간. 이름과 생년월일을 확인하고 수술대에 누웠다. 수술실의 상징과도 같은 그 환한 조명은 아직 켜지기 전. 나는 눈을 감았다. 간호사들이 말을 걸었고 질문에 대답하는데 어렴풋이 가스 냄새가 느껴지는 순간, 레드썬.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진통제 알레르기 걱정이었다. 눈이 심하게 부풀진 않았나 했는데 멀쩡했다. 안심이었다. 의료진이 선택한 진통제는 다행히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지 않았고 나는 마취에서 제대로 깨어났으며 우려했던 극도의 통증은 없었다. 참을 만한 고통을 참아가면서 천천히 회복해 나가는 중이다.


내가 수술실 문 앞에서 느낀 두려움은 정말로 팔딱팔딱한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난처했지만 그 고통이 아니었다면 그때 나를 둘러싸고 얼마나 아름다운 일들이 벌어지는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세상이 나를 돕는 느낌, 타인들의 선의로 가득 찬 안온한 세계에서 비로소 내가 나를 구할 수 있었다. 보지 못하던 것, 안 보이던 것을 마침내 보게 한다는 면에서, 고통은 어둠이 아니라 어쩌면 ‘빛’ 일 수도?  이십 년 전에는 놓쳤던 기회를 이번엔 잡은 것일 수도. (2024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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