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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Sep 14. 2021

어쩌다 출산

진통이 시작됐을 때 공교롭게도 나는 집에 혼자 있었다. 첫아이는 예정일보다 늦게 나온다는 말을 주치의, 엄마, 시어머니, 친구들, 그리고 쌍둥이 아빠인 회사 대표님에게서까지 수도 없이 들은 터라 나도 그럴 줄 알았다. 아니, 겪어 보니 그건 전적으로 아기 마음이었다. 

출산 예정일 이 주 전까지 나는 회사에 나가 일을 했다. 마지막 날도 퇴근 시간 직전까지 신입 직원에게 업무 인계를 하고 신간 발송 작업에 뛰어들었다가 출간 홍보 회의를 주관해야 했다. 시간이 없어 내 짐을 상자 하나와 종이가방 네 개에 모조리 때려 넣은 다음 차 뒷좌석에 내던졌다. 경비 아저씨의 덕담과 자연 분만 예찬을 웃는 낯으로 듣고 나서야 차에 오를 수 있었다. 시동을 거는 소리와 동시에 가슴속에서 기쁨이 마구 차올랐다. “아기 나오기 전까지 실컷 놀아야지.” 일주일에서 열흘은 유유자적 지낼 요량이었다. 그런 다음 출산 가방도 싸고 아기 빨래도 하면서 새 식구를 맞을 채비를 해야지 생각했다. 


그로부터 고작 이틀 뒤에 이슬이 비치리라는 건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호텔 방에서. 큰맘 먹고 계획한 특급 호텔에서의 호캉스가 졸지에 비상 걸려 대기 중인 전시로 바뀌었다. 폭신한 호텔 침구를 덮고 잤지만 남편과 나는 야전 침대에 몸을 누인 것처럼 초조하고 불안했다. 조식 뷔페에서는 식당에 가득 찬 사람들 가운데 우리만 건빵을 물 없이 씹어 삼키는 군인 같은 표정을 짓고 앉았다. 우리의 딱딱한 표정을 호텔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한 걸까, 퇴실 수속을 맡은 직원은 우리 내외를 유독 친근하게 대하더니 돌아가는 길에 마시라며 커피까지 포장해 주었다.    


우리는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주치의는 자궁에 손을 넣어 살펴본 뒤 아기의 결정을 어림짐작해 알려 주었다. “짧으면 이삼 일, 길게는 일주일 내에 아기가 세상에 나올 거예요. 이제 아기 만날 준비를 마무리하세요.”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선물받은 종이상자 채 그대로 보관해 둔 아기 배냇저고리와 내복, 비닐도 벗기지 않고 아기 옷장 서랍에 넣어 둔 가제 손수건 수십 장, 그리고 물려받거나 구입해 아기 방 귀퉁이에다 고이 쌓아 둔 각종 아기 용품들. 여기서 더 큰 문제는 출산 가방에 들어가야 할 준비물은 아직 구입조차 하지 않은 거였다. 

나는 이날 뒤뚱거리며 백화점과 마트를 돌았다. 생리통처럼 배가 사르르 아프기 시작했지만 거기에 정신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집에 돌아오자 현실이 더 실감 났다. 배를 툭 내밀고 허리에 손을 얹은 채 나는 각 방을 종종거리며 필요한 물건을 찾아 출산 가방에 담았다. 남편 역시 밤늦도록 아기 용품을 조립해 완제품으로 만들거나 세척이 필요한 물품을 세정 티슈로 박박 닦았다. 그날 밤은 정말이지 길었다. 나는 꿈에서도 한 손으로 아픈 배를 싸안고 다른 손으로는 일을 했다. 


다음 날 새벽, 뒤돌아보는 남편의 등을 떠밀어 직장으로 보낸 뒤 나는 빨래를 시작했다. 아기 옷과 가제 손수건은 여러 번 세탁을 한 다음에 신생아가 사용할 수 있단다. 맘 까페 회원들과 블로거들이 올려 둔 방법이다. 그걸 무시하자니 내가 빨래를 제대로 안 한 탓에 우리 아기가 먼지를 잔뜩 먹고 건강을 해칠 것만 같았다. 빨래 건조대에서 보송보송 마른 아기 옷과 건조기로 여러 번 돌려 먼지가 어느 정도 빠진 가제 수건을 한 아름 안아들고 나는 발코니 끄트머리에 있는 세탁기로 향했다. 하루 사이에 배가 아래로 처져 더욱 묵직하게 느껴졌다. 엉덩이를 쑥 빼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한 번씩 배를 꼬집어 뜯는 것처럼 아플 땐 잠시 멈춰야 했다. 우리 집 발코니 길이는 고작 칠 미터, 지금의 나에게는 마라톤 코스와도 맞먹는 거리였다. 세탁기 앞까지 거의 다 갔는데 난데없이 초인종이 울렸다. 세 번을 연달아 누르더니 급기야 문까지 두드렸다. 어쩔 도리 없이 나는 이를 악물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나왔다. 

“엄마야, 문 열어.” 

시계를 보니 오전 열 시였다. 아직도 현역인 엄마는 한참 일할 시간이었다. 

“고기는 안 먹힌다 그러고 입맛도 없다기에 된장찌개 끓이고 호박전 부쳐 왔어. 식기 전에 먹어.” 

“배가 이렇게 아픈데 먹긴 뭘 먹어.” 나도 모르게 볼멘소리가 튀어 나왔다. 

“든든하게 먹어야 힘을 쓰지. 먹고 있어 봐. 엄마가 상황 봐서 올게.” “오늘 낳을지 안 낳을지도 모르는데. 일하고 계셔. 내가 연락할게.” 

엄마를 보낸 뒤 된장찌개에 밥을 비벼 한술 떴다. 그 위에 호박전을 올려 먹었다. ‘소태 같이 쓰다’라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거구나 단번에 와닿았다. 그래도 푹푹 떠서 서너 숟가락 더 먹었다. 


오후 두 시가 되자 곱게 개켜 둔 가제 수건을 배배 꼴 정도로 순간순간 고통이 찾아왔다. 유튜브로 배워 둔 호흡을 하며 긴장을 풀려고 노력했지만 되레 힘이 더 들어갔다. 진짜 진통인지 가진통인지 체크해 주는 앱을 내려받아 얼마나 아픔이 지속되는지를 기록했다. 앱에서 알람이 울릴 때 병원에 가면 된단다. 그때 진동이 울렸다. 화들짝 놀랐으나 엄마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아직 병원 안 갔어?” “엄마는 그 옛날 삼십팔 년 전에도 진통 주기 따지면서 병원 안 갔다더니.” “너 혼자 집에 있으니까 불안해서 그렇지. 병원 가서 있어.” “집에서 아프나 병원에서 아프나 똑같지 뭐.” 씩씩하게 말했지만 나도 슬그머니 겁이 나기 시작했다. 택시를 집 앞으로 불렀다. 도착 예정 시간에 맞춰 힘겹게 집을 나서다 문득 궁금해졌다. ‘엄마도 나 낳을 때 무척 아팠을 텐데 혼자 택시는 어떻게 잡았을까.’ 


“산모님, 보호자 분 어디 계세요? 언제 오세요?”

정말 넋을 잃을 것처럼 아팠다. 눈물이 뚝뚝 떨어질 만큼, 창피한 것도 생각 않고 간호사에게 너무 아프다고 무통 주사를 맞겠노라며 호소할 정도로. 오후 세 시, 주치의가 진료를 볼 때까지만 해도 자궁문은 삼 센티미터가량 열려 있었다. 그녀는 오늘 밤에 아기를 만나자고 했다. 네 시, 분만실로 올라와 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을 때까지만 해도 내 밑에 깔린 패드를 쥐어뜯는 걸로 아픔을 달랠 수 있었다. 한데 해일이 밀어닥친 것 마냥 순식간에 아픔이 몰려왔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괴로웠다. “아직 이렇게 아플 때는 아닌데.” 대수롭지 않게 말한 간호사는 눈물로 얼룩진 내 얼굴을 보더니 내진을 했다. 그러더니 다급하게 보호자를 찾는 것이었다. 

“지금 지방에서 올라오고 있어요. 회사가 멀거든요. 5시면 온다 그랬는데 차가 막히나 봐요.” “벌써 자궁문이 칠 센티나 열렸어요. 아기가 곧 나올 수도 있어요. 다른 분은 없으세요?” 

나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말했다. “엄마, 유 서방이 차가 막히나 봐. 보호자를 찾아. 얼른 와.” “금방 갈게.”

나는 옆으로 누운 채 흐느꼈다. 지금 이 순간 여기엔 나 혼자다. 그 사실이 못 견디게 외로웠다. 퇴근 시간 무렵이라 병원 근처가 차량으로 심하게 붐빈다고 했다. 남편, 엄마, 그리고 마취과 선생님까지 누구도 그 소용돌이를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옆을 지켜 주는 간호사에게 불쑥 청했다. 한 손만 빌려 달라고. 간호사는 내 손을 꼭 잡아 주더니 나긋나긋 말을 붙였다. “점심은 뭘 드셨어요?”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 써야 하는데 큰일이네. 그럼 아침은요?” 나는 훌쩍이며 대답했다. “엄마가 된장찌개 해 오셔서 그거랑 밥이요.” “엄마가 딸 힘내라고 음식을 해다 주셨구나. 그러면 우리 이따가 아기 내려올 때 엄마 밥 먹은 기운까지 다 끌어올려서 힘을 줘 봅시다. 할 수 있죠?” 


그 순간 문 너머에서 엄마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내 엄마가 초록색 가운을 걸치고 분만실로 들어왔다. “괜찮아?” “아파 죽겠지. 뭘 물어.” 나는 씩 웃었다. 곧이어 남편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엄마는 병원 밖으로 나가야 했다. 코로나 19 감염 예방 차원에서 보호자를 한 명으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이십 분 후 나는 아기를 품에 안았다. 힘을 몇 번 주자 아기가 쑥 하고 내려온 거다. 어지간히 세상 구경을 하고 싶었나 보다고 주치의가 웃으며 말했다. 남편은 탯줄을 자르는 타이밍에 맞춰 분만실에 들어왔다가 아기를 보고는 금세 퇴장했다.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사진이나 동영상 찍는 것도 까먹어 간호사가 대신 해 주었다. 정말이지 괘씸하고 얄밉기 짝이 없지 않은가.

 

그날 밤 엄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엄마도 나를 힘들게 낳았겠구나 이런 생각 안 들디? 울진 않았어?” “누가 이런 말을 본인 입으로 직접 해. 진통 혼자 겪은 게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나긴 하더라.” 첫아이를 얻은 날, 나는 엄마에게 시답잖은 말을 늘어놓다 통화를 마쳤다. 옆에서 들은 남편이 철이 없다며 혀를 찰 정도로. 

임신 기간과 진통, 분만을 겪으며 순간순간 엄마 생각이 났다. 이땐 어땠을까, 힘들지 않았나, 고생스러웠겠다. 하나 그건 외할머니를 일찍 여읜 엄마에 대한 안쓰러움이었다. 나는 매 순간 엄마가 곁에 있어 줘 어려운 고비도 순탄히 넘겼으니까. 그 점이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 덕에 나는 다소 갑작스러웠고 쓸쓸한 출산 경험도 웃으며 추억할 수 있을 터였다. 다만 아기를 대면한 순간엔 겁이 났다. 내가 받아 온 엄마의 사랑을 이 애에게 오롯이 줄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래도 2020년 7월 15일 나는 결심했다. 적어도 아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어떻게든 살아남겠노라고. 아이 곁에서 필요한 순간마다 엄마의 자리를 채워 줄 거라고. 다른 건 몰라도 ‘엄마가 있어서 좋아’ 이 말만은 꼭 듣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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