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스턴에 잠시 거주 중입니다. 이제는 구글맵 없이도 다닐 수 있을 만큼 지리에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것은 이 도시의 물가입니다. 달러당 1400원대라는 기록적인 고환율과 살인적인 물가의 압박을 벗 삼아 지내는 이방인의 느슨한 도시 적응기를 전합니다.
영리한 보스턴 지역 주민이라면 지난 29일만큼은 하버드 대학 주변 근처에 가지 않았을 텐데. 수업이 있었던 나는 불가피하게도 이날 현장에 있어야 했다. 그것도 졸업식 시간과 맞물린 그 시간에.
2025년 하버드 대학의 졸업식이 있었다. 올해 하버드는 9000여명의 졸업자를 배출했다. 이들 졸업식에 참석하려 전 세계에서 하버드학생의 가족과 친구들이 캠브릿지로 몰려왔다. MIT도 이번 주에 졸업식이 있어 여러모로 이 주변 어딜 가든 사람으로 붐볐다.
하버드 주변 식당과 카페는 죄다 만석이다. 하버드 학생이 아니면 식사권이 주어지지 않기에 가족들은 이 주변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좁디좁은 하버드스퀘어는 이들 인파를 감당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수업을 같이 듣는 한 친구는 이날 주차를 하려 한 시간 반을 돌아다닌 후에야 지쳐 돌아왔다.
하버드를 가로질러 걸으며 많은 사람들과 마주쳐야 했다. 놀랐던 점은 이날 정말 많은 외국인들이 하버드에 와있다는 사실이었다. 졸업식 가운을 입고 돌아다니는 외국인 학생들과 가족들이 모국의 말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몇몇은 자신의 모국 국기를 졸업식 가운이나 모자에 새겨 넣기도 했다. 다양한 인종, 다양한 국가에서 온 인재가 몰리는 곳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
이번 하버드 대학의 졸업식은 긴장감 속에서 이뤄졌다. 트럼프 정부와 대치 중인 가운데 이날 연방 판사는 하버드의 국제 학생 입학을 제한하려는 트럼프 행정부의 조치를 일시 중단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주 하버드의 유학생 입학 허가를 취소하는 조치를 내렸다. 매사추세츠 연방법원에 제출된 서한에 따르면 국토안보부는 연방 규정 미준수를 이유로 하버드대에 부여된 학생 및 교환 방문자 프로그램(Student and Exchange Visitor Program·SEVP) 인증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법원의 본안 판단이 나올 때까지 하버드대는 기존처럼 외국인 유학생을 등록받을 수 있다. 하지만 조치가 유효하게 된다면 하버드 유학생들은 다른 학교로 전학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미국 체류 허가를 박탈당하게 된다. 학생들의 입장에선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외국인 유학생은 연방 재정 지원 대상에서 제외돼 높은 학비를 부담해 왔다. 이번 트럼프 행정부의 제재가 철회되지 않으면 대학 재정은 상당한 타격을 받는다.
단순히 외화벌이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형성된 학문 공동체는 하버드가 세계 최고의 대학으로 성장하는 근간이자 권력이다. 하버드대학교의 전체 재학생 중 약 1/4 이상이 147개국에서 온 국제학생이고, 대학원생의 그 비중은 이보다도 높다고 한다.
졸업생 기부금이 가장 많다는 점만 봐도 하버드 대학 출신들의 학맥과 사회적 기여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재학생 중에는 어느 나라 왕실의 자녀, 정치인의 자녀, 석학들의 자녀들이 다니고 있다. 단순히 학맥뿐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그리드를 대를 이어 촘촘히 그려나가는 구조다.
트럼프의 조치가 실현될 경우, 하버드에 다니는 이들 자녀들도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상황이다. 보스턴글로브에 따르면 벨기에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엘리자베스 공주가 대학원을 재학 중이고,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의 딸도 하버드에서 학부생으로 있다. 대학을 억압하는 조치가 자칫 외교 문제로 번질 지 모른다.
어쩌다 하버드는 트럼프와 원수지간이 됐나. 앞서 여러 글에서 언급했듯, 트럼프 행정부는 캠퍼스 내 반유대주의를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이를 의식해 하버드에서는 교내에서 벌어지는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 등이 열리지 않도록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는 일도 있었다.
여기에 더해 트럼프 정부는 하버드의 연방 연구 기금을 30억달러 삭감하기로 했고, 이를 기점으로 중립을 지키던 하버드도 반발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번 비자 폐지는 학생들이 주로 사용하는 F비자와 교수, 연구원, 학생 등이 사용할 수 있는 J비자에 영향을 준다. 보스턴 지역에 사는 주변 대학원생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모두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다고 한다. 하버드에서 시작된 일이 주변 대학까지 영향을 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You don’t need to be a conservative to hate Harvard. As the very liberal economist Paul Krugman put it recently, “Harvard is easy to dislike. It’s rich. It’s elitist. It rejected my application back when I was a high school senior. But schadenfreude, as satisfying as it might be for a time, isn’t really a legitimate governing strategy.
(진보 경제학자 폴 크루먼이 "하버드는 싫어하기 쉽다. 부유하고, 엘리트주의적이다. 고등학교 때 내 입학지원서도 거절했다."라고 말했듯 하버드를 싫어하는 데 꼭 보수주의자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남의 불행을 즐기는 감정(schadenfreude)은 잠시 동안은 만족스러울 수 있을지 몰라도, 진정한 통치 전략은 아니다 )”
-보스턴글로브 사설 <This is getting out of hand> 중-
이번 상황은 그간 하버드의 엘리트주의에 대해 비판해 왔던 여러 언론들조차도 옹호하기 어려운 지경으로 보고 있다. 트럼프의 대학에 대한 보복이 무의미하고 파괴적인 연극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스턴글로브는 최근 사설에서는 하버드와 미 정부의 관계를 손쓸 수 없는 상황(This is getting out of hand)이라고 표현했다. 재미있는 점은 하버드가 최소한의 학문적 자유와 독립성을 보장받기 위해선 정부와 '협상'이 필요한 때라고 조언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요구하는 점 중 일부는 받아들이고 최악의 수는 면하라는 것이다. 트럼프 정부가 캠퍼스 내 유대인 혐오 근절 등을 이유로 든 DEI(다양성·형평성·포용성) 정책 폐기를 비롯해 △유대인 학생들을 위한 보호 장치를 강화하며 △교수진의 이념적 다양성을 확대하는 것을 예로 들었다.
또 행정부에도 하버드 출신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는 점을 들며 중재자를 찾고 물밑 교섭에 들어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우리는 외국인 없는 하버드 졸업식을 보게 될까. 세계 최고의 대학은 세계 최강 정부를 상대로 역공할 수 있을까. 아니면 실용주의로 돌아설까. 벼랑 끝에 몰린 하버드의 선택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