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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을 느끼며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부쩍 드는 요즘이다. 물론 보수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가는 동안 애착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세월이 지날수록 일에 능숙해지고 보람도 얻어서 나의 업에 대한 자부심을 크게 느끼게 되면 좋겠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입사할 때만 해도 호기로웠다. 열정의 불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타올랐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시간에 대해 반비례 곡선을 그리며 열과 빛을 잃어갔다. 이윽고 나는 사무실 안의 공기를 갑갑하게 느끼는 지경에 이르렀다. 출근이 두렵고 퇴근이 마려운 일상이 매일 반복되는 요즘이다.
나와는 썩 맞지 않는 일이라 치부하면서 회사를 옮긴다 해도 마찬가지다. 벌써 네 번째 직장이다. 어디를 가나 노동으로부터 소외된 기분을 느낄 것이고 어김없이 번아웃될 것이다. 그러다가 눈동자에 투영된 생명의 불꽃이 꺼져갈 때쯤 퇴사를 선언하는 시나리오는 너무나도 뻔한 이야기다.
그들은 반쯤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사분의 일쯤 살아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생명의 불꽃이 희미하게 깜빡거리는 수많은 뼈들이 든 자루였다. 썰매가 멈추면 개들은 끈에 매인 채 죽은 듯이 털썩 주저앉았고 생명의 불꽃은 멀리서 희미하게 꺼져 가는 듯했다. 다시 곤봉이나 채찍으로 맞으면 그 불꽃이 희미하게 깜빡였고 그들은 간신히 일어나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잭 런던, 『야성의 부름』, 권택영 옮김, 민음사, 2010년 10월 22일, p.84
잭 런던의 소설 『야성의 부름』은 사람에게 길들여진 채로 살아가다가 끝내 야성을 찾는 개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분명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개에 관한 이야기일 텐데, 내 삶을 서술하고 있는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 든다.
책의 중반부에 해당하는 ‘썰매 끌기의 괴로움’이라는 편에서 썰매개들이 처한 비련한 상황에 시선이 머물렀다. 앞서 인용한 단락에서 주어인 ‘개’에다가 ‘그 사람’을 넣어도 어색하지 않게 읽힌다. 그리고 조금 각색을 해보면 이렇게 쓸 수도 있겠다.
그 사람은 반쯤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사분의 일쯤 살아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생명의 불꽃이 희미하게 깜빡거리는 수많은 뼈들이 든 자루였다. 퇴근 후에는 거실 바닥에 죽은 듯이 털썩 쓰러졌고 생명의 불꽃은 멀리서 희미하게 꺼져 가는 듯했다. 그러다가 다음 날이 되면 그 불꽃이 희미하게 깜빡였고 그 사람은 간신히 일어나 비틀거리며 출근했다.
…
입안에 쓴 약을 욱여넣듯이 출근하는 요즘. 약의 효능을 체험하기도 전에 쓴맛의 괴로움으로 하루하루가 시든다. 언제까지 견뎌야 할까, 다른 길은 없을까? 내일이 없는 ‘내 일’을 하면서 보람도 건강도 서서히 잃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