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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채원 Mar 28. 2017

어느 초보 여행자의 일기

‘여행’에 관한 고찰 - 누군가의 여행은 또다른 누군가의 삶이다

  우여곡절 많은 여행이었다. 겨우 이틀 남짓한 시간이기에 간단히 다녀올 수 있으리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은 나 큰 착각이었다. 주말을 코앞에 둔 금요일 열한시 반, 벌써부터 피곤에 절어버린 무거운 몸을 버스에 겨우 실었다. 남들은 불금이니 불토니 즐기기 바쁘다지만, 밤샘에 취약한 나로서는 자무렵 서울에서 출발해 새벽 네시에 부산에 도착하는 일정부터가 엄청난 도전이었다. 여느때와는 달리 목적지에 최대한 늦게 도착하길 바라면서 창가에 기대어 눈을 붙였다. 얼마쯤 지났을까. 다 온 것 같은 느낌에 눈을 떠보니 새벽 세시 오십분. 늦기는커녕 예정시간보다도 일찍 도착한 버스를 야속해하며 내리는데 이게 걸,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우산은 없고, 설상가상 남쪽여행이랍시고 혼자만 봄처녀인냥 어설프게 챙겨입은 얇은 옷차림은 날카롭게 파고드는 바닷바람을 온전히 막아주지 못했다. 아, 날씨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탓에 졸지에 궁상맞은 뜨내기 여행객이 되버렸다. 이 와중에도 우산 살 돈 삼천원이 아깝게 느껴져 터미널 앞에 있는 24시 식당까지 철벅거리며 뛰어갔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앞사람이 들어가면서 열린 이 채 닫히기도 전야구선수마냥 문틈으로 몸을 날렸다.

  새추위와 비를 피 찾은 식당은 불금을 보낸 현지인들이 술에 절은 속을 달래기 위해 찾는 나름 유명한 고기국밥집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늦은건지 이른건지 모르겠는 이 시간에도 손님들이 많다. 메뉴판은 볼 것도 없었다. 주문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뜨끈한 국물이 담긴 뚝배기 하나가 내 앞에 놓였다. 뚝배기 속 고기 위에 얹어진 마늘의 알싸한 향이 코끝에 스치는 순간- 아차, 버스에 핸드폰을 두고 내렸다.

  낭패였다. 아직 다섯시도 안 됐으니 터미널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평소에 좋아하던 국밥을 먹는데도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마음이 불안했다. 결국 그릇을 다 비우지 못한 채 몸을 으켰다. 꺼진 터미널에는 새벽 차를 탈 손님을 기다리는 버스들만이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추위에 덜덜 떨며 두 시간 가까이를 기다린 끝에 다행인지 불행인지 겨우 핸드폰을 찾았다.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화려한 신고식을 치렀던 긴 밤은 그렇게 끝이 났다. 터미널을 나 보니 이미 동은 텄고, 나의 짧은 여행이 시작됨과 동시에 이름모를 누군가의 일상적인 아침도 다시 시작됐을 것이다.

  늘 여행하는 삶을 꿈꿨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다는 뻔한 핑계는, 나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기회비용’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빌려만큼 가진 게 많지도 않건만, 아무래도 나에게는 ‘용기부족’이란 말이 더 잘 어울릴 것 같다. 돈이 없으면 없는대로 과감하게 떠나는 여행자들도 많은 걸 보면 말이다.

  예전에는 그런 내 자신이 못난 사람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구박하기도 했다. 넌 왜 못 하니, 뭐가 무섭다고. 지금도 여전히 용부족인 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 나를 그냥 인정하기로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한결 편안하다. 화려한 성공을 위한 치열한 삶보다 수수하지만 평화로운 여유가 좋아 지금의 일을 선택한 것처럼, 어쩌면 고생스런 여행은 피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비행기는 비즈니스를 타고 고급 호텔에서 머물며 돈 걱정 없이 다니는 호화스러운 여행도 별로 취향은 아니지만(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몇십키로짜리 배낭을 멘 채 화장은 고사하고 제대로 씻지도 못하면서 베드버그가 나오는 도미토리를 숙소로 삼는 건, 아직 좀 겁난다.

  내가 꿈꾸는 여행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오지를 탐험하거나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멋진 장소를 가는 것이 아니다. 나의 일상과 별다를 바 없는, 평범한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보며 신기해하고 새롭다 느끼는 것.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보았던 그 누군가의 일상에 자연스레 녹아들어 그들의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는 것. 나에게 있어 여행이란 그런 의미였다.  

  누군가의 여행은 또다른 누군가의 삶이다. 비행기를 타고 열 시간 이상씩 걸리는 나라로 여행을 떠났을 때도 깨닫지 못했던 이 간단한 명제를, 고작 차로 네 시간밖에 안 걸리는 부산에 와서 처음으로 느꼈다. 한 가지 신기한 사실은, 이 세상은 한편으론 참 공평해서 나의 여행이 그 누군가에게는 일상이라면, 그의 여행은 곧 나의 일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다가오는 연말, 혼자 떠나는 첫 유여행을 앞두고 내가 만나게 될 어느 이름모를 사람들의 삶은 어떨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그들에겐 매일같이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 나에게는 마치 미지의 세계처럼 설레게 느껴지겠지. 아직은 의욕만 앞서는 겁도 많고 걱정도 많은 어설픈 초보 여행자이지만, 그래도 괜찮다. 서른살, 내 삶의  30도 이제 막 시작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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