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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화 Nov 13. 2022

다음 소희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관람작 #4

국가 : 한국 

감독 : 정주리      



영화는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뉜다. 전반부에서 모호했던 일들이 후반부에서 선명해진다. 전반부에서 카메라는 핸드헬드로 흔들리면서 불안하게 인물의 얼굴을 따라가며 비추지만, 후반부의 카메라는 고정된 채 거리를 두고 인물과 사건을 보여준다. 

영화 앞부분은 숨이 막힌다. 관객들에게 콜센터 직원 체험을 시키는 것 같았다. 전화선 너머의 고객들은 전화를 받는 직원들이 눈에 보이지 않고 을의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함부로 감정을 쏟아놓는다. 

현장실습생 소희(김시은 분)가 하는 일은 통신사 하청업체에서 계약 해지를 하려는 고객을 방어하는 일이다. 미성년의 현장실습생이 하기에는 업무 강도가 큰 일이다. 소희와 동료들은 감정노동에 시달리며 점점 시들어간다.      

후반부에서는 형사인 유진(배두나 분)을 통해 소희의 가해자, 즉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를 추적한다. 그것들은 도처에 존재한다. 그리고 하나같이 책임을 회피하고 피해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호도한다.


성과주의, 경쟁주의가 만연한 세상. 특성화고 졸업반이자 현장실습생인 소희는 진상 고객의 폭언과 회사의 실적 압박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회사는 근로계약서를 이중으로 작성하게 하고 실적을 빌미 삼아 수당도 주지 않고 야근을 시키는 등 착취한다. 업무 강도에 비해 턱없이 적은 보수를 주고, 실습생이라는 이유로 약속한 인센티브도 주지 않는다. 그들에게 소희들은  쓰고 버리는 소모품에 지나지 않는다. 하청을 준 회사에서 문제가 생기면 원청은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 사고나 자살 사건이 발생해도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유연하게 발뺌을 한다. 그들의 뒤에는 자본의 힘이 있다.

소희 주변의 친구들도 소희와 처지가 다르지 않다. 소희와 같은 현장실습생인 그들은 박봉에 소모품처럼 취급받고, 심지어 왕따와 폭력을 당하면서도 나쁜 평가를 받지 않으려고 죽은 듯이 지낸다.

소희의 죽음 이전에 또 다른 죽음이 있었다. 소희를 인간적으로 대해준 상사였던 그는 내적 갈등과 회사의 실적 압박 때문에 자동차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회사는 교묘하게 사건을 은폐하려 한다. 합의를 종용하는 과정에는 거짓과 협박이 있다. 한 생명이 스러져 갔는데도 책임 회피와 사건 은폐에 급급할 뿐만 아니라 피해자에게 문제가 있다고 사방에 알리며 동료의 죽음에 슬퍼할 기회도, 조문도 막는다. 그 일 이후 소희의 절망은 더 깊어져 간다.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그런 일들은 이제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현장실습생을 값싼 노동력으로만 취급하여 충분한 교육을 하지도 않은 채 현장에 투입하고, 안전 수칙과 경력자와의 2인 1조라는 규칙 무시 등으로 아까운 아이들이 다치고 사망하는 사고가 잇달아 발생해 왔다. 그와는 조금 다른 일이지만 얼마 전에는 SPC 빵 공장에서 소스 배합기에 몸이 끼여서 스물셋 꽃다운 청춘의 목숨이 스러져 갔다. 모두 안전을 최우선으로 두지 않고 노동자를 기계 부품처럼 여기고 생산성에만 치중한 결과이다. 정부 여당은 중대재해처벌법을 무화시키려고 하는 상황이었다. 회사는 사고 난 기계에 흰 천을 씌우고 그 바로 옆에서 그녀의 동료들이 작업을 계속하게 했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다. 언제쯤 이런 뉴스를 보지 않아도 될까. 법과 제도를 바꿔야 한다. 대기업의 횡포를 정부가 감싸 안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다음 소희가 이전 소희의 길을 밟지 않도록, ‘다음’이라는 말에 깃든 희망을 볼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길이 왜 이렇게 요원해 보이는지…….     

애초에 정주리 감독은 이 소재로 장르영화, 상업영화 제안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볼수록 도저히 상업영화로 만들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영화 중간에 주인공이 죽는다는 사실과 함께, 영화가 애초의 의도에서 멀어질 것을 제작사에 통보했는데 다행히도 수락했다고 한다. 영화를 다 본 입장에서, 이런 소재를 가지고, 그것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재를 가지고 상업적인 장르영화를 만들 생각을 했다는 사실도 좀 충격이었다. 그렇게 했더라도 경각심은 심어 줄 수 있겠으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느꼈던 서늘한 감정은 <다음 소희>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영화는 소희의 춤으로 시작하고 맺는다. 소희의 취미가 댄스라는 것은 직장 동료도, 부모도 알지 못했다. 소희는 어떤 아이였을까. 무엇을 좋아했고 꿈은 무엇이었을까.

통신사 하청업체 콜센터에서 콜 수가 늘어감에 따라 소희는 인간의 존엄을 잃어 갔고, 상사의 자살에 대한 회사의 대처와 압박에 절망했다. 자본 권력이 인간을 소모품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문틈으로 들어온 가느다란 빛에 오래 시선을 주면서 소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실적을 압박하는 비인간적인 상사, 취업률에 눈이 먼 학교와 담임, 소희만큼이나 제 앞에 놓인 삶이 팍팍한 친구들, 그들 중 누군가가 소희의 고통을 이해하고 손을 내밀었다면 소희는 마음을 바꿀 수 있었을까. 다음 소희에게는 그런 아픔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무력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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