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관람작 #6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장르 : 다큐멘터리
감독 : 김보람
나는 자주 모녀 이야기에 끌린다. 이 영화에서 섭식장애라는 생소하고 묵직한 소재보다 먼저 눈을 끈 건 모녀라는 프레임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며, 타인이 모르는 아픔을 가지고 살아간다.
김보람 감독은 전작 <피의 연대기>에 이어 여성의 몸에 대한 관심을 확장해서, 섭식장애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준비 중이었다. 30여 명의 여성을 인터뷰하며 촬영을 한창 진행하던 중에 상옥 씨를 알게 되었다. 첫 만남은 상옥 씨가 교사로 근무하는 무주의 한 대안학교에 초청되어 <피의 연대기> 상영을 마친 후에 이루어졌다. 주차장까지 감독을 따라 나온 상옥 씨에게서는 절박함이 보였다. 그녀는 섭식장애를 다루는 감독의 차기작에 참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자신의 딸이 오래전부터 그 병을 앓고 있다고 덧붙이면서. 상옥 씨가 그토록 적극성을 보인 이유는 차기작에 대한 오해 때문이었다. 영화의 주제를 섭식장애의 치료법에 관한 내용으로 알았던 것. 섭식장애가 긴 세월 동안 모녀를 괴롭혀 온 주제라는 걸 그 대목에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러닝타임 내내 그들 모녀의 대화에 빠져들게 만드는 놀라운 영화가 출발했다. 인터뷰 시간이 쌓이면서 영화는 의도했던 것보다 더 깊어졌다. 섭식장애라는 소재는 뻗어져 나온 가지일 뿐, 그것을 따라가다 보니 모녀 이야기라는 본줄기에 닿았고 그것은 다시 여성의 이야기라는 뿌리로 뻗어나갔다.
감독이 앞서 촬영한 분량을 버리고 과감히 방향을 틀게 할 만큼 두 사람이 살아온 삶은 치열했고,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극영화보다 더 극적이었다.
두 사람은 멋진 여성이다. 독립된 하나의 개체로 볼 때 그렇다. 그런데 부모 자식이라는 끈으로 연결되면 이야기는 조금 더 복잡해진다.
완벽한 어머니는 없다. 그래서 시간이 흐른 뒤, 그때 내가 아이에게 이랬다면, 하고 서늘하게 되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의문이 떠올랐다.
그래, 왜 엄마만 항상 아이 때문에 아등바등해야 하고, 죄책감을 채무처럼 떠안아야 하는가. 왜 이제까지 그 자리에 아버지는 없었는가. 그리고 왜 그걸 당연시해 왔는가.
이제는 흔해져 버린 모녀 서사나 모녀간 갈등도 그렇다. 많은 딸들은 내심 엄마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 거라 다짐한다. 엄마가 살아온 삶을 지켜본 산 증인으로서 엄마를 반면교사 삼는 것이다. 사실 딸들이 엄마의 삶을 본받고 싶지 않게 만든 원인은 상당 부분 잘못된 구조에 기인한 것인데 그것을 엄마 개인의 잘못으로만 전가한다. 그 연원은 길다. 한참 거슬러 올라가 조선 후기부터 고착화된 가부장제의 역사 말이다.
나도 엄마를 보며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나는 엄마의 삶을 지켜보면서 아예 결혼이라는 걸 내 인생의 목록에 올리지 않았다. 자연히 내 미래상에 ‘엄마’도 없었다.
우리 엄마는 무학이다. 두 외삼촌과 달리 엄마와 이모들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등교하는 친구를 따라가서 교실 창밖에서 까치발을 하고 선생님과 칠판과 아이들이 있는 교실 풍경을 향해 부러운 시선을 보냈다고 한다. 사리 판단이 바르고 세상일에 현명한 엄마가 만약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곤 한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엄마는 그 시대 여성들이 대개 그랬듯이 결혼 전이나 후나 평생 집안일과 부엌에 매여 살았다. 식구들 뒤치다꺼리로 평생을 보낸 것이다. 결혼 후에는 그저 자식들 하나만 바라보고 사셨다. 그게 엄마의 우주고 세상이었다. 생활비를 적게 주는 아버지 때문에 엄마는 살림하는 틈틈이 억척스럽게 양계며 문구 판매 일을 하셨다. 그 억척스러움은 서울 변두리 동네, 방이 많은 허름한 집으로 이사 간 후 대학생들 하숙을 치는 것으로 이어졌다. 다만 교육자로 정년퇴직하신 아버지는 자식들의 교육비만큼은 책임지셨다. 박봉으로 많은 자식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인색하게 사시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일면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 인색함이 유독 살림을 꾸리고 자식들을 키우는 엄마를 향했다는 데 이르면, 같은 여성으로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엄마 옆에 서게 된다.
엄마를 보며 나는 반드시 직업을 가질 거라 다짐했다. 그것도 성차(性差) 없이 견고한 직업, 즉, 전문직 같은 걸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엄마처럼 평생을 집안에서 식구들 뒤치다꺼리만 하며 늙어 가기 싫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나는 결혼하면 그런 삶을 살기가 힘들다는 걸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는 여성의 삶의 조건이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되게 열악했던 시대였다.) 그런데 결혼한 여자는 그러면 안 되나? 매슬로우에 의하면 자아실현은 인간의 최고 높은 단계의 욕망이라는데. 거기에 남녀 구분은 없는데.
상옥 씨는 20대 때 운동권 학생으로, 노동운동으로 치열하게 살았다. 그런데 구소련이 붕괴되고 그녀의 삶의 신념이자 동력이었던 이념이 갑자기 증발해 버렸다. 삶의 기둥과 좌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즈음 아이가 생겼다.
무주에 있는 대안학교에서 사감을 구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월 급여 50만 원. 대신 숙식이 제공되었다. 교사도 아닌 사감이라도 그녀는 좋았다. 무슨 일을 시작했다 하면 열정적으로 빠져드는 게 그이의 천성이었을까. 그는 그때를 보람과 충만감으로 기억했다. 반면 딸 채영 씨는 그 무렵의 자신을 혼자만 있는 어두운 공간으로 기억했다.
어린 채영 씨에게는 엄마밖에 없었을 것이다. 짐승의 새끼가 어미의 품을 파고들 듯 엄마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에게는 채영 씨 말고도 엄마를 따르는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사람 관계는 상대적이니까 상옥 씨가 학생들에게 마음을 듬뿍 쏟은 결과일 것이다. 채영 씨에게는 불행한 일인 것이, 상옥 씨의 일은 안과 밖의 경계가 없었다. 아이들은 둘의 주거 공간에 수시로 침입했다. 채영 씨에게는 사적인 공간이 허락되지 않았고, 엄마는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다.
상옥 씨는 말한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한 주나 두 주 동안 딸을 겨우 한 번 정도 떠올렸다고. 소위 모범적인 엄마들은 이 대목에서 그녀를 비난할 수 있다. 어떻게 엄마가 자식을 잊어버릴 수 있으며 방치할 수 있냐고. 그러나 엄마도 사람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 앞에 주어진 삶이 최대 과제이다. 물론 그 속에 딸 채영 씨도 있었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그때 그녀는 겨우 30대. 그럴 수 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러는 동안 채영 씨는 마음이 병들어 간다. 아침에 이웃에게 자기를 맡겨 놓고 뒤도 안 보고 사라진 엄마를 기다리는 예민한 아이. 깜깜한 밤이 될 때까지 덩그러니 어두운 방 안에 남겨져 있던 아이.
어린 채영 씨는 다른 아이들보다 더 마음의 살갗이 여리고 민감한 아이였다. 다른 아이들에게 엄마를 빼앗기고, 보채거나 어리광 부리는 건 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아이답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다. 엄마를 독차지하고 싶고 매달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아이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렇다고 상옥 씨를 비난할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삶을 그때그때 치열하게 살았을 뿐이고 나름대로 아이에게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같은 엄마로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건 나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그러던 중에 채영 씨에게 섭식장애가 찾아왔다. 15살에 폐쇄 병동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입원 후에도 먹지 않고 한동안 서서 지냈다고 했다. 음식을 거부할 때면 내가 내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만족감을 느낀다고 했다. 자신의 육체를 해치는 방법으로 자존감을 찾는 것일까. 상옥 씨는 저러다가 아이가 죽을 것 같다는 생각에 애가 타고 두려웠다.
채영 씨가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날 때 상옥 씨는 딸을 부둥켜안고 “아프지 마.”를 연발하면서도 한편으로 안도감을 느낀다. 안도감을 느끼는 건 채영 씨도 마찬가지다. 아프지 마. 이 말을 채영 씨는 싫어한다. 자신을 걱정하는 어미의 마음, 그리고 아픈 딸을 보면서 아무 도움이 되어 주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그대로 전해져 오기 때문일 것이다. 채영 씨에게 그 병은 한때는 싸워가며, 이제는 다독여가며 같이 살아가야 할 존재이다. 그래서 “아프지 마.”라는 말은 어쩌면 무의미하게 들린다. 상옥 씨는 상옥 씨대로 딸이 듣기 싫어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그 말밖에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네 음절의 짧은 문장에는 우리가 짐작하지 못할 많은 역사와 감정이 담겨 있다.
비장한 마음으로 떠난 호주에서의 삶은 코로나로 인해 계획보다 일찍 막을 내려야 했다. 서로에게 거리를 두고자 시도한 홀로서기는 그렇게 허탈한 결말로 끝났다. 둘은 어쩔 수 없이 상옥 씨의 집에서 조금은 불편한 동거에 들어간다. 그러나 둘이 대화를 주고받는 걸 보면, 저게 불편한 사이라고?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둘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 그것이 싸움으로 발전하는 일은 없다. 둘은 조곤조곤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한다. 깊디깊은 이야기를 이제는 거리를 두고 덤덤하게 풀어놓는 그들. 밀착된 관계에서는 서로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대화가 쉽지 않은 법인데, 두 사람은 마치 친구같이 서로를 존중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상대방에 대해 미처 몰랐던 사실을 알게도 된다.
아무리 모녀라 해도 상대의 마음에 들어갈 수는 없다. 각자의 아픔은 각자가 감당해야 한다. 엄마는 여전히 딸에 대한 걱정이 있지만 이제 성인이 된 딸을 마음에서 보내야 한다는 사실도 누구보다 잘 안다. 그건 채영 씨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끝나고 스크린 앞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높고 긴 능선을 넘어온 듯 한결 편안해 보였다.
상옥 씨는 채영 씨에 대한 묵은 감정들을 털어낼 때가 되었다. 마음 졸임과 자책과 후회, 미안함. 그건 이제까지의 것만으로 충분히 갚았다. 채영 씨도 그때 왜 그랬냐고 엄마를 원망하는 일 따위는 졸업한 지 오래인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이야기는 두 사람을 넘어 상옥 씨의 어머니, 채영의 외할머니까지 나아간다.
상옥 씨 역시 어머니와 껄끄러운 관계였다. 어머니가 싫었다. 고인이 된 어머니에 대한 자세한 묘사는 없지만, 그분도 불행했다는 것만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가부장적인 남편 밑에서 부당하고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고 누르며 산 여자. 억눌린 분노는 가끔 딸을 향했겠지. 간섭이나 잔소리나 더 심한 말로. 놀라운 것은 상옥 씨의 어머니도 섭식장애를 앓았다는 것이다. 정신없이 음식을 먹은 뒤 길에서 주운 나뭇가지로 목구멍을 쑤셔서 먹은 걸 토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는데 참혹했다. 속엣것들을 밖으로 드러내 놓지 못하고 참았다는 점은 채영과도 같았다. 유일하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자신의 몸이었고 그렇게 했을 때 쾌감과 안도감을 느꼈다. 채영 씨도 그 비슷한 말을 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몸이라고. 그렇게 했을 때 자아실현을 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사람들에게 나는 나야, 하고 주장하는 하나의 방식인 셈이다. 거식증은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독한 의지에서 오는 것이었다.
유년기의 상처는 성인이 될 때까지, 아니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삶을 지배한다고들 한다. 저명한 학자들은 양육자의 태도가 자녀가 성인이 된 이후까지 영향을 미친다면서 으름장을 놓는다. 그래서 엄마들은 자책감을 필수품처럼 떠안고 모든 게 자기 탓이라고 생각한다.
딸이 어느 날 갑자기 섭식장애를 앓게 되었을 때의 상옥 씨의 마음을 나는 짐작할 수 없다. 단, 자책의 화살이 자신을 무수히 찔렀을 거라는 건 알 수 있다.
영화를 보고 관객과의 대화를 들으면서 그 생소한 병증은 세계에 대한 분노나 부정적 감정이 세계나 타인을 향하는 대신 자기 자신의 몸을 향한 결과라고 이해했다. 어쩌면 심성이 착하고 마음의 피부가 얇은 이들이 걸리기 쉬운 병이 아닐까 싶었다. 조금 더 뻔뻔하고 화를 밖으로 표출하고 남을 원망할 수 있었다면 걸리지 않았을 병.
한때 음식을 절대적으로 거부했던 채영 씨는 아이러니하게도 음식 만들기를 즐긴다. 음식 재료를 다루는 손끝에는 정성이 묻어난다. 영화에는 작은 식당에서 음식을 만들고 손님을 맞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음식이 맛있었는지 장사가 꽤 잘 됐다고 하는데 현재는 그 일을 하고 있지 않다. 관객의 물음에 대해 채영 씨는 타인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일 말고, 돈을 받고 음식을 파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음식을 만들게 되면 어쩌면 몸에 독이 될 수도 있는 음식을 만들게 될까 봐 그렇다고 했다. 그녀의 정성스러운 마음과 깊은 시선이 느껴지는 답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놓인 철로처럼 좁혀지지 않는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 두 사람 모두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억지로 거리를 좁히려 노력하기보다 일정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는 평행선이 좋다고 한다. 단 시선이 서로를 향해 있으면 된다는 말에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매력적인 두 사람이 각자 홀로서기에 성공하고 멋진 삶을 사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가까이 밀착되어 상처를 주고받는 모녀 관계가 아니라, 떨어져 있어도 잘살고 있겠지 하고 믿는 좋은 친구 같은 관계가 될 것 같다. 두 사람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