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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화 Mar 16. 2023

단순한 열정

영화로 보고 소설을 다시 읽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런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야기. 원작소설을 쓴 작가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이야기이기에 더 몰입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영화는 만듦새가 좋았다. 원작의 시대적 배경을 현재로 바꾸었는데, 장치들이 과하지 않고 적절했다.

구글 검색창에 헤어진 연인의 이름을 쳐볼 수도 있고, 그의 주소지를 생생한 로드뷰로 찾아볼 수도 있다. 또한 이 작품의 배경인 1980년대 말에 비하면 페미니즘이 확산되어 여성의 자의식이 높아졌다는 정도의 차이가 눈치 못 챌 만큼 들어가 있다.    

 

성애 장면은 적나라하지만 야하기보다는 아름답다. 동작들이 잘 계산되고 연출된 춤사위 같았다. 영화를 보고 난 뒤 검색해 보니 매력적인 남자 주인공 역의 세르게이 폴루닌은 한때 영국 로열 발레단 최연소 수석무용수에 오른 발레리노였다. 과연, 그렇군, 생각했다.     


엘렌은 일상에서 마주치는 여자들을 보며, 저들도 어떤 남자를 사랑할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무의미한 삶을 살아갈까, 생각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세상이 아무 일 없이 무표정하게 돌아간다는 일이 신기하다.

엘렌은 꿈속에 사는 듯, 일상을 살아가나 그 속에 있지 않다.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알렉산드르(소설에서는 A로 명명된다.)로 가득 차 있다.

사랑, 또는 열정에 빠진다는 건 일종의 미쳐있는 상태. 그것은 일상과 대척점에 놓여, 사랑에 빠진 사람을 다른 세계에 속하게 한다. 늘 그런 상태를 유지하고 살 수 없기에 신은 이별이라는 출구를 마련해 놓고, 당장은 살을 찢는 고통을 느끼더라도 억지로 둘을 떼놓으려 하는 것일까.


그녀는 알렉산드르와 이별한 뒤에도 그의 손길을 느낀다. 그가 숨 쉬는 공기를 느끼고 싶어 그가 산다는 도시로 몇 번이고 찾아간다. 사람들이 입김을 뿜으며 바삐 오가는 거리 한가운데 서서 그녀는 경이로운 장면이라도 발견한 듯 달뜬 얼굴로 별것 아닌 풍경을 바라본다. 이유는 단 하나, 거기에 그가 다녀갔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르가 숨 쉬는 공기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녀의 표정에 생기가 도는 것이다. 그녀가 사는 파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얼어붙은 낯선 도시에는 무표정하게 걸어가는 행인들만이 있다. 열에 들뜬 그녀만이 그들 속에서 도드라져 보인다. 비정상적이어서 눈에 띄는 모습으로. 흑백의 배경 속에 홍조를 띤 그녀 얼굴만 홀로 색감을 뿜어낸다. 불온하게.     



이별 후에 그녀는 한동안 일상의 삶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아들을 챙기는 일 같은 최소한의 의무도 그녀에게는 불능이다. 그러나 시간은 피가 철철 흐르는 상처도 아물게 한다. 분명한 건 그녀는 그와 만나기 전의 그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고통의 시간을 통과하고 어느 정도 원래 일상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알렉산드르에게서 전화가 걸려온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귀에 익은 목소리는 한순간에 엘렌을 이별하기 전으로 돌려놓는다. 알렉산드르가 묵고 있는 호텔까지 그를 데려다주고 기약 없는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비로소 그와 끝이 났다는 걸 안다. 알렉산드르와의 만남과 이별 이후 그녀는 어떻게 변했을까.      


그 사람 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 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이별 후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거리를 걸어가는 엘렌의 모습을 보면서, 뜬금없지만 모든 경험은 글쓰기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우리나라 같은 보수적인 사회에서는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을 수도 있는 경험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글을 쓰고 발표하는 일이 쉽지 않다. 그 글이 불륜 이야기라면 더 그렇다. 그런 경험이 아니 에르노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텐데. 그녀의 용기가 멋지게 느껴진다.    


영화를 보고 와서 책장에서 <단순한 열정>을 뽑아 단숨에 읽었다. 분량이 짧기도 했지만, 영화를 보고 난 직후라 집중이 더 잘 됐다. 처음 읽었을 때보다 그녀의 감정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작가가 자신의 감정을 언어화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는 게 느껴졌다. 소설에서 그녀는 시종 진지했다. 구체적일 수밖에 없는 영화와 달리 자신의 감정에 천착하여 탐구한 소설은 관념적이기까지 했다.

글을 쓰는 그녀를 상상했다. 아니 에르노는 자기 삶을 소재로 글을 쓰는 사람이다. 자기 생에 일어난 특별한 일을 놓칠 그녀가 아니다. 사랑에 빠져 있는 동안 자신의 행동과 생각과 느낌을 실험실에서 현미경을 들여다보듯이 관찰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한다.     

 

모든 경험은 독자적이고 고유한 것이다. 글쓰기에 있어서 모든 경험은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 윤리적인 잣대를 포함해서 글 자체와 관계없는 모든 잣대는 불필요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렇게 독자적이고 고유하며 구체적인 경험이 녹아 있는 글에 열광한다. 다시 한번 말하는데, 그녀의 솔직함과 용기가 대단하게 생각된다.     


아니 에르노는 이 작품 외에도 내밀한 가족사와 낙태 경험까지 글의 소재로 삼아 숨김없이 세상에 내놓았다. 그녀의 저작들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가치를 지니는지 나는 판단할 수 없으나, 뭔가 대단히 위대한 작품에 주어져 왔던 상이 아니 에르노에게 주어졌을 때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 내게 그녀는 자전적이고 내밀한 소재로 글을 쓰는 용감한 여성 작가라는 인상만이 워낙 커서 그랬나 보다.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보편성을 획득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사는 사회의 문제가 드러날 때 독자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사실을 그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통해 확인한다.

  


그게 사랑이 아니면 뭐가 사랑인가. 소설을 단숨에 읽고 난 뒤 든 생각이다. 사랑은 뭔가 더 숭고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고, 열정은 단순하고 쉬 변하는 것인가. 그녀는 알렉산드르와 이별한 뒤에도 아끼는 물건을 떠올리듯 그를 애틋하고 따듯하게 떠올린다. 몸과 마음은 별개의 것이 아니며 둘 중 어떤 것이 더 우선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어린아이 때의 신체적인 교감, 스킨십을 잃었기 때문에 방황하고 우울해하는 게 아닐까. 그녀가 연하의 유부남과 사랑에 빠지게 된 계기는 소설에도, 영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저 서로를 알아봤을 것이다. 윤리적 판단과 별개로, 어쩌면 그들은 만나야 하는 사람이었기에 만났을 것이다. 일상적인 관계가 아니어서 더 불타올랐을 수는 있다.

오직 그 사람만 생각하게 만드는 ‘단순한 열정’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이 이 세상엔 더 많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그녀는 행운아이다. 불꽃같은 단순한 열정이 스러지고 몇 년 후, 그에게 향했던 것과 같은 열정과 사랑을 자신에게 쏟아붓는 33세 연하의 팬을 만나게 되니, 아니 에르노는 행운아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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