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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화 Apr 18. 2023

더 웨일

어두운 심해에서 빛을 향해 도약하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통을 건너온 사람은 타인의 고통을 감각하는 통각 하나를 얻는다. 영화 속에서 찰리를 연기한 브렌든 프레이저가 그렇다. 추락의 끝을 보여주는 그의 인생 스토리는 영화보다 더 영화 같다. 그러니 그의 연기는 계산된 것이 아닌 그의 삶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봐도 좋을 듯하다. 연기하는 인물에 밀착되어, 대사를 전달하거나 연기를 한다기보다 그냥 온몸으로 찰리가 되었다.   

  

사람은 연약한 존재다. 그리고 삶은 잔인한 데가 있다. 연약하기에 훗날 후회할 일도 저지른다. 브렌든은 아내가 제기한 이혼 소송에서 10년 동안 매월 우리 돈으로 1억의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는다. 그는 후에 그 당시 자신은 부모가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자폐가 있는 장남을 포함해 아이들에게 소홀했던 것 같다. 가혹한 벌은 두고두고 그를 고통에 빠뜨렸다. 그것 외에도 이미 잦은 수술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성추행 피해를 세상에 알린 뒤 블랙리스트에 올라 영화 출연 제안이 끊기는 등의 악재가 거듭되었다. 세상이 죽어라 죽어라 하고 그를 낭떠러지까지 몰아세웠다.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수상 소감에서 그는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하며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줬다. 고통은 절망을 낳지만 그걸 통과하고 나면 삶을 보는 눈이 깊어지기도 한다.   


제95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브렌든 프레이저

  

딸은 영화의 주인공 찰리가 너무 이기적이라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다. 그 말은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 같은 영화를 보고 이렇게 극과 극의 감상이 나오는구나. 물론 그럴 수 있다. 관객마다 경험도, 가치관도 다르니 당연한 일이다. 나 못지않게 영화를 사랑하는 딸이기에 감동 포인트도 비슷하리라고 생각한 게 안이한 판단이었다.

세대라는 높은 벽을 정면으로 마주한 기분이었다. 나는 내심 내 나이대 부모들의 평균보다 깬 의식의 소유자라고 믿어 왔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딸이 다시금 확인시켜 준 셈이다. 30년에 가까운 절대 시간보다는 부모 자식이라는 위상 때문에 그 거리는 더 좁히기가 힘든 것 같다.

(나중에 더 깊은 대화를 나누어본 결과, 딸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찰리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리즈의 입장을 생각해서였다. 그런 관점이라면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가 엘리의 편에서 영화를 봤을 거라는 단순한 생각이 오해를 낳았다.  )

아카데미상 7개 부문을 휩쓴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대해 특히나 2, 30대 여성들이 열광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데 대해 갸우뚱했던 것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한다. 내게 그 영화는 시작하고 두 시간 가까운 시간이 지나기까지 도대체 뭘 말하려는 것인지 몰라 어지럼증을 느끼다가 마지막 30분에 와서야 영화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B급 영화의 감성에 익숙지 않은 데다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 너무 직접적이어서 감동을 방해했다.

세대 간 좁힐 수 없는 상거(相距)를 두 영화의 감상평에서 확인했다면 성급한 일반화일까.     

일단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머리에서 지우고 영화 <더 웨일>에 대한 나만의 감상을 써본다.     

     



영화는 연극적이었다. 무대 위 세트는 거의 주인공의 집 거실로 한정되어 있다. 현관문으로 여러 사람이 드나들면서 주인공의 현재와 과거를 보여준다. 원작이 연극이라고 한다.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이해가 된다. 좋은 서사가 갖추어야 할 요건이다. 세상에는 서사를 부여하는 일이 비도덕적으로 느껴질 만큼 악 그 자체인 사람도 분명 존재한다. 그런 사람을 이제껏 만나지 않았다는 건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모든 인물이 지독한 현재에 이르게 된 서사가 주어져야 한다.     

앞서 말한 딸의 필터로 찰리를 보면 그는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사람이 맞다. 동성 애인과의 사랑을 선택한 그는 남편과 아버지의 자리를 박차고 떠났다. 그동안 딸 엘리는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원망과 미움으로 바꿔갔을 것이다. 부모 중 한쪽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은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점점 못되게 비뚤어지는 것으로라도 자기 존재를 알리고자 했을 것이다. 같이 사는 엄마와의 관계도 쉽지 않았다. 한 사람에게서 버림받은 피해자라는 동류의식이 모녀를 더 단단하게 묶어줄 거라는 예상은 통념에 지나지 않는다. 엄마는 안팎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엘리가 버거웠을 것이다. 본인의 불행을 간수하기에도 벅찼을 테니. 심지어 엄마는 딸을 ‘악마(evil)’라고 지칭했다.     


이제 누군가의 눈치를 보는 일 없이,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의 전당 아카데미 특별전에서 이 영화를 봤을 때로 돌아가 찰리(브렌든 프레이저)에 대해 말하겠다.

그는 죽어가고 있다. 272 킬로그램의 비대한 몸으로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채 스스로를 좁은 집에 유폐시켰다. 사람이 절망적인 상황에 빠지면 에라 모르겠다, 체념하는 마음이 된다. 그는 오랫동안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파괴하고 학대해 왔다.

영화는 찰리가 자위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첫 장면부터 관객들에게 인물의 최악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처한 상황을 알게 한다. 절망이 더 깊어지는 상황을 맞닥뜨리면 그는 폭식을 한다. 반면 온라인 수업을 하는 그의 모습은 진지하고 건강하다. 자기 모습을 학생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선에서만 그는 그렇게 할 수 있다.

이어 등장한 리즈(홍차우)는 그의 혈압을 잰 뒤 지금 바로 병원에 가지 않으면 일주일 안에 죽는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찰리는 천문학적인 금액의 병원비를 이유로 한사코 그녀의 제안을 거부한다. 초고도비만과 그로 인한 고혈압으로 수시로 심장 압박과 호흡 장애가 오는 그에게 있어서 진정제 역할을 하는 건 어떤 글의 문장들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다. 그건 ‘모비 딕’에 대한 감상을 쓴 에세이의 한 부분이다. 관객은 그 글이 유명 작가의 것인지, 찰리 자신의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는 대학의 글쓰기 강사이다. 수업에서 그가 강조하는 것은 솔직함이다. 그는 반복해서 말한다. 자신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라.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여덟 살 이후로 만난 적이 없는 딸 엘리(세이디 싱크)를 부른다. 집을 떠났을 때 여덟 살이던 엘리는 이제 열일곱 살이 되었다. 엘리는 사춘기 반항아라는 걸 이마에 붙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한다. 사랑이라는 카드를 뒤집으면 미움이 나타날 것이다. 나는 그가 등장하면서부터 알았다. 그녀가 아버지라는 존재를 그동안 얼마나 그리워하고 애정을 갈구했는지를. 정말 미워했다면 그의 방문 요청을 돌아보지 않고 거절했을 것이다. 엘리는 추한 거구의 찰리 모습을 찍어 SNS에 올리고, 집에서 냄새가 난다고 욕을 해대지만 그건 위악적인 몸부림이다.

찰리는 하나의 조건을 내걸며 그걸 해내면 계좌에 모아놓은 적지 않은 돈을 주겠다고 한다. 그는 그만한 돈이 있었는데도 목숨을 연장할 수 있는 병원행을 한사코 거절한 것이다. 그것조차도 자기 위안이고 자기애라고 비난하는 댓글을 읽었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찰리의 제안에 엘리는 솔깃한 듯 반응한다. 엘리가 찰리의 방문 요청에 응한 표면적인 이유는 낙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에세이 과제를 대신 써달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찰리가 제시한 조건은 바로 글쓰기이다. 매일 찾아와 너만이 쓸 수 있는 에세이 한 편을 쓰라고 한다. 그러면서 너는 할 수 있고, 너는 빛나고 놀라운 존재라는 말을 그녀가 올 때마다 반복해서 들려준다. 마치 주문을 외듯이.

사람은 별 게 아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사랑이 필요 없는 척, 이미 다 자라 모든 걸 아는 척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너는 대단한 사람이야, 최고야, 소중한 존재야, 이런 말을 듣고 싶어 한다. 사실 이런 말을 해주는 사람은 생각보다 없다. 찰리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세상에서 사라지기 전 꼭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아이를 버리고 떠난 무책임한 아빠지만, 딸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는 사실과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딸에게 말해 주고 싶다. 엘리 자신이 얼마나 빛나는 재능을 가진 사람인지 알려주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고 떠나려 한다. 엘리에게 준 상처에 대해 그렇게라도 참회하려는 것이다.

그는 젊은 날 한 사람을 사랑했다. 가정을 버리고 그를 선택할 만큼. 그러나 그 선택도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가까운 이들은 둘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애인은 괴로움 때문에 음식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파괴하다가 결국 스스로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혼자 남게 된 찰리는 폭식이라는 방법으로 자기 몸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찰리는 가정을 버리고 사랑하는 딸을 버렸다는 죄책감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 때문에 그런 식으로 자신을 학대해 왔다.

그는 이제 물리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유일하게 친구가 되어 주는 리즈만이 그의 곁에 있을 뿐이다. 리즈라는 존재가 있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리즈는 오빠에 이어 오빠의 애인까지 돌보게 되었고 끝내 그를 보내는 고통을 다시 겪어야 하는 처지이지만 그것조차 받아들인다.      


찰리를 방문하는 또 다른 인물 토마스(타이 심킨스)는 새생명 선교회 전도사로서 찰리에게 구원을 역설한다. 엘리는 그가 처한 상황을 털어놓게 하고 그걸 몰래 녹음한다. 그는 부모와의 갈등으로 가출한 상태이며 사실은 신념 차이 때문에 새생명 선교회에서도 나왔다. 엘리는 토마스의 부모에게 연락해서 그의 상황을 알린다. 부모는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토마스는 기쁨에 차서 그 사실을 전한다. 최선의 해결책은 회피하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임을 엘리는 알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녀가 의도를 했건 하지 않았건 본능적인 판단으로 토마스에게 가장 최선의 결말을 찾아준 것이 아닐까.     


찰리가 응급상황에서 되뇌던 문장들이 바로 엘리가 쓴 에세이임이 마지막 장면에서 밝혀진다. 엘리 자신도 기억하지 못하는 글을 그는 구원의 통로인 양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게 그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구원이었다. 그 글은 글쓰기 강사인 찰리가 보기에 어떤 글보다 명문이었다. 엘리만이 쓸 수 있는 글, 엘리만의 ‘솔직한’ 관점이 담긴 글은 찰리에게 엘리의 가능성이자 엘리 자체였다. 엘리가 낭독하는, 수없이 읽어서 이제는 다 욀 수 있게 된 문장을 들으면서 그는 사력을 다해 소파에서 일어선다. 고통으로 가득 찼던 그의 삶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젊은 관객들은 동의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나는 엘리가 그 이후 제 길을 찾아갈 거라고 믿는다. 그녀 또한 자기만의 고통에 휘둘려 꺼내 보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제 안에 존재하는 빛나는 가치를 찾을 거라고. 분명 그럴 거라고. 그녀는 찰리가 말한 대로 빛나는 사람이니까.    

  

사람은 연약한 존재다. 두고두고 후회할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나 스스로 변화의 길을 내기도 한다. 나는 그걸 용기라고 부르고 싶다. 비록 오랜 시간 스스로를 파괴한 결과로 육체는 되돌릴 수 없이 망가졌어도 영혼은 더 높은 곳을 향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찰리가 마지막으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엘리를 향해 걸음을 떼는 순간 환한 세계로 도약하듯이 말이다. 심해를 가르고 하늘을 향해 도약하는 고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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