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관문을 열자 맛있는 냄새가 먼저 달려 나와 나를 반겨 주었다. 좁은 주방에서 딸은 벌써 몇 가지 요리를 완성해 놓은 참이다. 내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몇 시간 전부터 음식을 준비하는 수고를 했을 그를 생각하니 대견하고 고마웠다. 자식이란 애틋하고 가슴 아픈 존재, 오래 격조해도 얼굴을 마주하면 반갑고 좋은 존재다.
딸이 이직과 동시에 독립한 지 이제 1년 반이 지났다. 절대 먼저 연락하는 법이 없는 딸에 대해 서운해하지 않기로 마음먹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여겼다. 딸은 그랬다. 먼저 말을 붙여오는 일이 드물고 사근사근한 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말로 표현하지 않은 마음을 옜다, 하듯이 행동으로 묵직하게 보여준다. 한때 엄마 껌딱지형 딸을 가진 지인들을 부러운 눈으로 봤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우리 같은 모녀 관계가 더 건강한 거라고 말해 준 뒤로 사실이 어떻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완성한 음식들을 테이블에 옮긴다. 삼겹살 꽈리고추 볶음, 감자채볶음에 계란말이, 고추장찌개까지. 밥을 퍼 놓고 냉장고에서 소주까지 한 병 꺼내 놓으니 맛집 못지않은 비주얼의 식탁이 완성되었다. 나는 다소 과장된 리액션을 했다.
아, 맛있겠다. 남이 해 준 음식 먹어보는 게 얼마 만인지.
식당 음식도 남이 해 준 거잖아.
가족이 해 준 음식을 식당 음식에 비할 수 있나.
나는 음식 하나하나마다 맛있다고 말해 주었다. 없는 솜씨로 오랜 세월 식구들의 밥상을 책임져 온 사람으로서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온 진심이었다. 격려이자 고마움의 표현이었다. 밥상을 받는 사람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이다.
딸이 말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를 아는데, 내 또래 사람들을 보면 그거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들도 의외로 많더라.
나는 그의 말에 호응하며 덧붙였다.
나도 20대부터 결혼할 때까지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랐어. 아예 그런 생각 자체를 못했던 것 같아. 너희가 아주 어릴 때 부산국제영화제의 존재를 알고 영화제와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딱 네 나이 때였어. 겨우 30대 초반. 그때의 내가 안 됐다는 생각이 들어. 좋아하는 걸 하면서 동시에 죄책감을 느껴야 했어.
딸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깊이 주억거렸다. 나는 화제를 바꿔 본다.
요즘은 어때? 독립생활이나 회사 생활에 만족해?
당연히 그렇다고 할 줄 알았다. 딸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빠트리지 않고 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들어온 질문에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음…, 일이 그다지 힘들지 않다는 것 말고, 그 일이 보람이나 자아실현을 가져다주지 않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아. 다른 일을 하고 싶어.
의외의 답변에 당황한 나는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자아실현은 네가 지금처럼 좋아하는 일들을 하면서 하면 되잖아. 생업을 통해 자아실현을 하는 사람이 몇 퍼센트나 되겠어?
말을 끝내자마자 아차 했다. 라떼 식 대응이 되고 말았다는 걸 자각했다. 또다시 세대 차이를 확인시켜 주는 말을 해버렸구나.
부산에서 잘 다니던 첫 직장을 퇴사하겠다고 했을 때, 겉으로는 격려의 말을 하면서도 당혹과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던 부모를 보며, 일과 직장에 대한 세대 차이를 절감했다고 딸이 앞서 말하지 않았던가.
얘기를 더 들어보니, 혼자 여행하고 혼자 영화 보고 혼자 하는 일을 즐기는 그이지만 요즘 들어서는 느슨한 연결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았다. 오피스텔이 살기에는 편하지만, 이웃과 소통할 수 있는, 공동체가 살아 있는 동네에서 살고 싶다고 했다.
못 본 사이, 독립생활을 하면서 생각이 깊어진 그다.
두 사람의 공통된 관심사인 영화 이야기는 가장 접근하기 쉬운 화제다. 딸은 얼마 전에 관람한 <두 사람을 위한 식탁>이 최근에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좋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그 영화를 작년 부국제에서 관람한 사실을 알고 꺼낸 말이었다. 나는 여성 서사, 그중에서도 모녀 이야기에 끌린다. 스스로 부족한 엄마라는 자의식을 품고 있는 한편으로, 모든 엄마들이 태어날 때부터 엄마였던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생전 처음 하는 엄마라는 역할 앞에 미숙할 수밖에 없다. 영화 속 엄마 상옥 씨는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했다. 딸 채영 씨에게도. 당연한 얘기지만 엄마에게도 그만의 삶이 있다. 내가 상옥 씨에게 몰입한 것처럼 딸은 채영 씨의 입장에 서서 영화를 본 모양이었다. 그렇게 해서 모녀는 영화에서처럼 서로에 대해 시나브로 이해하게 되겠지. 우리는 함께 빈 그릇들을 치우고 각자 잠자리에 들었다.